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어지간히도 깔끔을 떤다. 소파에서 과자 먹는 것에 질색을 하고벽에 이것저것 붙여대는 것도 싫어해 애들이 어렸을 때도 숫자카드, 낱말카드 한번 벽에 붙여보지 못했다. 본인 그루밍에도 진심인지라 외출 준비에 여자인 나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 첩! 첩! 로션을 때리듯 발라 세수하듯 문지르는 나와 달리 피부결을 따라 섬세한 터치로 마무리하고 선크림도 잊지 않는다. 당연히 개인위생에도철저해 외출 후 손 씻기는 기본이고 수시로 청소기를 돌리는데도 쌓이는 먼지를 이해하지 못해 항상 그 원인을 궁금해한다. 그런 남편이 경악한 것이 바로 아이들의 귀지였다.
아이들 귀를 함부로 만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귀지를 청소할 생각을 못했었다. 둘째 임신 중 중이염으로 고생한 후 귀를 만지는 일에 더욱 신중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비인후과에 갔다가 의사 선생님이 핀셋으로 툭툭 뽑아내는 귀지에 놀라 아이들 귀를 살펴보기로 했다. 미니 라이트, 핀셋, 쇠로 된 귀이개에 소독 거즈까지 준비하고 들여다보니 제법 단단하게 뭉쳐진 귀지가 보였다. 핀셋으로 조심조심 꺼내니 아이들도, 나도 놀라 소리를 질렀다. 하나하나 꺼낼 때마다 보물이라도 찾은 듯 "어디 보자!" 딸이랑 아들까지 셋이서 난리가 난다. 이 놈들, 귀지가 이렇게 많아 그렇게 말을 안 들었나 보다.남편은 세상에 애들 귓속이 그게 뭐냐며 이게 다 집안 먼지 때문이라고 나를 세상에 둘도 없는 계모라도 되는 냥 나무란다. 키우는 것도 죄다 내가 하고, 욕도 내가 먹는 이 편파적인 세상 같으니라고.
아이들은처음엔귀지의 크기에 환호하더니 곧엄마의 푹신한 다리에 누워슬슬 눈을 감는다. 머리를 살살 넘겨간질간질 귀를 긁어주니 시원하기도 할 테고 쿠션 좋은 다리가 포근하기도 할 것이다. 딸아이는 끝났으니 일어나라는 말에도 조금만 더 있겠다고다리위에 귀를 대며 떠나지 않는다. 엄마 다리 쥐 나는 줄도 모르고.
옆에서 구경하던 남편은 자기 귀도 한번 봐달라며 틈을 봐 누웠다. 하지만 매일 샤워한 뒤 면봉으로 닦아대는 귀에 귓밥이 있을 리가. "없어. 다음 차례 와서 누워." 남편은 누운 지 5초도 되지 않아 차례를 빼앗기니 잘 보라며 없으면 긁어주기만 하란다. 하지만 파는 사람 입장에서 깨끗한 귀가 무슨 재미, 빈 귓구멍을 긁고 있자니 지루하다. "진짜 없어. 다음" 나를 계모 취급했으니 얄미운 마음에 마지막 순서인 아들을 얼른 눕혔다.
한 달여 뒤 남편은 귀가 간지럽다며 한번 봐달라 했다. 다리를 베고 눕고 싶어서인지 알지만 일단 도구를 챙겨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아니 그런데 이 무슨 일인가! '심봤다!~~' 귀지를 파내는 내 손이 분주해지고 나는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거 완전 노다지 구만." 신이 난 내 말에 남편은 "내가 일부러 한 달 동안 안 파고 기다렸지." 라며 뿌듯해한다. 깔끔을 그리 떨면서 한 달 동안 면봉에 손을 대지 않고 참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남편은 연신 시원하다며 손에 휴지를 대고 귀지를 받고 있다. 아이들 제치고 푹신한 다리에 한번 누워 보겠다고 한 노력이 가상해 깨끗하게 청소해 주었다.
요즘엔 한 달까지 견디지 못하지만 남편은 종종 귀를 파달라며 눕는다. 나는 그냥 면봉을 쓰라고 구시렁대면서도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나누며 귀 파기에 몰두한다. 남편과 아이 둘, 셋이서 어쩌면 귓구멍까지 이리 닮았는지 참 신기하다. 아이들은 소파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어서 자기 차례가 오길 기다린다. 참... 이게 뭐라고 내가 대단한 기술자라도 된 기분이다. 귀 파는 로봇이 나오기 전에 내가 갑이 될 수 있는 이 시간을 즐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