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그 메세지를 읽은 후 일주일 동안은 계속 생각이 났다. 연락을 해볼까, 말까, 그러다가 딸내미의 생글생글 웃는 모습을 보고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 만나서 좋을게 하나도 없잖아. 그냥 추억으로 남기는 게 쌤에게도 나에게도 나을 거야..'
그렇게 한 달이 지났고, 이젠 좀 무던해졌다. 오늘은 오스틴 한인의 밤 행사 날이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행사인데, 남편은 업무를 위해 꼭 가야 한다며 날 데려갔다. 말이 쉽지 애 데리고 가려면 바리바리 싸들고 가야 하는 게 얼만데, 언제나 그렇듯 참 무심한 사람이다. 그래, 그래도 그 무심하고 목석같은 성격이 나에게 맞기도 했다. 내가 아무리 화를 내도 짜증 내도 항상 일관되게 아무 일 없는 듯 받아 줬으니까.
애 보느라 푸석해진 얼굴에 오랜만에 기초화장을 하다 보니 뭔 기미가 이렇게 많이 생겼는지, 컨실러로 하나하나 지우기도 힘들었다. 고작 3년 전인데, 쌤 만날 때는 그래도 이 정도는 아녔는데, 청춘은 다 끝났다 생각했던 그때가 그리워질 줄이야.
한동안 안 신던 힐을 신으니 발이 부었나 들어갈 생각을 안 한다. 미리 한번 신어볼걸 후회해 보지만 지금 시간에 뭘 사기도 그러니 억지로 끼여 넣어 본다.
그때 쌤을 처음 만난 날처럼 맞지 않는 옷과 신발, 그리고 어색한 화장을 하고 차를 탔다. 그때와 다른 건, 내 옆엔 남편이 있고, 내 뒤엔 딸이 있고, 내 앞에 쌤이 없다는 것.
커다란 강당에 '오스틴 한인의 밤'이란 플래카드가 보이고, 사람들은 저마다 누가 누가 잘났는지 자랑하며 의미 없는 웃음과 치얼스를 나눈다. 재미없다. 유모차에 있는 아이를 보며 언제 우유를 줘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누나? 서은영 맞아?"
"...."
"맞지? 와, 미국으로 왔던 거야? 그래서 찾아도 안 보였던 거구나!"
".... 그래.. 동철아.. 오랜만... 이야.."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냥 도망가고 싶었다. 마치 올이 나간 스타킹을 신고 걷다가 집에 다 와서 발견한 느낌이었다.
조금 떨어져 있던 남편이 처음 보는 남자와 이야기하는 걸 들었는지 이쪽으로 왔다.
"여보, 누구야? 처음 보는 사람인데."
"아, 안녕하세요. 이동철이라고 합니다. 누나가 저 고등학교 때 과외 선생님이었어요. 이런 데에서 만나게 되네요!"
"아, 그래요? 와 진짜 신기하다. 근데 여보가 과외를 했어? 공부 잘했단 얘기 안 했었잖아?"
"어.. 그때는 나도 조금 했어. 나 잠깐 예은이 분유 좀 주고 올게"
어떻게 저런 순발력이 나오는 거지? 난 도저히 연기를 더 이어갈 수 없어서 당황한 표정을 읽히기 전에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아, 어떻게 하지, 이대로 아이가 열난다고 하고 집으로 가자고 할까? 아, 그건 온도계 대보면 바로 알 거야. 어떻게 하지?
수유실을 나오는데, 문 앞에 쌤이 있었다.
"아이가 참 예쁘다. 누나 닮은 것 같아."
"어, 그렇게 됐어. 나 네가 보낸 메시지 봤어. 졸업과 취업 축하해. 결국 넌 해냈구나."
"아, 그거 봤어? 나도 감정이 왔다 갔다 해서, 꼭 내 흑역사를 들킨 것 같아 창피하네. 봤으면 답장이라도 해주지."
"나도 얼마 전에 봤어. 답장 못 해서 미안해."
"근데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뭘 크게 잘못한 거였어? 누가 보면 돈 떼먹고 도망간 줄 알겠어 ㅋㅋ"
가벼운 어조로 웃으며 말했지만, 그 말은 내 가슴에 무겁게 박혔다.
"아니야, 넌 잘못한 거 없어. 내가 피한 거야. 넌 점점 멋있어지는데, 난 그대로여서 언젠가 버림받을 까봐."
"못났네, 내가 그렇게 밖에 안보였어?"
"그러게, 알잖아. 내가 줄 곧 그랬던 거. 아, 근데 너 다른 사람이랑 같이 온 거 아냐? 너도 이제 결혼해야지?"
"나도 몰랐는데, 일하다 보니 아직 해야 할 게 많더라고. 만약에 누나를 계속 만났으면 아마 지금 쯤 결혼을 했을 것 같아. 그런데 결혼하고도 아마 아쉬움이 계속 남았을 것 같아. 결국 결혼하면 할 수 있는 선택이 제한되니까. 그래서 난 결혼 생각이 없어. 누나만큼 내 미래를 포기할 만한 사람이 없기도 하고 ㅋㅋ"
"그러게, 니 속도와 내 속도는 그때도 지금도 다르구나."
"그러네. 결국 누군가 멈춰야 맞출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젠 우린 멈추긴 어려워졌네."
"미안해."
"누나가 왜 미안해. 고마워. 잘 살고 있어 줘서. 혹시나 상상했던 게 있었어.
누나를 다시 만나면,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근데, 이제 안 되겠네."
왠지 모르게 말에서 애절함이 느껴졌다.
"동철아, 괜한 소리 하지 말고 너도 얼른 결혼이나 해. 내가 괜찮은 사람 소개해 줄까?"
"안 할 거라고요, 아까 내 얘기 또 기억 못 하는 거야? 집중을 하라고!"
오랜만에 예전처럼 웃고 있었는데, 남편이 저 멀리서 지켜보는 게 느껴졌다.
"이제 가야겠다. 너 이 동네 사니?"
"아니, 난 동부에 사는데 여기에서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어. 다시 가야지."
"그래, 다시 또 만날 일이 있을까?"
"글쎄, 모르지. 우린 항상 그랬잖아. 우연이 또 닿으면 보겠지. 다음에 봐. 우. 연. 히."
다시 예전 번호로 전화를 해보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에게도 내 번호를 알려주지 않았으니, 결국 우연히 아니면 안 되겠네.
우연은 결국 일어나지 않았고, 그 후 쌤을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미국에서 지하철을 탈 때면 우연히 만났으면 좋겠다란 기대를 하기도 했다. 어쩌면 우리는 같은 목적지로 가지만 서로 다른 지하철을 탔는지도 모르겠다. 열심히 가지만 누가 내리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난 내 젊음이 써보지도 못하고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내 인생의 봄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봄은 계절처럼 힘겨운 겨울을 끝내고 돌아왔고, 소박한 꽃을 피우고 끝났다.
서른 살의 봄은 끝났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봄은 또 오겠지.
시원한 파도 소리와 함께,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와 함께, 향긋한 아카시아 꽃 향기와 함께.
'다시,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