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입주금 3천

by 구르미


해가 너무 눈부셔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슬쩍 옆을 보니 쌤은 옆에서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고, 시계를 보니 벌써 11시였다. 우리 비행기는 12시였고, 말 그대로 폭망 했다.


어떻게 하지 고민하다가, 도저히 지금 일어나도 공항에 시간 내에 갈 수는 없으니 조용히 돈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슬그머니 침대에서 굴러 내려와 항공사에 전화했고, 다행히 평일이라 비행시간을 오후 6시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물론 돈은 들었지만..


쌤을 더 재우고 싶었지만 12시면 체크아웃시간이라 어깨를 툭툭 치며 깨웠다. 쌤은 미소를 띠며 일어났지만, 시간을 보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헐, 우리 비행기 어떻게 해요?"

"누나가 다 알아서 했어요."

"아, 나 오늘 오후에 알바 가야 하는데.."

"뭐 어떻게 해요, 헤엄처서 가던가 ㅋㅋ"

"자기 일 아니라고 너무 막말하는 거 아니에요?"

"뭐, 하루 안 나간다고 자르기야 하겠어요? 이렇게 유능한 인재인데? ㅋㅋ"

"에휴,, 세상 편하다니까.."


그렇게 우린 대충 씻고 부스스하게 체크아웃을 하고 펜션을 나섰다.

이미 시간은 점심이 되어 쌤은 해장국을 먹자고 했지만, 난 아저씨 같다며 가뿐히 무시해 주고 스벅으로 향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목으로 넘기니 꿈인 줄 알았던 게 현실인 걸 깨닫게 되었다.


내가 이래도 되나..?


그렇게 갑자기 생긴 휴일처럼 제주도에서 커피를 마시고, 바다를 보고, 이야기를 하고, 바람을 맞으며 어제 보다 더 가까워진 현실을 즐겼다.


늦은 밤 김포에 도착해서 헤어지면서, 오늘이 꿈의 마지막이 아니길 바라며, '잘 가'라고 인사했다.


4월 말이 되니 날은 더 포근해졌고, 집 앞 하천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벌써 제주도에 다녀온 지도 3주가 지났다. 과외인지 데이트인지 모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엄마에게 난 운동을 간다며 쌤과 함께 집을 나섰다. 그렇게 우리는 하천을 걸으며 봄을 즐겼다. 남들은 한주에 한번 만날까 말까인데, 우린 적어도 두 번은 무조건 만나니 그게 너무 좋았다. 함께 걷고 있는데 문득 한 가지 걱정이 머리를 스쳤다.

'왜 안 하지..?'

원래도 생리불순이 심했는데, 이상하게 마법을 할 날이 되었는데 소식이 없다.

사실 제주도에서 그 일이 있던 다음날 오전에도 혹시 몰라 약국에 들러서 여자 약사 선생님한테 조용히,

"혹시 피임약 있나요? 제가 어제.."

이렇게 쭈뼛댔더니

"원래 관계 후에는 효과가 없는데, 혹시 모르니까 전에 먹는 피임약을 2개 먹어봐요."

하시며 조그만 알약을 주셨다.

'나이가 서른인데 아직 이런 것도 모르다니..' 괜히 허투루 나이를 먹은 것 같아서 창피했다.


그 후 혹시나 하는 걱정이 들긴 했지만, 설마 하며 말았다. 그렇게 웃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걷다가 흔하게 보던 전봇대 광고 하나가 영화 슬로 모션처럼 눈앞을 스쳐갔다.


'실입주금 3천'


"우리, 저런 집 하나 구해서 살까요?"

"누나 돈 있어요?"

"내가 예전에 전화로 보험 상담하는 걸 했는데, 사람들이 내 목소리가 좋고 설명을 차분하게 잘한다고 계약을 엄청 많이 했었거든요. 그때 6개월 했는데 성과급까지 5천 받았었어요. 학비로 쓰긴 했지만 아직 3천은 있어요."


사실 농담이 아니라 조금은 진심이 깔려 있었다.

엄마가 좋긴 했지만 매번 엄마 수발드는 것도 지쳤고, 이참에 엄마는 큰 오빠네로 가고 난 따로 나와서 살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쌤은 그냥 웃으며, "이왕 갈 거면 더 좋은데에서 살아야죠. 내가 빨리 취업해서 돈 많이 벌게요!"라고 말했다.


쌤은 이번 가을학기에 복학이라 요즘 알바시간을 더 늘렸다. 졸업까지 앞으로 2년 반.

과연 우리는 같이 살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오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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