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과외도 두 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미 예전에 배웠어야 했던, 아니 배웠지만 머릿속에서는 사라졌던 것들을 배워나가는 게 재밌었다. 아주 대단하게는 아니지만 그. 나. 마. 좀 영어로 간단한 말은 할 수 있게 된 게 신기했다. 그렇게 두껍지는 않았지만 첫 번째로 고른 책이 이제 거의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님, 이제 책도 다 끝나가는데 책거리 안 해요?"
"책거리하려면 성문영어 정도는 해야 책거리하죠. 맨날 놀 궁리만 하지 말고 단어를 더 외우세요."
"아, 그래도 책 끝난 기념으로 뭐 하나 해요."
"그럼 책 끝날 때 마무리 평가할 테니 거기에서 80점 넘으면 소원 들어 드릴게요. 대신 뭘 사 달라는 건 안 돼요~"
"아싸, 열심히 해볼 테니, 소원 들어줄 준비나 하세요!"
과외를 시작하기 전에만 하더라도 이런 의욕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냥 그런 하루하루의 연속. 그런데 확실히 과외를 시작하고, 쌤을 만나고 다시 에너지가 생기는 것 같다.
쌤에게는 창피해서 말하지 못했지만, 나도 소소하게 일을 시작했다.
아마 분명 엄마의 오지랖이었겠지만, 얼마 전에 엄마 친구분께서 손주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쳐 줄 순 없냐는 부탁을 하셨고, 평소 같으면 "아, 제가 바빠서.. 죄송합니다."라고 했을 텐데, 무슨 생각인지 대뜸 하겠다고 답을 해버렸다.
바이올린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아이에게 재미 삼아 지인 찬스로 싸게 가르쳐 보려는 생각이었기도 했겠고, 나도 초심자는 부담 없이 가르칠 수 있을 듯해서 승낙을 한 것이다. 일주일에 두 번, 30분.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내 나름 큰 변화다.
2주 후 쌤은 빈칸 채우기와 단어 문제 20개를 준비해 왔고, 일부러 쉽게 낸 것인지, 난 1개 빼고 다 맞았다. 하나도 원래 맞출 수 있는 거였는데 mistake에 s가 하나 더 들어가 misstake가 되어 버렸다. 매번 틀리던 거였는데 또 틀렸다. 그래도 80점이 넘었기에 난 자신 있게 쌤에게 말했다.
"우리 유채꽃 보러 가요!"
"네? 유채꽃 보러 어디요?"
"제주도!!"
"당일로 제주도를 요?"
"우리는 스승과 제자 사이니까 수학여행처럼 방이 여러 개 있는 펜션으로 가요."
"그럼 언제요?
"바로 다음 주! 마침 다음 주가 유채꽃 절정이래요."
"아, 너무 무계획 아니에요?"
"그동안 과외하느라 수고하셨으니 비행기, 숙소 그리고 운전까지 제가 책임질게요. 어차피 선생님 운전면허 없잖아요 ㅋㅋㅋ"
"그럼 대신 밥은 내가 살게요. 근데 저 비행기 처음 타는데 뭐 준비해야 해요?"
와... 스물셋인데 비행기를 처음 탄다니..
요즘은 흔히 가는 고등학교 수학여행도 마침 그때가 IMF라 못 갔었다고 한다.
괜히 부담감이 커졌다. 근데 너무 흔쾌히 승낙한 거 아닌가? 선생님 속을 영 모르겠다.
돈만 있으면 비행기표는 언제든 있었고, 숙소도 예전에 친구들이랑 갔던 곳으로 정해서 일사천리로 준비는 끝났다.
마치 수학여행을 온양 쌤은 들떠 있었고, 난 이번 여행만큼은 누나처럼 쌤을 데리고 즐거운 여행을 보냈다. 2박 3일이 그렇게 2시간처럼 흘러갔다. 둘째 날 밤, 이젠 나이 제법 따뜻해져서 바다가 보이는 테라스에서 한라산 소주와 오징어 땅콩으로 마지막 날 밤을 보내고 있었다. 주변에선 파도 소리와 바람 소리만 들렸고, 평일이라 다른 관광객도 없었다. 마치 우주에 우리만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선생님, 근데 무슨 생각으로 여자랑 단둘이 여행을 오기로 한 거예요? 내가 아예 여자로 안 보이는 거예요?"
"음, 저희는 엄연히 스승과 제자니까, 수학여행처럼 ㅋㅋㅋ"
"아, 저 듣고 싶은 노래 있는데, 같이 들을래요?"
"뭔데요?"
"제주도에 왔고, 밤이니까, '제주도 푸른 밤'?"
"네, 좋아요!"
'떠나요 둘이서 모든 걸 훌훌 버리고 제주도 푸른 밤 그 별 아래
이제는 더 이상 얽매이긴 우리 싫어요
정말로 그대가 외롭다고 느껴진다면 떠나요 제주도 푸른 밤하늘 아래로'
"노래가 참 좋네요."
"그러네요, 제주도에서 들으니 더 좋은 거 같아요. 근데 저 한 가지 할 말이 있는데, 해도 돼요?"
"그럼요, 지금은 뭐든 말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인 거 같아요."
"음.. 나도 그렇게 바보는 아니에요. 아무 생각 없이 여자랑 단둘이 여행 올 만큼. 그리고 아무한테나 과외를 하겠다고 말할 만큼.. 처음 은영님 만났을 때는 이상한 사람인가 했어요. 그런데 집에 돌아오면서 자꾸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때 측은했던 은영님 모습이. 처진 어깨, 내려간 시선. 그런데도 용기 내서 말한 게 참 대단하면서도 안쓰러워 보였어요. 그래서 과외를 시작했고, 은영님이랑 같이 하는 시간이, 변해가는 모습이, 그리고 은영님의 따뜻한 마음이 나도 따뜻하게 만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생각했어요. 조금 더 가까운 관계가 돼도 될까,,? 괜히 나 혼자 김칫국 마신 거면 바로 술 더 마시고 술주정한 걸로 해요 ㅎㅎ"
"그럼 일단 짠?"
"ㅋㅋㅋ"
"나도 선생님이 편하고, 선생님 때문에 즐거워요. 근데 내가 그래도 되나 싶어요. 선생님 보다 나이도 많고, 아무것도 잘난 게 없는 사람인데.."
"나랑 있으면서 더 잘나 지게 되면 되죠. 어쨌든 전 선생님이니까요!"
"자꾸 누나한테 까불면 혼나요."
"자꾸 선생님한테 대들면 벌줄 겁니다."
그렇게 우린 조용한 제주도에서 한참을 웃으며 이야기했다. 초봄, 제주도 밤바다는 서늘했지만, 우리의 밤은 따뜻했다. 그동안 막아뒀던 마음이 밀려드는 파도 앞에 모래벽처럼 시원한 소리와 함께 다 녹아내렸다. 이래도 되나 하는 마음 한구석 불안감이 있었지만, 오늘은, 제주도에선 그런 건 잊기로 했다.
'제주도, 푸른 밤, 그 별 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