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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펜을 든 달타냥 Mar 12. 2022

[펜싱은 처음이라] 2. '꽃' 같은 검

“펜싱 종목이 여러 개 있지 않나요?” 


주변 반응을 종합해보면 펜싱을 처음 접했을 때 이정도 질문만 할 수 있어도 펜싱을 전혀 모른다는 인상은 피할 수 있다. 정확히 3개 종목으로 나뉘고, 에페, 사브르, 플뢰레라는 개별 명칭이 있다는 정도까지 알면 펜싱을 잘 안다고 해도 크게 무리는 없을 거 같다. 각 종목별로 차이까지 정확하게 구분해낸다면 ‘펜싱 애호가’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에페, 사브르, 플뢰레는 모두 프랑스어로, 특정한 형태나 상태의 ‘검’을 의미한다. 그 의미를 곱씹다 보면 각 종목에 얽힌 역사적 유래나 종목별 특성도 조금은 이해하기 쉬워진다. 종목별 특성을 아는 일은 펜싱을 즐기는데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펜싱은 종목별로 공격 방법 뿐 아니라 점수가 인정되는 신체 부위나 사용하는 장비도 다르다. 때문에 종목을 구분하지 못하면 즐기는 것도 쉽지 않다.      


에페(Épée)는 프랑스어로 ‘검’이다. 검으로 하는 스포츠의 이름이 모든 검을 통칭하는 그냥 ‘검’이라는 것만으로도 에페가 표현된다. 에페는 펜싱의 태곳적과 닮았다. 펜싱은 검사들의 목숨을 건 검투에서 기원했다는 게 정설이다. 어디든 공격당하면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검투에서 유효하지 않는 공격면은 없다. 손끝이든, 발끝이든 찌를 수만 있다면 승리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 에페 역시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신체를 공격 대상으로 한다. 다만, 칼끝으로 찌르는 동작만 공격으로 인정된다.     


에페는 세 종목 중 유일하게 동시타를 인정한다. 양쪽 심판기가 함께 반응하면 두 선수 모두에게 점수를 부여한다. 상대 공격을 막거나 피해서 공격에 성공하지 못하면 끝날 때까지 동점이라는 의미다. 마찬가지로 실제 검을 이용한 결투를 떠올리면 간단하다. 나는 찔리지 않고 상대방을 찔러야 온전한 승리를 만끽할 수 있다. 그래서 에페는 세 종목 중 경기 운영이 가장 신중하다. 원시적 검술, 나 아니면 상대방만이 살아남는 검술에 더 짜릿함을 느끼는 이라면 에페야 말로 그 욕구를 채우는데 제격이다. ‘할 수 있다’ 박상영 선수로 대표되는 종목이다.     


사브르(Sabre)는 ‘기병의 검’이다. 말을 타고 달려 나가 부닥치는 마상 검투처럼, 세 종목 중 가장 거칠고 빠른 종목이다. 사브르 경기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면 언뜻 말 탄 기사가 연상되기도 하고, 켄타우로스를 보는 듯한 착각에도 빠진다. 마상 검투에선 상대 하반신은 말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하반신을 공격하려면 말을 먼저 공격하게 된다. 상대를 직접 타격하기 위해선 상반신을 공격해야 한다. 사브르 역시 마찬가지다.      


사브르는 상반신 전체를 공격 대상으로 하면서, 찌르기와 함께 베기 공격도 허용된다. 세 종목 중 유일하게 베기 공격이 허용되는 특징이 있다. 하지만 에페와 달리 동시타는 허용되지 않는다. 한 발이라도 먼저 튀어나가 상대를 공격하는 사람에게 점수가 허락된다. 먼저 나가지 못한다면 상대 공격을 막아낸 후 반격에 나서야 한다. 우리나라 여자 펜싱 선수 중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을 따낸 김지연 선수, F4로 유명세를 얻은 남자 사브르 국가대표로 대표된다.     


플뢰레(Fleuret)는 프랑스어로 ‘작은 꽃’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유래됐다. 작은 꽃, 에페나 사브르와 사뭇 다른 의미는 플뢰레의 시작을 엿볼 수 있게 한다. 플뢰레는 검술 훈련에서 비롯됐다. 훈련 과정에선 내 검이 상대를 상처 입히지 않아야 했다. 그래서 고안해낸 방법이 칼끝에 매듭을 묶는 것이었다. 작은 꽃이란 이름은 그 매듭이 꽃과 닮았다는데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고, 매듭이 아니라 꽃봉오리 모양 장식을 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문헌을 참고하면, 훈련을 할 때는 사고 방지를 위해 한 사람은 찌르기만 하고 반대편은 피하기만 했다. 플뢰레 규칙을 살펴보면 훈련에서 비롯된 흔적이 보인다. 우선 플뢰레는 사브르와 마찬가지로 상반신을 공격 대상으로 하지만, 머리나 팔을 제외한 몸통만으로 더 좁게 제한된다. 다치지 않게 칼끝을 보호했더라도 머리 공격을 허용했다간 자칫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걸 고려하면 머리가 공격 대상에서 빠진 건 이해가 된다. 다만 ‘팔은 왜?’라는 의문이 생기긴 하는데, 치명상을 입힐 수 없는 팔 공격을 훈련 때 굳이 했을까를 생각해보면 ‘아~’하고 수긍할 점이 생기긴 한다.     


동시타는 당연히 허용하지 않는다. 한쪽은 공격하고, 반대편은 피하기만 했으니 당연한 이치다. 먼저 공격권을 가진 사람에게 득점이 인정되고, 반대편은 공격을 막아내고 반격하거나, 상대 공격을 피해서 역공에 성공해야 득점이 인정된다. 공격 범위가 몸통으로 한정되고 동시타가 인정되지 않는 규칙으로 인해 다른 종목에 비해 경기 중 칼끼리 부딪힘이 많다. 남현희, 최병철 선수가 유명해서 작고 빠른 사람에게 유리하다는 인상이 짙다. 키가 170을 겨우 넘기는 나에게도 안성맞춤이다.     


다시 주변 반응을 종합해보면, 이렇게 친절하고 자세하게 설명해도 직접 검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똑같은 물음을 다시 던질 공산이 크다. “펜싱 종목이 여러 개 있다면서요? 그 뭐라더라···” 정도로 약간의 변주만 더 해질 뿐이다. 그럴때마다 나는 다시 친절하고 자세하게 설명해야 할 처지가 될 것인데, 지금 쓰는 이 글이 그 수고를 조금은 덜어 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누군가, 펜싱에 대한 작은 궁금증으로 이 글에 이르렀다가, 직접 검을 드는 경험으로 나아가게 된다면,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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