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공격 동작은 ‘팡트(fente)’라고 부른다. 팡트 역시 앙가르드에서 시작된다. 앙가르드 상태에서 칼 쥔 팔을 앞으로 밀 듯이 최대한 펴준다. 칼끝은 상대방을 향한다. 종목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플뢰레는 상대 전방 가슴이 가장 가까운 표적이 된다. 동시에 앞다리도 크게 앞으로 뻗어 나가고, 뒷다리는 몸을 앞으로 밀어준다는 느낌으로 펴준다. 뒷팔도 뒷다리에 추진력을 더한다는 생각으로 확 펼쳐준다.
동작이 마무리 됐을 때, 앞다리는 거의 90도에 가깝게 굽혀져 있고, 뒷다리는 곧게 뻗어서 굽힘이 없으면 더 할 나위 없이 완벽한 자세다. 펜싱을 5년 정도 하고 보니, 완벽한 팡트 자세만큼 아름다운 동작도 없구나 싶을 때가 있다. 지면을 박차고 날아오르기 직전의 학처럼도 보이고, 눈앞의 먹이를 낚아채려는 검독수리 같기도 하다. 은연중에 학과 검독수리가 떠올랐지만 학과 검독수리처럼 아름다운 팡트 자세를 가진 두 사람이 떠오른 탓도 있다. 둘 다 같은 스승님 아래 수학 중인 동문이지만, 경력은 6~7년 이상 된 선배들이다.
팡트가 비상 직전의 학처럼 느껴지는 이는 S다. 여성이지만 키가 작지 않고, 정확하게 완성해낸 팡트 동작이 부드럽다. 곧고 길게 뻗은 뒷다리와 마찬가지로 곧게 상대를 향해 뻗어나간 팔과 칼을 보고 있으면 다리를 곧게 펴고 날개짓을 시작하는 학처럼 우아한 느낌이 든다. S는 팡트의 우아함만 학을 닮은 건 아니다.
S와 시합을 해보면 게임을 풀어가는 스타일도 학을 닮았구나 싶다. 학은 다른 새들처럼 나무 위가 아니라 습지에 둥지를 트는 탓에, 꽤 자주 새끼를 노리는 여우나 너구리같은 천적의 공격을 받는다. 그럴 때 학은 천적으로부터 새끼를 지키기 위해 연기를 하기도 한다. 날개를 다친 듯 부자연스러운 행동으로 천적을 유인하는 거다. 그렇게 천적과 새끼를 멀리 떨어뜨려 놓고 나면 그제야 날개를 곧게 펴고 날아오른다. S가 딱 그렇다. 그는 꽤 자주 상대에게 일부러 허점을 노출하고 이를 노리고 들어오는 상대에게 역공격을 찔러 넣는다.
검독수리는 D다. 나와 마찬가지로 키가 크지 않지만 나와는 다르게 탄탄한 근육질의 몸을 가진 그의 팡트는 먹이를 향해 날아드는 검독수리 같다. 특히 D는 첫 팡트가 실패했을 때 연이어 찌르며 들어가는 르미즈(Remise) 동작이 일품이다. 팡트와 르미즈로 이어지는 연속 동작은 공격 이후 먹이를 낚아채는 검독수리와 판박이다.
D 역시 팡트만 검독수리를 닮은 건 아니다. 검독수리의 속도나 힘도 빼다 박았다. 검독수리는 수십, 수백 미터 상공에서 유영하듯 날다가도 먹이를 발견하고 낙하하는 순간 최고 300킬로미터가 넘는 순간 가속도를 낸다. D 역시 순간적인 가속력이 폭발적이다. 검독수리는 그 속도와 함께 먹이를 움켜쥐는 파괴력이 단숨에 심장까지 꿰뚫을 정도라고 알려져 있는데, 도복과 프로텍터를 뚫고도 내 가슴팍에 새겨지는 푸른 멍의 주인은 꽤 자주 D이곤 했다.
그들과 비교하면 나는 겨우 닭이나 펭귄 정도일까. 날지는 못하면서 푸드덕 날갯짓만 요란하다. 연습할 때는 그럭저럭 팡트 자세가 나오는 듯도 하다. 하지만 정작 시합을 할 때는 어정쩡하다는 걸 스스로 느낀다. 팔과 칼이 곧게 뻗어나가야 하는데 상체가 앞으로 쏠리기 일쑤다. 팔은 펴다 말고 몸이 앞서다 보니 상대방에게 쉽게 약점을 노출한다. 마찬가지로 곧게 뻗어주어야 하는 뒷다리는 축 늘어지듯 굽혀지는 일이 부지기수다. 이래저래 부족함이 많은 팡트다.
펜싱은 다양한 공격 방법이 있지만, 거의 모든 공격의 기본은 팡트다. 마지막 동작이 결국 팡트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팡트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공격에 자신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나 같은 펭귄이 그렇다. 그래서 펭귄은 펭귄의 펜싱법을 만들어간다. 하늘을 날지 못하는 펭귄은 실은 바닷속을 날아다닌다. 하늘을 나는 대신 하늘을 닮은 바다를 날 수 있도록 진화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삶은 기본을 응용하는 변주의 연속이지 않은가. 팡트에 자신이 없는 펜서는 펭귄처럼 나름의 진화 방식을 찾아야 생존할 수 있다.
우여곡절 끝에 찾은 펭귄의 펜싱법은 ‘레이백 랩’이다. ‘레이백 렙’은 올해(2021년) 스무살이 된 H가 내려준 정의다. H는 미국에서 펜싱을 배웠다. H와는 ‘거리를 둬야하는’ 바이러스 덕분에 더 가까워졌다. 2020년 미지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덮쳐오면서 H는 K방역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전에도 H는 가끔 방학을 맞아 한국에 돌아오면 우리 클럽을 찾곤 했다. 2020년 이전엔 간간히, 2020년엔 꽤 자주 경험한 스무살 H의 펜싱은 경쾌하고 명쾌하다. 스무살이란 나이가 경쾌, 명쾌의 배경일거다. 상대를 몰아붙이다가 경쾌한 스텝으로 팡트를 쏘아대는데, 그 명쾌함에 지켜보는 사람이 쾌감을 느낄 정도다. 경쾌하고 명쾌한 H는 ‘펭귄의 펜싱’을 곤란하게 생각한다.
어느 날 H는 “형이랑 할 때가 제일 힘들어요”라고 했고, 또 어느 날은 “형이 대회를 나가면 난 안 나갈래요”라고도 했다. 일단은 스무살 H가 서른다섯 먹은 내게 형이라고 하는 것부터 만족스러운 일이지만, 경쾌하고 명쾌한 그가 내 펭귄 펜싱을 곤란해한다는 것도 꽤나 흡족한 일이란 걸 먼저 밝혀둔다. 그런 H가 내 펭귄 펜싱을 ‘레이백 랩’으로 정의 내렸다. 박자가 달라 곤란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레이백 렙하는 거 같아서, 형이랑 시합하면서 박자에 말리면 다음 시합도 힘들어요.” 짜증이 묻어나는 그의 말에 “엄살떤다”고 맞받았지만, 나는 속으로 흐뭇하게 웃었다.
펜싱은 정확한 자세만큼, 기술을 쓰는 타이밍이 중요한 스포츠다. 공격자는 상대 타이밍을 뺏기 위해 다양한 페인팅 동작을 더한다. 공격하는 것처럼 보여서 상대를 속이고, 본래하려 한 공격을 꽂아 넣는거다. 예를 들어 가볍게 한 발 따라가는 듯하다가 기습적으로 빠르게 두 발 나아간다거나, 상대의 칼을 피해 공격하는 듯하다가 칼 안쪽으로 파고 들어온다거나 하는 식이다. 그런데 이 조차도 정형화된 타이밍이 있다. 팡트가 독수리를 닮은 D가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하나~ 둘’이었던 박자가 ‘하나, 둘, 셋’으로 쪼개져 늘어나지 않는다는 의미다. 음악으로 비유하면 연주를 할 때 아첼레란도(점점 빠르게) 지시가 내려진다고 해서 없던 음표를 하나 더 그려넣지 않는 것과 같다.
같은 스승에게 동문수학한 사이라면, 페인팅 동작의 타이밍도 닮는다. 개별적인 체력의 강인함이나 기술의 능숙함이 그 완결성에 차이를 만들 뿐, 타이밍은 같다. ‘하나~ 둘’. 기술 훈련을 할 때 감독의 구호가 몸에 내재된 덕이다. 같은 스승이 아니여도 ‘기본’은 만고불변이다. 기본이 기본인 이유다. 그렇게 보면 레이백 렙 같은 ‘펭귄의 펜싱’은 ‘하나~’와 ‘둘’ 사이에 ‘점오(0.5)’를 새기는 것이고, 음표와 음표 사이에 새로운 음표를 그려넣는 것과 같다. 펜싱으로 되돌아오면 남들 공격하는 타이밍엔 공격하지 않고 남들이 공격하지 않는 타이밍에 공격한다는 의미다.
사실 냉정하게 이야기해서 내 펭귄 펜싱은 순전히 약한 체력과 근력 덕분에 생긴 어부지리 같은 거다. 펜싱은 반복되는 경계와 전진, 후퇴 끝에 ‘칼의 대화’가 시작되면 그 순간부터 짧으면 2, 3초 길면 10초 안팎의 폭발적인 집중력과 힘이 필요하다. 특히 플뢰레는 2, 3초 안에 공격이든 반격이든 종료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고 ‘대화’가 이어지면 마침표를 찍는데 까지 시간이 꽤 필요해진다. 공격을 성공시키든 반격에 당하든 대화의 매듭을 짓거나, 적당한 거리만큼 물러나 숨 돌릴 틈이라도 만들어야 한다.
내 대화는 3초짜리였다. 한 번 말을 걸거나 걸어오면, 오래된 컴퓨터처럼 다음 말이 이어지기 까지 ‘랙’이 상당했다. 그래서 3초 안에 공격을 성공시키든 반격에 당하든 결론이 나곤 했다. 훈련 시간이 길어지면서 시나브로 체력이 보강됐지만, ‘랙’은 그대로 남았다. 대신 조금 더 진화된 형태로 남았고, 그게 ‘레이백 랩’이 됐다. ‘랙’도 나름의 박자와 만나면 들을만한 음악이 될 수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