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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펜을 든 달타냥 Oct 30. 2022

[펜싱은 처음이라] 7. 피스트 위의 인어공주

누구나 올챙이적 시절이 있다. 어쩌면 지금도 뒷다리가 조금 나온 정도의 올챙이 인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아주 갓 태어난 올챙이에 불과했던 펜싱 입문 3주차의 어느 날, “상원 씨도 시합 한 번 뛰어봐요. 그래야 감도 오지.” 시합을 한 번 뛰어봐야 ‘감’이 온다는 스승님과 주변 동료들의 권유로 첫 시합을 뛰었다. 그리고 그날 나는 내 정체가 올챙이가 아니라 ‘인어공주’라는 걸 알게 됐다.

 

첫 시합의 기억은 구체적이지 않다. 첫 플래시의 영광처럼 인스타그램에 기록되지도 않았다. 업로드 할 가치도 없었던 셈이다. 오직 ‘힘들다’는 감각만 몸에 각인됐다. 3분이라던 시합 시간은 ‘문자 그대로’ 3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3분 사이에 5점을 먼저 내면 끝나는 시합이지만, 나는 1점도 내기가 쉽지 않았다. 상대도 쉽게 5점을 내지 않았다. 상대가 누구였는지도 기억이 불분명하다. 아마도 학을 닮은 S이거나 검독수리를 닮은 D 또는 터줏대감 I, 셋 중 하나였을 것이고, 셋 중 누구였더라도 쉽게 점수를 내지 않은 건 마찬가지 였을거다.


호랑이는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지만, 피스트 위에서 호랑이가 점수를 쉽게 내지 않는 건 일종의 배려이자 관행이다. 토끼 회원의 사기를 꺾지 않겠다는 배려이면서, 최대한 긴 시합을 뛰게 해 펜싱의 ‘참맛’을 조금이나마 느끼게 한다는 관행 말이다. 그 덕에 3분이라던 시합시간이 체감으론 3시간처럼도 느껴지는데, 실제로도 3분 이상 시합이 진행되곤 한다. 득점 여부와 상관없이 심판기가 반응을 하면 타이머도 멈추기 때문이다.      


2012년 런던 올림픽 여자 에페 준결승전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알테다. ‘잃어버린 1초’가 가능했던 이유도 그 때문(치곤 너무 시간이 멈춰있었지만)이다. 심판의 시합 재개 구호가 떨어지면 타이머도 다시 작동하는데, 그 잠시 잠깐 작동하지 않는 타이머가 얼마나 야속한지는 ‘잃어버린 1초’를 기억하는 사람은 익히 알거다. 아, 물론 내 경우는 순전히 힘들어서 이지만.


첫 시합이 끝났을 때 나는 제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었다. 평발인 탓이 있겠지만, 발바닥이 너무너무 아팠다. 바닥을 딛고 있는 것이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14미터 피스트를 앞으로 뒤로 쉬지 않고 움직이려면 하체 근력 못지않게 발바닥이 튼튼해야 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3주차의 어색함이 남아 있던 그곳에서 체면 차릴 여유도 없이 나는 ‘털썩’ 주저앉았다. 두 다리는 인어공주의 지느러미처럼 가지런히 모아 옆으로 누이듯 한 채 였다. 타는 듯 고통스러운 발바닥을 지면에서 떼어 놓겠다는 의도였는데, “인어공주야, 뭐야”하는 우스개가 터져 나왔다. 내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인어공주는 한동안 출현을 계속했고, 내 별명이 되고 말았다. 초기 6개월 동안 시합을 뛰는 날이면 빼먹지 않고 등장했다.   

  

지금에서야 돌이켜 생각해보면 인어공주라는 별명은 내게 안성맞춤이었다. 인어공주는 새로운 세계에 호기심이 큰 존재였다. 그 호기심으로 엿보던 인간 세계에서 사랑을 찾았고, 인간이 되길 꿈꾸지 않았던가. 펜싱이란 새로운 세계에 호기심을 안고 입문한 나도 아직은 두 다리로 단단히 피스트를 딛고 서기에 이른 인어공주였던 셈이다. 인어공주가 인간이 되길 꿈꿨다면 나는 어엿한 펜싱인이 되길 꿈꿨고, 펜싱인이 되기 전까지 나는 인어공주에 머물러야 했다.


인어공주에서 펜싱인이 되기까지는 여러 관문이 기다린다. 기본을 배우고, 시합을 하며 펜싱의 맛을 알아가는 것도 관문 중 하나다. 초보 펜서의 시합은 여러모로 힘이 더 든다. 체력도 체력이지만, 규칙을 잘 모르는 것도 한 몫 한다. 같은 거리라도 목적지를 모르고 나선 길이 더 멀게 느껴지는 것과 같고, 인간 세상을 모르는 인어공주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특히 플뢰레는 프리오리테(priorité, 우선권) 규칙이 있다. 공격 의사를 먼저 보인 선수에게 공격 우선권을 주는 규칙이다. 동시 타격이 이뤄질 경우 점수는 우선권이 있는 선수에게만 주어진다. 우선권이라는 게 간단한 듯 하면서도 구분이 쉽지 않다. 초보 펜서에겐 더 그렇다. 내게 우선권이 있는지, 상대에게 있는지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우물쭈물, 망설이다 보면 어느새 우선권은 넘어가버린다.   

 

딱 이순신 장군 말씀대로다. 필사즉생, 필생즉사. 우선권을 가졌다는 확신이 든다면 죽을 각오로 공격에 나서야 종국에는 살 수 있다. 우물쭈물, 요행스러운 생을 탐하다간 우선권은 넘어가고, 결국은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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