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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펜을 든 달타냥 Mar 05. 2022

[펜싱은 처음이라] 1. 스몰 월드로,

나나나 나나 나나 나나나~♬     


커다란 유리문을 열자,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친구야,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어린 시절 가사를 바꿔 부르던 그 노래다. 원곡 제목은 잇츠 어 스몰 월드(It’s a samll world). 나에게 펜싱이라는 세계를 알게 해준 작은 세상, 펜싱클럽으로 안내하는 노래 제목으로 안성맞춤이다 싶다.       


나를 ‘스몰 월드’로 안내하던 노랫소리는 문이 닫히면서 함께 사라졌다. 동시에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경고음과 선수들의 발 구르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꽤나 시끄럽던 경고음은 양 선수의 시합 준비가 완전히 갖춰지지 않았을 때 심판기에서 나는 소리라는 걸 알게 된 건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다.     


시합 순서를 기다리던 흰 도복의 낯선 남녀노소의 눈길이 나에게 향했다. 설레던 가슴엔 조금의 긴장이 찾아왔다. “전화주셨던 분이세요?” 키가 훌쩍 큰 여성이 다가오며 말을 건넸다. 클럽의 대표, 지금의 내 펜싱 스승님이다. “네”, “이리로 오세요. 계속하고 계세요~” 시크한 이끔을 따라 상담실로 들어섰다.      


“펜싱은 좀 아시나요?” 어렴풋하게 기억에 남은 스승님의 첫 질문이다. 세 개 종목으로 나뉜다는 정도를 안다. 정확하게 세 개 종목을 구분하진 못한다고 답했던 기억도 아스라이 남아 있다. 대략적인 설명이 이어졌고, 이곳은 플뢰레를 중심으로 하는 클럽이라고 스승님은 말했다. 내가 전공할 종목이 플뢰레로 정해지는 순간이다. 웬만큼 규모가 커서 세 종목 모두 지도자를 둘 수 있는 클럽이 아닌 이상 지도자의 주 종목에 따라 동호인의 종목도 정해진다.


물론 종목이 세 개로 나뉜다고 해도 기본은 같아서 지도자 자격이 있는 이는 누구나 모든 종목을 가르칠 순 있다. 과거엔 모든 선수가 세 개 종목 모두 할 줄 알아야 했다고도 한다. 올림픽에서 세 개 종목 모두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가 있을 정도다. 물론 20세기 초반의 일이다. 분업하고 개인을 파편화하는 것을 미덕으로 아는 자본주의가 고도화된 탓인지 스포츠도 이젠 다재다능을 미덕으로 하진 않는다. 6차 교육과정 이후 세대인 나에겐 ‘한 가지만 잘해도 대학 간다’는 말로 익숙한 초전문화의 시대가 요즘이 아닌가. 굳이 세 개 종목을 다 배울 필요도, 다 가르칠 필요도 없는 셈이다.


“궁금한 게 있으세요?” 대략적인 설명이 끝나고 다시 스승님이 물어왔다. 딱히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클럽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해소됐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테다. 시끄럽고 낯선 환경에서도 낯선 누군가가 눈에 들었다, 그는 내가 펜싱을 해보기로 마음먹은 뒤 가진 한 가지 궁금증에 대한 해답이었다. 그는 안경을 쓰고 있었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부터 안경을 써왔다. 안경과 함께 한 시간이 20년을 넘어선다. 안경을 써본 적 없는 사람에겐 그저 실소를 자아내는 에피소드에 불과한, ‘안경 쓴 채 세수하기’를 이미 여러 번 경험한, 일체화된 ‘안경인’이다. 안경을 쓰는 사람은 알겠지만, 안경 쓴 이는 어떤 운동이든 참 다양한 장애물을 넘어서야 한다. 축구를 하다가 깨먹은 안경 하나쯤 있는 안경인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거다. 달리기 같은 간단한 운동에서조차 안경은 거추장스럽다. 위아래로 춤을 추거나 땀방울이 안경알에 떨어지면 시야를 가리는 것도 부지기수다. 날이 조금만 추워지면 몸이 뿜어내는 열기가 안경알 가득 김을 서리게 하는 경험은 운동하는 안경인 에피소드의 화룡점정이다.


대한민국 남자 아이라면 누구나 해본다는 태권도 뿐 아니라 복싱 같은 격투 운동에 관심을 가졌지만 안경 때문에 일찌감치 마음을 접은 기억도 있다. 펜싱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했을 때도 ‘안경인’도 할 수 있을까하는 우려가 동시에 들었다. 그러니 그 시끄럽고 낯선 환경에서 발견한 또 다른 ‘안경인’은 일종의 선구자 같은 존재였다. 높은 벽 하나를 넘어선 기분이 들었다. “궁금한 건 특별히 없습니다.”


그렇게, 펜싱 인생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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