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메세지

by 구르미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집으로 갔고, 엄마는 뭘 그런 걸로 그렇게 삐지냐며, 굳이 꼭 결혼 안 해도 된다고 내 편을 들어줬다. 큰 오빠는 그래도 사진이라도 봐보라면서 일말의 끈을 놓지 않으려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쌤은 계속 나에게 전화하고, 집으로도 찾아왔지만 난 2주만 떨어져 있어 보자고 했다.

하지만 자신은 없었다. 나도 쌤이 보고 싶었고, 같이 있고 싶었고, 무엇보다 쌤을 마음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싸운 거라면, 누군가 바람피운 거라면 마음이 더 편했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그럼 신나게 욕하고 저주하며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테니까.


약속한 2주일 중 한주가 지났다. 식음을 전패하거나, 아무 일을 못하거나 그렇진 않았다. 다만 모든 음식이 간이 하나도 안 한 듯 아무 맛이 안 났고, 어떤 일을 해도 재미가 없었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것 같았다. 머리는 연락하지 말라고 하지만, 마음은 자꾸 쌤이 그리웠다.


그날 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큰오빠에게 전화가 왔다.


"은영아, 내가 소개해 준다는 사람 진짜 안 만나 볼 거야? 진짜 괜찮은 사람인데.."

"아, 됐다고, 어차피 그 사람도 미국에 사는 거잖아. 말이 되는 소릴 하고 있어. 끊어!"

"그럼 은영아, 너 혹시 미국에 와서 살 생각 없니? 너 어차피 엄마 간병하느라 대학도 그렇고 경력도 그렇고 한국에서는 해봤자 그때 하던 전화상담원 정도잖아. 이제 와이프도 일을 나가야 해서 네 조카 봐줄 사람도 필요하거든. 여기 오는 거 어때?"

평소 같으면 내가 미쳤다고 거길 가냐? 라며 대차게 쏘아붙이고 끊었을 거다. 근데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렇게 해야 쌤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아.'

"오빠, 그럼 나 얼마 줄 건데? 내 방은 따로 있는 거지?"


그렇게 난, 2주가 되기 전에 한국을 정리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정리해야 할 짐이랄 게 없어서 캐리어 하나면 충분했고, 정리해야 할 관계라고 해봤자 과외하던 이웃집 꼬마 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쌤에게,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도 내가 어떻게 이렇게 태연하게 떠날 수 있었는지 신기했다. 아마 그에게 싫증 나거나 미웠다기보다, 점점 더 앞으로 나가는 쌤과 더 멀어지는 격차만큼 이젠 안될 거라는 비관주의와 다시 누군가를 떠나보내며 상처받기 싫다는 내 보호 본능이 더 강했던 것 같다. 결국 이기적이었던 건 나였다. 그렇게 나만 생각하고 그를 포기했다. 포기라기보다는 도피가 맞을 것 같다. 항상 다른 사람만 생각하던 내가 처음으로 날 위해 한 선택이었다.


그렇게 난 미국으로 떠났고, 폰도 다 정리했고, 친구들에게도 따로 얘기하지 않았다. 혹시나 쌤이 물어볼까 싶어서. 그리고 그렇게 우린 잘 될 거라며 큰소리쳤던 내가 창피하기도 해서 말하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난 큰오빠가 소개해준 사람을 만났다. 나 보다 네 살 많은 남자였고, 깡시골 오스틴에 맞는 수더분한 사람이었다. 사랑이란 그런 감정 보다 서로의 필요에 의해 우린 결혼했다. 그는 한국인 여자가 필요했고, 난 여기에 있어야 할 이유가 필요했다.


그렇게 1년, 2년, 그리고 3년이 지났고, 다시 봄이 되었다.


그리 나쁘지 않은 삶이었다. 딸이 생겼고, 난 딸을 보느라 조카를 보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쌤에게 배웠던 영어 덕분에 처음엔 힘들었지만 곧잘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가 한인이 많이 모여사는 곳이라 막상 영어를 잘 못해도 큰 불편이 없었다. 특별하지 않지만, 나쁘지 않았다.


100일의 기적이라고 하던데 딸내미는 밤에 잠을 안 잔다. 누가 이기나 보자며 낮잠을 안 재우고 계속 놀아줬더니 오늘은 정신을 놓고 잠들었다. 참 오랜만에 얻은 육휴였다. 남편은 미국에서 일하지만 한국과 일하기 때문에 낮밤이 따로 없어 오늘도 바로 다른 방에서 잠들었다.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뭐 하지..?


진짜 오랜만에 피망 맞고를 켰다. 비밀번호를 까먹어 한참을 찾다가 결국 초기화하고 접속했는데, 난 깜짝 놀랐다. 분명 내 돈이 10억이 있었는데, 1000억이 되어 있었고, 등급이 초인 등급이 되어 있었다.


'누가 내 아이디를 해킹했나? 아니지, 누가 아이디를 해킹해서 돈을 불려놔?'


돈 정보 아래에 쪽지를 봤는데 옆에 10이라고 쓰여있었다. 쪽지함을 열어봤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은영아, 어떻게 된 거야? 폰까지 해지하고? 이 쪽지 보면 연락해 줘"

"누나, 내가 잘 못 했어. 제발 다시 연락해 줘."

"이렇게 나 몰라라 가는 거냐? 나쁘다. 난 어떻게 하라고."

"오늘은 누나네 집에 가봤어. 누나 방은 오늘도 불이 꺼져있네. 내가 아는 정보가 이 아이디 밖에 없네. 어디야? 잘 지내?"

"누나가 그리워서 누나 아이디로 접속해 봤어. 매번 노인네처럼 이런 게임을 하냐고 뭐라 했는데 하다 보니 재밌네. 처음에는 파산지 갔었는데, 다시 기사회생해서 초인까지 올랐어. 같이 있었으면 즐거워했을 텐데.. 보고 싶어. 많이."

"오랜만에 메시지 보내. 누나, 나 졸업했어. 다행히 학점 빨리 채워서 일 년 빨리 끝낼 수 있었어. 그리고 원하던 데에 취업도 했어. 미국에서 일할 것 같아. 누나가 같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누나, 살아는 있는 거지? 보고 싶네. 지금이면 누나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텐데. 조금만 기다려 주지.. 처음엔 미웠는데, 지금은 잘 있는 건가 궁금해. 누나 덕분에 나 더 열심히 살 수 있었으니까."


마지막 메시지가 한 달 전이니, 지금쯤 미국에 왔을지 모르겠다. 이제 비밀번호를 바꿨으니 쌤이 내 아이디로 접속하진 못하겠네. 내 캐시가 더 늘 방법은 없겠다고 생각하니 어이없게도 아쉽단 탄식이 나왔다.


답장을 할까 말까, 연락을 할까 말까 밤새 고민했다. 그런데, 난 연락할 자격이 없었다. 나만 살겠다고 도망쳤으니까. 그렇게 읽었던 메모를 '읽지 않음'으로 바꾸고 계정을 해지했다. 잘 지내겠지? 쌤 어깨에 기대어 보던 밤하늘이 그리웠다. 이제 진짜 안녕.. 서른 살의 봄도 이렇게 끝나는구나. 고마워 쌤, 쌤 덕분에 다시 뛸 수 있었어.


'바보 같지만, 보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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