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계절의 이름처럼, 여름, 가을, 겨울 보다 두 배는 빠르게 지나갔다. 꽃이 피나 하더니 꽃은 지고 자연은 초록으로 가득했다. 쌤과 함께 보낸 지도 벌써 반년이 다 되어 갔고, 이젠 우린 제법 끈끈한 관계가 되어갔다. 조마조마했던 마법은 다행히 한주 후에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다행이지만, 조금은 걱정되기도 했다. 나도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쌤과 내 관계는 물론 울 엄마나 쌤 부모님에게는 말씀 못 드렸지만, 나와 쌤의 친구들에게는 공개했다. 내 친구들은 괜한 불장난 그만하라고 핀잔을 줬지만, 쌤의 친구들은 그리 크게 뭐라 하진 않았다. 그냥 신기하다? 정도? 물론 7살이나 많은 누나라서 쉽게 말을 못 했을 수도 있겠지만..
복학을 앞두고 쌤의 절친 커플과 넷이 조금 이른 6월에 여름휴가를 가기로 했다. 이번에는 쌤이 친구와 함께 준비하기로 했고 쌤 친구의 클릭을 타고 우린 다 같이 석모도로 향했다. 저번엔 제주도였는데 이번엔 석모도라니. 우린 섬과 연관이 많네 하며 신나는 음악을 들으며 출발했다.
도착한 숙소는 미술관과 함께 있는 숙소였는데, 숙소 앞마당에 크게 아카시아 나무가 있었다. 언젠가 내가 쌤에게, 티브이에 나오는 장면을 보면서 "아카시아가 흐드러지게 핀 걸 보면 좋겠어. 그럼 향기가 엄청 좋겠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는데, 숙소 소개를 하나씩 찾아보며 아카시아가 있는 숙소를 찾은 것이다.
창문을 열자 아카시아 향이 코를 간지럽혔고,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왔다.
'좋다.'
숙소 옥상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데, 잠시 화장실 갔다 온다던 쌤이 케이크에 초를 붙여서 들고 올라왔다.
"100일 축하해. 같이 축하하고 싶었어."
친구네 커플도 웃으면서 오래오래 사귀라며 축하해 줬고, 선물이라며 커플 핸드폰 고리를 주었다. 나이 서른에 이런 걸 해도 될까? 란 생각도 들었지만, 기분이 좋았다. 우리 둘의 관계가 축하받는 관계라는 게.
사실 100일 이란 걸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나도 학창 시절에 친구들이 100일이니 200일이니 챙기는 걸 봤었지만, 이 나이 먹고 100일을 챙기게 될 줄은 몰랐다.
술을 마시면서 커플 게임을 했고, 걸리면 상대 커플이 질문을 했다.
처음엔 잘 넘어갔지만, 역시나 술을 먹다 보니 실수가 잦아졌고, 거의 우리 커플의 청문회가 되었다.
어떻게 만났는지를 물어봐 지하철에서 봤던 그때를 이야기해 줬고,
호칭은 뭘로 하냐는 질문에 난 '동철씨' 라고 하고 쌤은 '은영씨' 나 누나라고 한다고 해서,
사귀면서 호칭이 그게 뭐냐며 '자기야' 정도는 불러야 한다고 성화였고,
다음에 또 걸려서 쌤이랑 나랑 서로 자기야를 다섯 번씩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무릇 사귀는 사이에는 반말을 해야 한다며 이어서 반말로 말하기도 했다.
그러다 내가 "이건 너무 나만 손해인거 아냐? 내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 너희들 돌잔치 했어!"라고 했더니 다같이 웃음 바다가 되었다.
아무 걱정 없이 웃었고, 아무 걱정 없이 행복했다.
그러다 친구네 커플은 먼저 내려가고 우리 둘이 옥상에 남았다. 난 그의 어깨에 기댔고, 둘이 하늘을 봤다. 섬이라 별이 참 많았지만, 아는 별자리가 없었기에, 멀리 반짝이는 별을 보며 이런 얘기를 했다.
"동철씨가 복학하면, 이제 우리 자주 못 보겠죠? 아마 복학하면 새내기 애들이 좋다고 막 따라다니고 하는 거 아녜요?"
"에이, 요즘 새내기들 복학생이랑 같이 안 놀아줘요. 그리고 복학해도 알바 계속할 거라 그럴 시간 없을 거예요."
"만약에, 예쁘고 착한 여자가 동철씨 좋다고 하면, 나 같은 늙은 사람 말고 젊은 사람 만나요."
"100일에 하는 농담 치고는 별로 재미가 없네요~"
쌤은 그러면서 나에게 입 맞췄다. 방금 먹었던 생크림 향이 내 코를 더 달콤하게 해 줬다.
지금이 계속 됐으면.. 너무 행복해서 너무 불안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결국 끝이 뻔했다. 하지만 놓치기 싫었다. 이미 꽃이 다 졌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다시 꽃이 필 수 있다는 걸 알게 해 준 사람이었으니까.
바람이 불었고, 아카시아 향이 밀려왔다.
몇 주 후면 저 꽃도 끝나겠지. 지금은 저렇게 주렁주렁 달려 있지만 한 달만 지나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
마치 내 젊음처럼. 지금 느끼는 이 사랑처럼.
내 젊음도 꽃피는 지금처럼 내년이 되면 다시 돌아오면 안 될까?
타닥타닥 장작불 소리가 시계소리처럼 들렸다.
한번 흘러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 걸 알려주는 것처럼.
그렇게 다시 돌아오지 않을 밤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