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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펜을 든 달타냥 Oct 30. 2022

[펜싱은 처음이라] 6. 패잔병의 화살같은,

“상원 씨는, 진짜 플래시는!” 진담인지, 반농반진(半弄半眞)의 칭찬인지 알 수 없지만, 스승님이 여러 번 감탄해준 기술이 있다. 플래시(fléche). 불어로 화살이다. “할 수 있다”로 유명한 박상영 선수의 전매특허 기술이기도 하다. 지난 도쿄 올림픽 남자 에페 단체전 동메달 결정전 마지막 라운드에서 박상영 선수가 따낸 11점 중 9점이 플래시에 의한 것이다. 그의 플래시는 정말, 화살 같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플래시는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단숨에 뻗어나가는 공격이다. 단숨에 뻗어나가야 하는 플래시는 뒷다리가 달려 나온다. 팡트와는 동작이 다르고 느낌도 다르다. 팡트는 앙가르드 자세에서 앞발을 뻗어나가는 동작을 의미하지 뒷다리가 달려 나와 교차되는 동작이 아니다. 펜싱의 기본은 앙가르드 자세에서 나아가고 물러설 때 다리가 교차되지 않는다. 심지어 사브르에선 두 다리가 교차되면 반칙이다. 

 

다리가 교차되지 않는 상태에서 앞발만 길게 뻗는 팡트는 학처럼 우아함도 엿보이지만, 플래시는 쏜살같은 매여야 한다. 뒷다리가 달려 나오는 동작이, 화살이 시위를 떠나는 동작인 셈이다. 몸 전체가 화살이고 칼끝이 화살촉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편하다. 칼 든 팔을 쭉 뻗으면서, 뒷다리가 박차고 나가면서 상대를 공격한다. 팡트보다 공격 타이밍이 적어도 반템포는 빠르고 속도도 빠르다. 시위를 놓는 타이밍만 잘 잡으면 상대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다만 시위를 떠난 화살이 되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일격필살의 느낌이 크다. 팡트와 달리 후속 동작을 하기가 쉽지 않다. 공격이 실패하면 등을 그대로 노출해서 역공당하거나, 상대와 너무 밀착하게 되면서 다음 동작이 어렵다. 공격을 망설여서 애매한 동작이 되면, 어중간하게 시위를 놔 맥없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화살 꼴이 되기 쉽다. 장점도 단점도 확실한 셈이다. 그런 플래시가 내 펭귄 펜싱의 또 다른 무기다. 반템포 빠른 공격 동작이니 엇박자 랩과도 일맥상통하는 게 있다.  


시합 중 처음 플래시를 성공시킬 때가 기억에 선···하다는 건 거짓말이고, 촬영한 영상이 내 인스타그램에 남아있다. 2017년 11월의 어느 날이었다. 펜싱을 시작하고 5개월차에 접어들던 무렵이다. 스승님과 동료들의 권유로 연습 시합에 발을 들인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우리 클럽 터주대감이자 에이스인 I와 시합을 하던 중이었다. 5점을 내야 하는 경기에서 그는 힘들이지 않으며 내게서 4점을 가져갔고, 나는 I의 ‘배려 속에’ 힘들여 4점을 빼앗았다. 마지막 1점을 남겨두고 그는 먹이를 눈앞에 둔 사자처럼 서서히 나를 코너로 몰아갔다.        

나는 체력적으로 지친 상태였다. “파이팅, 파이팅, 포기하면 안 돼.” 팡트가 학을 닮은 S가 지쳐있는 펭귄을 응원하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그 순간 마치 다 잡아놓은 먹이와 잠깐의 유희를 즐기고 싶은 사자가 장난을 던지는 것처럼, 툭. I가 짧게 팡트를 쏘는 시늉을 했다. 팡트를 피해 한 발 뒤로 물러난 나는 I가 칼을 거둬들이는 동작과 함께 ‘에라 모르겠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활시위를 당겼다.     


슝! 보다는 ‘슈우웅’의 느낌이랄까. 화살 보다는 펭귄의 뒤뚱임을 연상케 하는 플래시가 방심한 I의 가슴에 가서 꽂혔다. “오오오!” 비명에 가까운 스승님의 감탄과 박수가 터졌다. 고백하자면 펜싱을 시작한 후 가장 흡족한 기분이 들었던 때가 이때다. 아니, 인스타그램에도 “행복했음”이라고 써놓은 걸 보면 흡족했다는 표현으론 부족한 만족감이었다. 내가 우리 클럽에서 플래시를 가장 ‘많이’(‘잘’이 아니다) 쓰는 펜서가 된 것도 그날 이후다.     

▲ 생애 첫 플래시를 성공시킨 이날, 나는 행복했다.                                                                       

꽤 긴 시간 동안 내 플래시는 최초의 그것처럼 ‘에라 모르겠다’의 행동형이었다. 아들의 머리 위에 올려놓은 사과를 정확히 관통시킨 빌헬름 텔의 화살처럼 목표가 분명한 화살이 아니라, 달아나는 패잔병이 뒷걸음질과 함께 놓쳐버린 활시위에서 떠난 화살 같은 거였다. 패잔병의 화살이었지만, 어이없게 충무공을 맞혀버린 일본군의 오발탄 같은 효과를 내곤 했다.     


하지만 패잔병의 화살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순 없다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 그래서 스승님은 내 활을 패잔병의 것으로 그저 두고 보지 않았다. 여유가 있을 때 마다 스승님은 활시위를 조였다가 늘리기를 반복하고, 시위를 놓는 자세와 방법도 다듬었다. 그 덕에 ‘에라 모르겠다’던 패잔병의 화살은 ‘요건 몰랐지?’하고 놀래주는 매복병 정도로 진화했다. 잘만 사용하면 승패에 결정적 효과를 낼 수 있게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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