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인도 펜싱 할 수 있는 곳이 있나?"
펜싱을 하고 있다는 말을 꺼내면 열이면 열, 같은 물음을 던진다. 별로 이상할 게 없는 반응이다. 처음 펜싱을 시작할 때 나도 똑같은 생각을 했다. 오히려 식상하다면 식상할 반응이지만, 그런 반응이 싫지는 않다. 남들이 접하지 못한 이색적인 취미, 낯선 운동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들곤 하니까. 처음 펜싱을 해보기로 했을 때 그런 특별함도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니다.
성급한 일반화일지도 모르지만, 검에 대한 로망은 80년대에 난 남자 아이에겐 전형성을 갖고 새겨진다. 남자는 파란색, 여자는 분홍색, 남자는 자동차, 여자는 인형 같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가르는 가르침은 놀이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남자는 칼싸움, 여자는 고무줄놀이 따위로. 고무줄놀이를 하는 여자 아이 중 하나가 좋았던 나는 틈틈이 그녀와 함께 고무줄을 넘기도 했고, 끊어먹기도 했지만, 칼싸움이야 말로 놀이의 으뜸이었다. 어쩌면 그때부터 내 안에선 검과 검으로 하는 무엇에 대한 흠모가 자랐을지 모른다.
▶대구에 등록된 동호인 펜서는 32명, 인구 250만명을 기준으로 보면 0.001%. 이정도면 '특별함'을 넘어 희귀하다. 그렇다고 해도 펜싱이라니? 도쿄올림픽에서 우리 펜싱 국가대표들이 좋은 성과를 거두면서 펜싱에 대한 관심도가 조금은 높아졌다. 남자 사브르 국가대표들을 일컬어 ‘F4’라 칭할 정도로 출중한 외모까지 갖추자, 매스컴이 앞 다퉈 펜싱(정확하게는 잘생긴 선수들)을 조명한 덕분이지만, 펜싱은 결코 대중적이진 않은 스포츠다.
대한체육회가 운영하는 동호인 선수 등록시스템을 보면 2020년 펜싱 동호인 선수는 670명이다. 검도, 골프, 궁도, 근대5종까지 온갖 스포츠의 등록된 동호인 선수가 30만 명이다. 그중에서도 1%가 되지 않는 미미한 수준이다. 670명은 서울과 경기도에 몰려 있다. 서울 279명, 경기 198명이다. 인천 37명까지 포함하면 수도권에만 514명의 ‘펜서(fencer)’가 있다.
지역으로 내려오면 제주 48명, 대구 32명, 부산 28명, 경남 18명 순이다. 나는 대구에 산다. 통상적으로 대구 인구를 250만 명이라고 하는데, 그중 32명, 0.001%에 속한다. 펜싱클럽을 벗어나면 우연이라도 같은 운동을 하는 ‘동지’를 만나기 쉽지 않은 환경이다. 이렇게 계산하고 보니 정말 적긴 적구나 싶다. 이 정도면 ‘특별함’을 넘어 ‘희귀하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내가 펜서가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2017년, 그해는 대한민국이 여러모로 스펙터클한 나라라는 걸 몸소 증명하던 시기였다. 그해 3월 10일 헌법재판소는 공적 권한을 사인과 공유하던 대통령을 탄핵했다. 헌정 사상 처음 있는 대통령 탄핵에 이르기까지 대구에선 2016년 11월 5일부터 2017년 3월 4일까지 18주 동안 주말마다 시국대회가 열렸다. 업이 업인지라, 그 현장을 거의 매주 찾아야 했고, 그럴 때마다 살이 쪘다. 시국대회가 끝나고 기사송고를 마무리하면 늦은 저녁을 겸해 술을 먹기 일쑤였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매일 아침 살을 좀 빼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출근하고 술 냄새와 함께 퇴근하는 일상이 반복됐다. 그러다 우연히 집 가까운 헬스장 담벼락에 내걸린 현수막을 발견했다. 대충 ‘특별 이벤트, 3개월 등록 시 50% 할인!’ 따위였던 거 같다. 할인율에 혹해 별다른 고민 없이, 탄핵과 함께 펄럭이는 현수막이 달린 헬스장의 신규 회원이 됐다.
해본 이들은 알겠지만, 헬스는 쉽지 않은 운동이다. 트레이너를 붙여 PT를 받거나, 근력 운동을 하며 연신 “맛있다”고 소리치는 김종국처럼 운동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수많은 기구 사이 방랑자에 그칠 공산이 크다. 겨우 할 수 있는 건 러닝머신 위를 달리거나 간단한 근력 운동을 하는 수준이다. 3개월을 꾸준히 다녔지만 체중 감량 목표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그저 탄핵 이후에도 술냄새와 함께 퇴근하는 일상이 이어졌지만 현상 유지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에 만족할 밖에 없었다.
운명 같은 날은 우연히 찾아왔다. 헬스장 회원 등록을 다시 해야 할 시점이 다가올 무렵의 어느 무료한 주말이었다. 무료하게 리모컨을 들고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고정한 채널에서 한 배우가 체중 감량을 하겠다며 펜싱클럽을 찾아가는 모습이 비쳤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발견한 듯 종소리가 들렸다, 고 하면 과장일 테지만, ‘저거다’하는 생각은 뇌리를 파고들었다. 헬스의 무료함에는 이미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다. 재미도 있어 보이는데 살도 빠진다니, 금상첨화구나 싶었다. 무엇보다 칼싸움을 으뜸으로 삼던 어린 내가 그 순간 눈을 떴다.
‘대구에도 있으려나?’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들고 ‘대구 펜싱’을 검색했다. 두 곳이 검색에 걸렸다. 마침 한 곳은 집과 그리 멀지도 않았다. 집과 멀지 않은 펜싱클럽 블로그에는 매주 금요일 저녁 8시에 시합이 있으니 관심이 있는 사람은 구경도 하고 상담도 받아보라는 알림글과 전화번호가 게시돼 있었다. 홀린 듯 전화를 하고 금요일 방문 일정을 잡았다. 6월 마지막 주였는지, 7월 첫 주였는지는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금요일에 만나자’는 아이유의 노랫말처럼, 딱히 하고 싶은 것이 없어도 설레는 금요일 저녁, 펜싱클럽의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