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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enna Dec 28. 2021

줄을 서시오!

 *주의*

 - 비위가 약하거나 식사 중인 분은 글을 패스해 주세요.


 남편은 어지간히도 깔끔을 떤다. 소파에서 과자 먹는 것에 질색을 하고 벽에 이것저것 붙여대는 것도 싫어해 애들이 어렸을 때도 숫자카드, 낱말카드 한번 벽에 붙여보지 못했다. 본인 그루밍에도 진심인지라 외출 준비에 여자인 나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 첩! 첩! 로션을 때리듯 발라 세수하듯 문지르는 나와 달리 피부결을 따라 섬세한 터치로 마무리하고 선크림도 잊지 않는다. 당연히 개인위생에도 철저해 외출 후 손 씻기는 기본이고 수시로 청소기를 돌리는데도 쌓이는 먼지를 이해하지 못해 항상 그 원인을 궁금해한다. 그런 남편이 경악한 것이 바로 아이들의 귀지였다. 


 

아이들 귀를 함부로 만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귀지를 청소할 생각을 못했었다. 둘째 임신 중 중이염으로 고생한 후 귀를 만지는 일에 더욱 신중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비인후과에 갔다가 의사 선생님이 핀셋으로 툭툭 뽑아내는 귀지에 놀라 아이들 귀를 살펴보기로 했다. 미니 라이트, 핀셋, 쇠로 된 귀이개에 소독 거즈까지 준비하고 들여다보니 제법 단단하게 뭉쳐진 귀지가 보였다. 핀셋으로 조심조심 꺼내니 아이들도, 나도 놀라 소리를 질렀다. 하나하나 꺼낼 때마다 보물이라도 찾은 듯 "어디 보자!" 딸이랑 아들까지 이서 난리가 난다. 이 놈들, 귀지가 이렇게 많아 그렇게 말을 안 들었나 보다. 남편은 세상에 애들 귓속이 그게 뭐냐며 이게 다 집안 먼지 때문이라고 나를 세상에 둘도 없는 계모라도 되는 냥 나무란다. 키우는 것도 죄다 내가 하고, 욕도 내가 먹는 이 편파적인 세상 같으니라고.


 아이들은 처음엔 귀지의 크기에 환호하더니 곧 엄마의 푹신한 다리 누워 슬슬 눈을 감는다. 머리를 살살 넘겨 간질간질 귀를 긁어주니 시원하기도 할 테고 쿠션 좋은 다리가 포근하기도 할 것이다. 딸아이는 끝났으니 일어나라는 말에도 조금만 더 있겠다고 다리 위에 귀를 대며 떠나지 않는다. 엄마 다리 쥐 나는 줄도 모르고. 


 옆에서 구경하던 남편은 자기 귀도 한번 봐달라며 틈을 봐 누웠다. 하지만 매일 샤워한 뒤 면봉으로 닦아대는 귀에 귓밥이 있을 리가. "없어. 다음 차례 와서 누워." 남편은 누운 지 5초도 되지 않아 차례를 빼앗기니 잘 보라며 없으면 긁어주기만 하란다. 하지만 파는 사람 입장에서 깨끗한 귀가 무슨 재미, 빈 귓구멍을 긁고 있자니 지루하다. "진짜 없어. 다음" 나를 계모 취급했으니 얄미운 마음에 마지막 순서인 아들을 얼른 눕혔다.


 한 달여 뒤 남편은 귀가 간지럽다며 한번 봐달라 했다. 다리를 베고 눕고 싶어서인지 알지만 일단 도구를 챙겨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아니 그런데 이 무슨 일인가! '심봤다!~~' 귀지를 파내는 내 손이 분주해지고 나는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거 완전 노다지 구만." 신이 난 내 말에 남편은 "내가 일부러 한 달 동안 안 파고 기다렸지." 라며 뿌듯해한다. 깔끔을 그리 떨면서 한 달 동안 면봉에 손을 대지 않고 참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남편은 연신 시원하다며 손에 휴지를 대고 귀지를 받고 있다. 아이들 제치고 푹신한 다리에 한번 누워 보겠다고 한 노력이 가상해 깨끗하게 청소해 주었다.




 요즘엔 한 달까지 견디지 못하지만 남편은 종종 귀를 파달라며 눕는다. 나는 그냥 면봉을 쓰라고 구시렁대면서도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나누며 귀 파기에 몰두한다. 남편과 아이 둘, 셋이서 어쩌면 귓구멍까지 이리 닮았는지 참 신기하다. 아이들은 소파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어서 자기 차례가 오길 기다린다. 참... 이게 뭐라고 내가 대단한 기술자라도 된 기분이다. 귀 파는 로봇이 나오기 전에 내가 갑이 될 수 있는 이 시간을 즐겨야겠다.


                                                 Seize the digging mo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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