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실 청소를 하다가
청소를 하다가 인간본위에 대해 생각해보다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가 지나고 저녁에 샤워를 하던 중, 샤워실 벽에 묻은 찌든 때가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샤워를 마친 후, 한동안 미뤄둔 샤워실 청소를 결심했다. 얼마 전에 청소한 것 같았지만, 벽에 눌러 붙은 찌든 때는 나의 의욕을 불태우기에 충분했다. 독한 세제를 사용하고 열심히 솔질을 해도 때와 얼룩은 쉽게 벗겨지지 않았다. 수십 분 동안 힘겹게 청소에 몰두하다 보니 답답함과 짜증이 올라왔다.
잠시 밖으로 나와 왜 샤워실 벽이 더러워졌는지 생각해보았다. 샤워실 벽에 남은 때는 내 몸에서 배출된 노폐물들이 물과 비누와 섞여 주변으로 튄 결과였다. 결국 모든 때의 원인은 나였다. 몸의 노폐물들은 물과 비누와 결합해 일부는 하수구로 빨려 들어가고 일부는 샤워실 바닥과 벽에 눌러 붙었다.
한때 반짝이던 샤워실 벽은 매일 나의 더러움을 참고 견뎌왔다. 시간이 지나며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물 자국들을 따라 벽은 얼룩을 새겼다. 피곤하다는 핑계로 나는 이 호소를 무시해왔고, 한계에 다다른 샤워실은 꿉꿉한 물비린내로 절규하기에 이르렀다. 그제야 나는 악취에 괴로움을 느끼며 청소를 하게 된 것이다.
문득 샤워실 벽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더러워진 샤워실 때문에 짜증을 냈지만 정작 공간을 더럽힌 것은 나였다. 이러한 생각들은 내가 주변 사람들을 대하는 행동에 대해 돌아보게 했다. 다른 사람들의 실수와 결점에 쉽게 화내진 않았는지, 진정으로 이해하거나 공감은 했는지, 최소한 노력이라도 했는지 되돌아보았다. 나는 가족, 친구와 같은 주변 사람들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어준 적이 있는지 고민하며 반성했다. 생각의 끝에서 나는 샤워의 의미를 곱씹었다.
몸을 청결히 하기 위해 샤워를 한다.
몸은 깨끗해지지만 욕실은 더러워진다.
샤워와 청소는 주변을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한 행위이지만, 청소 후에는 욕실과 쓰레기통, 걸레 등이 더러워진다. 샤워는 때의 이동이고 청소는 먼지의 이동이라는 생각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그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개념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샤워와 청소가 청결한 행위라는 것은 인간본위적인 사고였다. 나는 이 사고에서 한 발자국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인간본위적인 사고는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인간의 본성일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을 기준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것처럼 말이다. 경험에 의한 학습을 원인으로 볼 수도 있다. 문명을 건설하고 발전시키며 인간은 자연스럽게 다른 존재들을 소유하고 사용하게 되었다. 이 과정은 지구의 중심이 인간이라는 생각을 심어주었다. 또한 타고난 성향이라는 설명도 가능하다. 모든 사람이 인간본위적으로 사고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부 사람들에게서 특히 강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이 질문에 정확한 답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다른 해석을 찾을 수도 있다. 문제는 인간 중심의 사고가 과하게 작용할 때 발생한다는 점이다.
주관을 바로 세우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주관이 지나치게 강해지면 자기중심적, 인간본위적 사고가 뒤따를 수 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변의 사정과 감정에는 무감각해져 이기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평소 갈등 상황을 자주 경험한다면 이미 자기중심의 사고에 빠져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샤워를 하며 떠오른 생각들 덕분에, 인간본위적인 사고의 위험성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인생의 주인공은 ‘나’이지만, 주변과 조화롭게 살아가려면 ‘나’만 중요하다는 사고의 자물쇠는 부수어야 한다. 샤워라는 행위가 욕실을 더럽게 만들었던 것처럼, 일상적인 상황도 비틀어 보았을 때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 이러한 시도로 우리는 갇혀있던 사고에서 서서히 벗어날 수 있다.
종종 자신의 말만 정답이라며 눈과 귀를 막는 사람과 대화할 때가 있다.(난가? 뜨끔) 주관을 바로 세우되, ‘나’만 중요하다는 사고는 부수어야 할 때라고 생각(반성)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