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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enna Nov 10. 2021

1000원의 나비효과

대구행 버스 안 감사한 그분들께.

 아동폭력 같은 흉흉한 뉴스로 아이를 홀로 내보내기도 불안한 요즘이다. 모 아파트에서는 아파트 회장이 놀이터에서 놀던 타 아파트 아이들을 도둑으로 몰아  문제가 되기도 했다. 내 아이 네 아이 할 것 없이 함께 놀던 예전과는 사뭇 달라진 분위기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모든 아이는 삼신할머니가 보살펴 주신다더니 아이도 많이 줄어 귀한 요즘 무얼 하시는지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아이들에게 언제부터 이렇게 각박해졌는지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어릴 적 나는 야무진 구석이라곤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말괄량이였다. 빼빼 마른 몸에 밖으로 쏘다니느라 이마가 반질해지도록 까만 얼굴을 해서 빨간 머리 앤처럼 예쁜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또한 내 아들이 하는 짓을 보고 있자면 나의 어릴 적 모습이 떠올라 혼을 내기도 미안할 정도로 동네에서 소문난 덤벙이기도 했다. 다섯 남매의 장녀임에도 어찌나 산만했던지 지우개를 잃어버리고 엄마에게 돈을 받아 사서는 학교로 돌아가는 길에 또 그 지우개를 잃어버릴 정도였으니 학교 선생님들조차도 나의 미래를 걱정하시곤 했다.


 어느 날 비염이 있어 대구에 있는 병원에 가야 하는데 쌍둥이 막내들을 보살피느라 정신없던 엄마는 40여분 거리의 병원에 혼자 다녀올 수 있겠냐고 하셨다. 자신 있게 다녀오겠다고 했다. 엄마는 작은 가방에 의료보험증과 돈을 넣어 주시고 버스 터미널 바로 옆에 있는 병원이니 조심히 다녀오라고 당부에 당부를 거듭하셨다. 엄마와 몇 번 다녀왔던 터라 걱정 말라고 호기롭게 집을 나섰다. 버스를 타러 가는 길 아는 동생 A가 보였다. 대구에 가는데 같이 가겠냐고 하니 흔쾌히 가겠다고 한다. 딴에는 세 살 많은 언니이니 날 믿고 함께 버스에 올랐을 것이다. 아이들끼리 가는 첫 번째 버스여행, 가만히 앉아 가기만 하면 될 것을 나와 A는 신이 나 자리를 여기로 옮겼다 저기로 옮겼다 밖을 보다 가위바위보를 하다 즐겁게 깔깔거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는데 뭔가 싸한 느낌이 들어 보니 버스 좌석 앞 망에 넣어두었던 가방이 보이질 않는다. 버스 아래부터 뒷자리 앞자리까지 찾아보지만 그 어디에도 작은 가방은 없었다. 대구로 가는 버스 안에서 10살짜리 여자 아이는 왈칵 눈물을 쏟았다. 부산스럽게 왔다 갔다 하던 아이가 갑자기 눈물을 쏟으니 버스 안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아주머니 한분이 무슨 일인지 물어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이리저리 같이 찾아 주셨지만 가방은 보이지 않고 난 절망적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기 시작했다. 아주머니께 사정 얘기를 들은 승객 중 할아버지 한분은 울지 말라며 천 원짜리 한 장을 내 손에 쥐어 주셨다. "아가 울지 마라. 기사 양반, 야들 내리면 차비받지 말고 집으로 보내주소." 기사 아저씨도 그렇게 해주시겠다며 나를 달래신다. 마침내 대구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병원도 못 가고 내리자마자 다시 집으로 향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하다. 그런데 A와 함께 기사 아저씨를 따라나서려는 찰나 버스에 함께 탔던 여스님 한분이 우리를 부르셨다. 그 스님께서는 같이 갔던 동생 A의 어머니와 인연이 있으셨던 모양이다. 내가 하도 요란하게 울어대던 통에 옆에 있던 A를 알아보신 듯하다. 스님께선 가려던 곳을 물어보시더니  우리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셨다. 병원에 사정 이야기를 하니 진료 기록이 있어 의료보험증 없이도 진료를 봐주시겠다고 하신다. 약까지 받아 나온 후 근처 중국집에서 짜장면 한 그릇씩을 시켜 주셨다. 우느라 진을 뺐더니 배가 고팠는지 염치도 없이 단무지까지 추가해가며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스님께선 집으로 가는 차표까지 끊어 주시고는 조심히 가라며 작별 인사를 하셨다. 꾸벅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드리고 차에 올랐다. 긴장이 풀어지며 얼마 지나지 않아 둘 다 곯아떨어져 눈을 뜨니 어느새 내릴 곳이었다. 버스 뒷문이 열리고 생각지도 않게 동생을 업은 엄마가 호랑이 두 마리는 잡을 듯한 얼굴을 하고 나를 맞았다. 스님께서 전화로 미리 언질을 주신 모양이었다. 말도 없이 사라져 놀라게 해 혼나는 A를 뒤로 하고 엄마에게 끌려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 식사 자리, 아버지는 이제 놀라시지도 않고 내 모험담을 들으신다. 가방이 없어진 얘기, 우는 나를 달래준 아주머니, 1000원을 쥐어준 할아버지, 나를 데리고 병원까지 가신 스님 얘기, 그리고 맛있었던 짜장면까지... 아버지는 버스에 탄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하셨다. 아무리 아이라도 모르는 이에게 1000원을 쥐어주는 일은 쉽지 않으며 딸아이를 무사히 집으로 보내주신 스님께 보통 감사한 것이 아니니 잊지 말고 살라고 하셨다. 비록 어린아이지만 그때 그 1000원과 짜장면의 기억은 깊은 고마움으로 남아 어른이 되어서도 그 시절의 감동을 누구에게든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다. 살면서 그때 일이 떠오르면 세상이 얼마나 나에게 따뜻한 곳이었는지 연신 감사하게 된다. 나 또한 크지 않지만 꾸준히 구호단체나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습관이 그때 그 버스 속 일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고 부대끼며 산다. 대구로 가는 버스 안에서 시작된 도움이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되어 나를 거치고 더 큰 긍정의 변화를 일으키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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