술을 자주 마시진 않는데, 술을 마시면 꼭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그날도 잘 기억나진 않는데, 술기운에 쌤한테 전화를 걸었나 보다.
"쌤, 저 술을 좀 마셨는데요, 저 좀 데리러 와주시면 안돼요? 저 지금 연신내인데 친구들이 다 먼저 가버려서.."
나도 왜 그렇게 말을 했는지, 왜 데리러 와 달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그날 술을 먹다가 오지랖 지선이가,
"은영아, 너도 이제 그냥 정신 차리고 선이라도 봐서 결혼하는 게 좋지 않겠니? 언제까지 그렇게 있을 거야? 아이도 낳고 해야지?"라고 했었고,
"내가 뭐 어때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 만나서 결혼이나 하라고? 그래 너 잘났어. 넌 회사도 다니고 곧 결혼한다고 지금 나 무시하나 본데, 나도 재밌게 살고 싶다고. 그냥 이대로 집구석에만 갇히기 싫어. 그건 이미 충분히 많이 했어!"라고 하고 화가 나서 집에 간다고 나왔다.
그리고 울컥한 마음과 술기운에 쌤한테 전화를 했나 보다.
이번 건은 정말 큰 실수였다. 전화를 끊고 도로변 보도블록에 앉아 있는데 찬 기운에 술이 깨고 현실을 깨닫자,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냥 전화기 끄고 택시 타고 집에 갈까?'
'다시 전화해서 친구들이랑 게임 한거라고 오지 않아도 된다고 할까?'
혼돈의 카오스 속에 쌤한테 전화가 왔다.
"지금 거의 다 왔는데 어디예요?"
며칠 만에 만났는데, 이번엔 유난히 더 창피했다. 술 마시고 불러내는 철없는 누나라니..
그래도 쌤은 웃으며 말해줬다.
"마침 저도 잠이 안 오던 참이었어요. 택시비 없었던 거면 내가 택시 잡아 줄 테니 타고 가세요. 대신 이자 쳐서 갚으셔야 합니다."
기분이 너무 찹찹해서 집에 가기 싫었다. 내 얘기를 누군가 들어줬으면 했다.
"어차피 지금 가나 이따 가나 할증인데, 술 한잔 할래요?"
헐, 내가 이런 말을 하다니.. 말을 내뱉고 심장이 급격히 두근거렸다.
"네, 그럼 이미 많이 마신 것 같으니 가볍게 한잔하고 가요."
그렇게 우리는 열려있는 가게 중 적당한 곳으로 갔다. 나름 건강을 생각한다고 생굴집으로 가자고 했다. 생굴에 소주를 마시며 저번에 과외를 하며 말했던 잃어버린 20대, 힘들었던 시간들, 내가 살아온 얘기, 오늘 있었던 얘기, 왜 영어를 배우고 싶었는지.. 주저리주저리 내 얘기를 늘어놨다.
난 지긋지긋한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완전히 새로운 곳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그곳이 영어권일지, 다른 언어권일지는 모르겠지만, 영어 공부가 그 탈출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영어를 배운다고 말했다. 원래 처음은 그런 생각이 아니었지만,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영어를 배우면서 더 들었나 보다. 망해버린 20대를 아예 지우고 싶어서..
쌤은 조용히 듣더니 "고생 많았어요. 이왕 하는 거 열심히 해봐요."라고 응원해 줬다. 그리곤 쌤은 어떤 사람인지 들을 수 있었다.
군대 다녀와서 학비를 벌고 싶었단 이야기, 유학을 가려다가 가정 형편이 안 되는 걸 알고 포기했던 이야기, 빨리 취직해서 돈을 벌고 싶단 이야기. 어리지만 나보다 더 어른인 것 같았다.
서로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고, 어느덧 아침 해가 떴다.
이제 할증도 끝나고 지하철도 다니는 시간이니 가야겠다며 초췌한 몰골로 서로 집으로 갔다.
그래도 조금은 가까워진 것 같은 하루였다.
딱히 내 스타일은 아녔지만, 쌤은 왠지 같이 있으면 기운이 나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