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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enna Nov 10. 2021

할아버지의 봄날이 되고 싶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남편과 점심 식사 후 짬이 나 드라이브를 하러 나갔다가 커피 한잔씩을 두고 앉아 사람 구경을 했다. 창밖으로 어려 보이는 학생들이 웃고 있는 모습이 싱그럽다.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요즘은 지나가는 아이들이 어쩜 저렇게 아무 꾸밈없이도 사랑스러울까 보기만 해도 흐뭇한 마음이다.

 

 아이들을 보다 갑자기 남편에게 "그나저나 저 아이들은 학교 안 가고 이 시간에 왜 여기 있는 거지?"라고 궁금해했더니 남편이 얘기하길 "아이들이 아니라 20~30대 들이야. 우리가 나이가 드니 상대적으로 더 어려 보이는 거지."라고 한다. 30대는 아이들 키우느라 다른 연령대의 사람들을 통 만날 기회가 없었다. 20대에서 40대로 바로 넘어온 듯 30대의 나는 육아로 고군분투하며 10여 년간 지구를 떠나 있었던 듯이 단절되어 있었던 것이다. 고개를 돌려 남편을 보니 군데군데 흰머리가 꽤 되고 눈가로 주름도 보인다. 창 밖에 있는 사람들과는 다른 연령대임이 확실하게 느껴진다. 창 너머 저 사람들은 우리를 보며 과연 뭐라고 생각할까?

 

 중학생 때였다. 할아버지 댁은 집 앞으로 길 하나를 두고 김해평야만이 넓게 펼쳐진 곳이었다. 정말 창만 열면 끝도 없는 논과 논이 이어져 있었는데 매일 이런 광경을 보며 평생을 지낸 탓인지 할머니는 갑갑하다며 방에서 지내질 못하시고 항상 나와 거실에서 주무셨다. 밤이 되면 할아버지는 꼭 거실 한편에 앉아 담배를 한 두 개비씩 피우시고 방으로 들어가셨는데 그날은 술 한잔까지 곁들이시곤 창을 열어 밖을 보며 옛이야기를 하셨다.  "예전에 큰 홍수가 난 적이 있었다. 어른들은 물난리에 다들 정신이 없는데 나는 대야를 타고 둥실둥실 손으로 저어 이쪽저쪽을 다녔다. 아버지 친구가 물을 헤치고 와 치동아, 니 아부지 어디 갔노? 하셔서 손가락만 들어 가리키고 다시 대야를 타다 뒤집어졌는데 그기 어찌나 웃기던지 허허허." 별 이야기 아니었지만 난 할아버지에게 대야를 타고 다닌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게 마냥 신기했다. 누워있는 내 앞에서 달빛을 받으며 담배를 피우는 노인과 깔깔대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할머니는 별 시답잖은 소리를 다 한다며 핀잔을 주셨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들은 척 만 척 얘기를 이어나가셨다. " 일제 시절 학교를 다닐 때 학교는 가야 하는데 동생을 봐야 해 기저귀 감으로 동생을 들쳐 없고 학교에 안 갔나. 선생님 말씀을 듣고 써야 하는데 등에서 어찌나 뛰어대는지 허허 공부가 안되는기라. 그 길로 학교 말고 돈을 벌러 갔다..." 슬픈 이야기도 아니고 덤덤히 창밖만 쳐다보며 하시는 얘기인데 괜히 눈물이 흘렀다.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눈물을 닦아내는걸 눈치채셨는지 할머니가 더욱 채근하셨다. "그놈의 담배 때문에 잠을 못 자겠구만. 얼른 들어가 잠이나 자소!" 할아버지는 겸연쩍게 담배를 눌러 끄시곤 천천히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셨다.

 

 태어날 때부터 나에게 할아버지는 할아버지였다. 새벽에 일어나 소여물을 주시고 논을 한 바퀴 둘러보신 뒤 돌아와 아침을 드시는 매일의 일상이 같아 다른 할아버지의 모습은 상상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할아버지를 참으로 사랑했다. 할아버지의 무릎은 내 소파였고 할아버지의 밥상에 숟가락을 얹어 맛있는 것만 쏙쏙 빼먹는 손녀지만 다른 동생들과 달리 할아버지와 기꺼이 겸상하고 싶어 하는 아이였다. 할아버지의 기쁨이자 말동무가 되고 싶었고 자랑스러운 손녀가 되고 싶었다. 할아버지의 봄날은 내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봄은 내가 알지 못하는 저 먼 어디쯤이었을 테다. 어느덧 뒤를 돌아보니 나 또한 벌써 인생의 중반 어느 계절쯤에 서 있다. 할아버지는 나의 따스한 햇살이었고 내 봄을 꽃잎 가득한 평온으로 가득하게 하셨다. 할아버지의 봄날 또한 고단함이 아닌 포근함으로 가득한 채 간직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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