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자세를 배우고, 나아가는 법과 물러나는 법을 배우고 나면 절반은 배운 셈이다. 정말 ‘시작이 반’이다. 여기에 기본적인 공격과 방어 동작까지 배우고 나면 앙가르드에서 나아가고 물러나면서 공격과 방어 기술을 응용, 반복하는 게 펜싱이다. 기본을 응용하고 반복하는 건 비단 펜싱만의 특별한 특징은 아니다. 삶 자체가 기본을 응용하는 변주의 연속으로 채워진다.
걷고, 뛰는 것조차도 그전에 ‘좀 기어본’ 기본기에서 비롯된다. 같은 쪽 팔 다리가 함께 나가려다간 여지없이 무게 중심이 무너져 한쪽으로 꼬꾸라진다. 우리는 그렇게 왼팔-오른다리, 오른팔-왼다리로 교차되는 김을 통해서 오묘한 몸의 균형감을 익힌다. 그리고 나서야 기우뚱거리며 서고, 걸으며 비로소 뛸 수 있게 된다. 기어보지 않고는 뛸 수 없는 것처럼 기본을 익히는 일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숙제 같은 것이다.
인간에게만 주어진 것도 아니다. AI도 충실한 기본기 학습 없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세돌 9단과 다섯 번 바둑을 둬 네 번을 이긴 알파고는 단 번에 세계 최고 수준의 바둑 인공지능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다. 알파고 이전에 수많은 인공지능이 기본을 쌓으며 사멸했고, 그 무덤 위에서 우주 최강의 인공지능 알파고가 탄생했다. 알파고도 그 다음에 출연할 인공지능에게 ‘기본’을 제공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인공지능에게 조차 공평하게 주어지는 기본이라는 숙제는 유독 우리나라에서 자주 터부시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한국인에겐 은연중에 내재된 ‘빨리빨리’ 문화 탓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뭐든 빠르게 하려면 기본은 건너뛰어야 한다. 기본만큼 익히는데 시간이 오래 필요한 것도 없으니 말이다. 5년째 펜싱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기본은 어렵다고 생각할 정도다. 그래서일까. ‘~하는 법’ 같은 기본을 건너뛸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하는 인터넷 게시물이 넘치고, 기업은 기본을 갖추는 걸 비용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기본을 갖추는 데 인색하다. 왼팔과 왼다리가 같이 나가는 ‘김’처럼 그 종착지는 ‘붕괴’일 수밖에 없다. 이런 표현이 은유에만 머물진 않는다는 걸 우리는 안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내 안 저 깊숙한 곳에서 스스로를 향한 힐난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 같다. ‘그렇게 중요하다면서 너는 왜 그러냐?’ 하는 힐난이다. 그렇다. 말은 쉽지만 기본을 되새기고 반복하며 익히는 일 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 그러니 그것을 건너뛰고자 하는 욕구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일 테다.
더구나 나처럼 매일 8~12시간은 새하얗게 빈 여백을 명징한 사실과 주장, 근거들로 직조해 채워야 하는 일을 반복하는 사람은, 모조리 건너뛰고 눈 한번 질끈 감았다가 떴을 때 완벽한 생산품이 나타나길 욕망하는 일이 잦다. 노동의 결과물이 꽤 많은 경우에 조롱과 비난의 대상이 될 땐 명징한 사실과 주장, 근거 따윈 개나 줘버리고 싶어진다. 오히려 정말 기본은 개나 줘버리고 어느 한 쪽이 듣고, 읽고 싶어 하는 ‘주장’으로 채운 글이나 말이 더 소구력을 갖는 현실을 보면 기본을 다진들 무슨 소용인가 싶어지는 거다. 어쩌면 그 결과가 지금의 엉망진창 언론 환경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매주 화, 목, 금, 엉망진창의 세상에서 나만의 ‘스몰 월드’로 안내하는 멜로디와 함께 펜싱클럽에 들어서면, 한 시간은 온전히 내 몸에 집중하게 된다. 14미터가 140미터가 되고, 온 세상으로 거듭나면서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고통을 자각하는 순간, 스스로의 육체성을 확인하는 그 순간. 고통은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그 사실이 헛된 욕망과 욕구를 털어내고, 다시 기본으로 나를 밀어낸다. 흰 여백 가장 상단에서 깜빡이는 커서를 가장 아래로 내려 보내는 일은 결국 기본부터 차근차근 밀고 가는 수밖에 없다는 진리가 칼 끝 위에서 춤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