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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키 Aug 23. 2024

9. 플랫그레이와 플랫화이트 그리고 커피젤리

월경이 시작되는 전조 증상이라고 해야 할까. 

이틀 전 친구들과 저녁 모임에서 소고기가 어찌나 맛있던지 다른 친구들은 육회 비빔밥에서 숟가락을 내려놓았지만 수지는 후식까지 거뜬히 먹어 치우는 위엄을 보이자 뱃속에 생명체가 자라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까지 했다.  

게다가 살도 많이 찐 상태라 의심받을 만도 하다.


월경 때가 다가오면 입맛이 돌아 모든 잘 먹게 되는데, 그것은 월경통으로 고생할 것을 대비하여 미리 많이 먹어 두어라는 몸의 메시지라고 생각하고 절제 없이 먹기는 한다.

"아.. 흐.. 쓰믐"

월경통으로 괴로워하는 수지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옅게 나온다.


특히 월경 1일 차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이 너무 심하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월경통으로 응급실을 가본 적은 없지만, 매달 월경통이 있을 때마다 119에 전화를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로 손발이 하얘지고, 사시나무 떨듯 온몸이 떨리는 증상이 과연 월경통이 맞나?  다른 큰 병이 자신의 몸속에 침투되어 있는 게 아닌가 불안한 마음이 들다가도 그다음 날이 되면 아무렇지 않은 듯 통증의 고통이 없는 것을 보면 월경통이 맞다는 결론이 나온다.


30년 넘게 매월 겪어야 하고, 치열하게 버텨내야 하는 고통이다.


약을 먹었으니 한두 시간만 버티면 강한 통증은 사라질 테지만, 하루종일 컨디션 난조는 어쩔 수 없다.






수지가 묵고 있는 에어비앤비 숙소의 벨소리가 울린다.

비디오폰을 확인하니 K다. 수지는 반갑게 문 열림 버튼을 누르고 얼굴에는 하회탈 같은 눈웃음으로 현관문 앞에 서있는다.

"롱타임 노 씨이"

장난스러운 K의 인사에 수지도 오랜만에 만나서 욕한 거 아니냐며 맞받아치며 서로는 반갑게 부둥켜안으며 몸을 좌우로 흔든다.


K는 수지가 오사카에 처음 갔던 스무 살에 일본어 학교에서 만난 한 살 많은 언니이다. 수지가 일본으로 왔어야 했던 사정을 꾸밈없이 다 말할 수 있었던 두 번째 사람이기도 하다.  

"컨디션은 괜찮아? 원래 오늘 너랑 이태원 구경 가려고 했는데... 그래도 에어비앤비 숙소도 구경하고 좋네. 숙소 정말 좋긴 하다".

K는 포장해 온 커피를 수지에게 건네며 눈은 숙소 안을 둘러본다. 수지는 몇 시간 전에 먹은 약 효과 덕분인지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통증 외의 다른 통증들이 사라져 그나마 살 것 같다는 말을 하고 커피를 한 목음 목에 넘기고는 바로 음료 용기에 쓰여있는 커피 브랜드명을 확인한다.

"언니 이거 너무 맛있는데! 근데 커피 안에 까만 건 뭐야?".
"흑임자. 맛있지?! 다행이다. 너 입맛에 맞을 거라 생각했어".

흑임자와 에스프레소의 만남이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다.

수지는 커피를 마시며 텟베를 떠올린다.

"텟베가 좋아할 맛이야".
플랫그레이 / 달달한 흑자임 맛과 적당한 크리미함은 식후 커피로 찾게 되는 버릇을 만든다<사진-개인소장용>

수지가 텟베라는 이름을 꺼내자 K히메나 선생님의 자상한 표정으로 수지를 바라본다.

정말 궁금한 게 많아 물어볼 것이 많지만, 수지 스스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꺼내주길 바라며 기다리고 있다.

"언니는 내꺼랑 다르네? 무슨 커피야?"
"내껀 플랫화이트. 내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호주를 사랑하잖니. 큭큭. 호주 사람들은 플랫화이트를 많이 마신다는 얘기를 들은 이후로 이것만 마신다. 나 웃기지? 근데 일반 라테가 목넘김이 무거운 느낌이라면 플랫화이트는 가볍고 깔끔한 느낌?"

웃으며 말하는 K가 해맑기 그지없다.

플랫화이트 / 마실때 마다  과연 호주에서 마시는 플랫화이트 맛은 어떨지 궁금해짐<사진-개인소장용>

자신들의 이팔청춘 시절엔 ㅇㅇ커피믹스가 세상 제일 맛있는 커피 인 줄만 알았는데, 사회생활을 하고, 다문화를 경험하면서 단지 커피는 졸음을 쫓기 위해서 마시는 카페인 음료가 아닌  기호식품이나 기호식품 같지 않은 지구에서 없어선 안될 식품이 되었다.


그리고 수지와 K는 일본 유학 시절에 맛을 본 커피 젤리는 그야말로 신선한 맛의 충격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그 시절 그녀들의 세상에서는 마시는 커피만 있었는데, 바다 건너 섬나라에는 커피젤리가 있었다는 것이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커피젤리 / 탱글한 커피젤리 위에 달콤한 아이스크림이 입안에서 만나면 미친듯이 날뛰며 하나가 되는, 진정한 달콤쌉싸름한 맛<사진-개인소장용>

그녀들은 커피 이야기를 하다 그것에 연관된 추억을 끄집어내어 다른 이야기로 연결되다, 다시 커피 이야기로 돌아오는 끊임없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수다가 이어졌다.

"유우타 군은 커피젤리 위에 아이스크림만 먹고 나는 젤리 위에 시럽 부어서 먹잖아"

계속되는 수다 속에 수지가 마치 유우타(優太-ゆうた)를 K도 알고 있는 것처럼 자연스레 말을 한다.

"으응, 근데 유우타가 누군데?".

K가 물어보자 그제야 아차 싶은 수지가 약간의 동공의 흔들림을 보였으나 이내 미소를 찾으며 무언가 결심이 선듯한 얼굴로 말을 한다.

"텟베의 아들"





*히메나 선생님 - 멕시코 어린이 드라마 '천사들의 합창'에 나오는 초등학교 교실의 담임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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