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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펜을 든 달타냥 Apr 17. 2022

[펜싱은 처음이라] 3. 경계

모든 운동이 그렇지만, 가장 먼저 배우는 건 기본자세다. 펜싱은 세부적으로 3개 종목으로 다시 나뉘지만 기본자세는 모두 동일하다. ‘앙가르드(en garde)’. 프랑스어로 ‘경계하다’는 의미다. 서로 검을 들고 겨루는 운동에 걸맞은 의미구나 싶다. 실제로 자세를 취하고 보면 왜 ‘경계하다’는 의미인지 단번에 이해가 된다. 상대방을 바라보고 언제든 공격을 할 수도, 물러날 수도 있는 자세이기 때문이다. 나아감과 물러남의 경계(境界)에 서서 상대를 경계(警戒)하는 자세인 셈이다.     


처음보면 자세는 간단해 보인다. 어깨 너비 정도로 다리를 벌리고 고개만 옆으로 돌려서 상대방을 바라본다. 그 상태에서 가볍게 무릎을 굽혀 기마자세를 취한다. 발은 전방의 발과 후방의 발이 직각이 되도록 하는 게 좋다. 전방의 발끝은 상대방을 향하고, 후방의 발끝은 몸통이 향하는 쪽을 함께 향한다. 전방을 향한 팔은 100도에 조금 못 미칠 정도로 굽혀든다. 겨드랑이 사이에 달걀이나 테니스공을 끼운 것처럼 띄워준다. 칼을 쥐면, 칼끝이 상대방 상체의 전방 가슴을 향하도록 한다. 뒷팔도 역할이 있다. 후방을 향하도록 가볍게 들어주면 되는데, 공격할 때 뒤로 확 펼치며 추진력을 더하고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기본자세라고 해서 처음에 잠깐 취하는 동작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펜싱은 사실 앙가르드에서 시작해서 앙가르드로 끝나는 운동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바꿔말하면, ‘경계’에서 시작해 ‘경계’로 끝난다는 의미다. 칼을 든 사람의 숙명이 그러하다는 건 일찍이 충무공께서 익히 당부한 일이 아닌가 싶다. 갑옷을 대신해 흰 도복을 입고 투구를 대신해 마스크를 쓰면, 달 밝은 밤 한산섬 수루에 홀로 앉아서도 긴 칼을 옆에 차고 ‘경계’를 시름하던 충무공처럼, 은빛으로 반짝이는 길 위에 ‘붉게 새겨진 경계(境界, 시합 시작선)’에 서서 반대편 경계에서  날아드는 검을 받을 준비를 해야 한다.     


그 붉은 경계에서 ‘마르셰’하며 상대를 몰아붙이고, ‘롱프르’하면서 물러나기도 해야 한다. 마르셰(marche)는 프랑스어로 ‘행진, 전진’이다. 펜싱에선 앞으로 나아가는 동작을 말한다. 앙가르드 자세를 유지하면서 전방으로 한 발씩 나아가는 걸 의미한다. 반대로 뒤로 물러나는 동작은 롱프르(rompre)라고 하는데, 마찬가지로 앙가르드 자세를 유지하며 한발씩 뒤로 물러나는 걸 말한다. 마르셰와 반대로 뒷발이 먼저 물러나면 곧바로 앞발이 뒤쫓아 빠져야 한다. 펜싱을 처음 시작하면 이 동작을 반복하며 몸에 익힌다. 클럽 스승님이 “마르셰”하고 외치면, 아기가 걸음마를 떼듯이 한발 앞으로 나가고, “롱프르”하면 뒤로 한발 물러나길 반복하는 거다.     


스승님의 “마르셰”와 “롱프르” 구령 사이 간격이 길어질수록 운동량은 늘어난다. 손오공이 최강의 적과 일전을 앞두고 들어갔다던 ‘정신과 시간의 방’이 실존한다면 그 사이 간격 어디쯤에 있을거다. 앙가르드 자세를 유지하며 스승님의 구호를 기다리는 그 순간 말이다. 물론 굽힌 무릎을 펴면 육체는 편안해지지만 정신적으론 패배감에 젖어들 수밖에 없다. 기껏 이정도도 견디지 못하다니 하는 자괴감 같은 거다.     


펜싱을 시작한 첫 주에 나는 자괴감과 육체적 고통을 오가는 시간을 보냈다. 고작 갓난아기 걸음마 수준에 그쳤지만, 허벅지는 터질 듯 괴로웠다. 첫 주 마지막 운동을 마친 날 스승님은 웃으며 “계단 못 내려가는 거 아니에요?”라고 했는데, 실제로 계단을 내려가는 게 쉽지 않았다. 자세만 제대로 잡으면 허벅지에 알이 배는 건 일도 아니다. 당연히 하체 근력은 자동적으로 길러진다. 펜싱을 시작한 후 허벅지 때문에 바지 사이즈를 한 치수 높여야 하는 경우도 있는 걸 보면, 모르긴 해도 허벅지 둘레가 4~5cm는 늘었다.      


갓난아기도 언제까지 어정쩡하고 뒤뚱거리는 걸음을 걷진 않는다. 마르셰와 롱프르 사이 간격도 이제 여유가 생기고, 그 간격에 서서 가벼운 농담 정도는 할 수 있을 정도가 되면, 걸음마에도 속도가 붙는다. 이쯤되면 언제 널어질까 아슬아슬한 네 살배기 뜀박질쯤은 된다. 아이가 뛰기 시작하면 온 세상이 운동장이 된 듯 즐겁지만, 내 경우는 좀 달랐다.     


펜싱 겨루기가 이뤄지는 경기장을 피스트(piste)라고 하는데, 길이가 14미터다. 고작 14미터가 마르셰와 롱프르로 빠르게 한 번 오가고 나면 140미터처럼, 온 세상처럼 느껴지는거다. 갓난아기 걸음마 시절엔 겨우 알이 밴 듯한 통증이었다면, 피스트가 온 세상처럼 느껴진 후부터는 경험해본 적 없는 통증이 허벅지를 찾아온다. 시큼하기도 하고, 우지끈하기도 하고, 얼얼하다가도, 웅웅 울어대기도 한다. 약 한 달 정도 이 경험을 반복하는데, 펜싱의 문을 여는 통과의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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