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면

by 구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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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찾아왔고, 쌤은 예정대로 학교에 복학했다.

어떻게든 과외를 계속해주고 싶다고 했지만, 복학하고 수업에 과제에, 그리고 알바에 바쁜 걸 알기에 과외는 그만하기로 했다. 사실 과외보다는 과외란 이름의 데이트였기에 공부를 함께 못한다는 것보다 보는 시간이 줄은 것이 더 아쉬웠다. 그래도 미래를 위해 한 걸음 더 나가려고 하는 쌤이 대견하고 멋있어 보였다.


전화는 그래도 매일 했지만, 만나는 횟수는 많이 줄었다. 예전엔 평일에도 과외를 핑계로 만나고 주말에도 만났지만, 이젠 2주에 한번 만나면 잘 만나는 것이었다. 투정 부리고도 싶었지만 참았다. 내가 그에게 걸림돌이 될 수는 없었으니까.


토요일 오후, 엄마 생일 겸 오랜만에 가족들이 모였다. 큰 오빠가 술을 거하게 마시더니


"은영아, 너 지금 만나는 사람 없지? 그럼 더 늙기 전에 결혼이나 해라. 내가 거래처에 괜찮은 사람 하나 소개해 줄 테니 올해 안에 바로 결혼해."


큰 오빠는 항상 명령조 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더 심해졌다. 순간 묵혀뒀던 화가 확 폭발했다.


"엄마 아플 때는 관심도 없더니, 나보고 결혼이나 하라고?"

"오빠가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이래라 저래라야?"


더 참고 있기 힘들어 '그렇게 날 보내고 싶으면 내가 알아서 나가면 될 거 아니야!'라고 외치고 무작정 집을 나왔다. 그래도 엄마 생일인데, 내가 좀 너무했나 싶긴 한데, 들어가긴 싫었다.


곧바로 엄마에게 전화가 왔고, 괜히 화내서 미안하다고. 잠깐 친구 좀 만나고 들어가겠다고 했다.

누굴 부를까 하다가 쌤이 생각났다. '오늘은 수업이 없겠지? 학교에 찾아가 볼까?'


요즘 쌤은 알바 아니면 도서관이다. 서프라이즈로 몰래 학교에 찾아가 보기로 했다.

9월 말이라 학교는 축제가 한창이었다. 왠지 대학생이 아닌 나에겐 허락되지 않는 남의 물건인 양 부담스러웠다. 도서관 앞에 도착해서 쌤에게 전화를 걸었다.


"쌤, 나 어딨 게?"

".... 아, 잠깐만, 나 나가서 받을게. 어, 나왔다. 어, 어디야? 오늘 가족 식사 한다며?"

"아, 그냥 쌤 보고 싶어서 왔어. 나 중앙도서관 앞이야 ㅎㅎ"

"뭐? 알았어, 지금 금방 나갈게~"


쌤은 전형적인 복학생 차림으로 해진 운동복에 모자를 눌러쓰고 후줄근한 차림으로 부끄러워하며 나왔고, 난 그런 모습이 왠지 귀여웠다. 축제인데 도서관에만 있는 게 말이 되냐며 핀잔을 줬지만, 쌤은 해야 할 게 많다고 곧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서운했다. 가뜩이나 오늘 집에서도 기분이 안 좋아 나왔는데, 쌤은 바쁘다고 하고.. 나도 모르게 화를 냈다.


"꼭 그렇게 까지 해야 해? 나한테 요즘 너무 소홀한 거 아냐?"

"은영아, 어쩔 수 없잖아. 장학금도 받아야 하고, 자격증도 따야 하고, 그렇게 해야 빨리 우리가 결혼하지."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해? 난 지금도 좋아. 그냥 이대로에서만 나 좋아해 줘도 난 행복하다고."

"내가 안 그래, 나도 누나에게 당당해지고 싶어. 나도 누나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고."

"그건 니 행복일 것 같은데, 난 그런 거 바란 적 없어. 오빠가 나보고 결혼하래. 우리 집에 얘기하면 안 돼? 나 쌤 만난다고 얘기하면 안 돼?"

"그럼 내가 뭐라고 말해? 과외하던 7살 어린애가 와서 결혼하겠다고 말해?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나도 당당하게 말하고 싶어."

"우리가 같은 길을 가고 있다고 믿었어. 지금은 조금 멀리 떨어져 있지만, 언젠가는 이 길에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 근데 우리는 너무 다른 속도로 달리고 있는 것 같아. 언젠가 만날 순 있겠지만 쌤은 너무 빨라서 그냥 날 지나쳐 갈 것 같아. 우린 결국 같이 달리진 못할 것 같아. 쌤, 우리 시간을 좀 가져보자."

"시간은 무슨 시간이야, 지금 잘 있잖아 우리. 그런 말 하지 마."

"아니야, 쌤 공부도 해야 하니까, 우리 조금만 시간을 가져보자."


그렇게 난 내 손을 붙잡는 쌤의 손을 뿌리치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왔다.

버스를 타자마자 눈물이 쏟아졌다.

나도 알고 있었다. 우리가 결국 안될 거란 걸.

그리고 생각했었다. 언젠가 놓아줘야 한다는 걸.

그런데 그 시간이 너무 갑자기 찾아왔다. 마치 응급실에서 인사도 못하고 보냈던 아빠처럼.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고개를 숙이고 저벅저벅 집으로 돌아가 빌라 옥상에 올라갔다. 밤은 어두웠지만 가을밤 거리는 분주했다. 핸드폰은 계속 울렸지만 받을 수 없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보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


별이 보고 싶어 하늘을 봤지만, 흐린 날씨와 대낮처럼 밝은 조명에 보이지 않았다. 내 미래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쌤을 보내줘야 하는 걸 알지만, 내가 쌤을 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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