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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가 May 16. 2023

호우주의보

너는 나를 원래의 나로 만들어준다.

제주도에 밤사이 거센 폭풍과 함께 폭우가 쏟아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가 거주하는 서귀포시 동쪽(예전 지역명으로 남제주군) 지역의 날씨가 그랬다는 말이다. 제주도에 다보면 밤의 강풍과 집중호우는 그다지 특별한 경험은 아니다. 하지만 그때문에 집이 침수되는 것은 ‘특별히’ 성가신 일이긴 하다.


2층 야외 테라스와 연결된 트막한 턱은, 빗물이 테라스를 가득 채운 후 그 물줄기가 집 내부로 침입해오는것을 막기에는 무력했다. 로 인해 지금까지 두 번이나 침수 피해를 겪었던 나는, 호우주의보 메세지를 받은 날밤 편안하게 들기렀다 싶었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거센 바람 소리와 지붕에서 떨어지는 폭포와 같은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 걱정에 찬 마음으로 테라스를 확인했다. 예상대로 배수는 이미 솔가지들 때문에 막혀있어 제대로 역할을 못하고 있었다. 이미 넘실거리는 물은 현관이라는 고지를 넘기위해 부단히 노력중이었다.


비가 쏟아지는 와중에 두팔은 이미 빗자루와 쓰레받기에게 할당되었다. 팔이 지 2개뿐이라는 사실에 아쉬움을 느끼며, 강풍과 집중호우에는 배수구 만큼이나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는 우산을 목과 어깨사이에 걸쳤다. 그고는 자루와 쓰레받기를 이용해 물과 솔방울, 솔가지를 테라스 밖으로 열심히 치웠다. 이내 테라스의 물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비바람과의 치열한 사투를 마친 나는 방으로 돌아와 젖은 옷을 벗어 세탁기에 넣었다. 그런다음 샤워를 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 잠에 들었다.


어제 고생 덕분에 오늘 나는 침수 피해 없 상쾌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다. 강한 비가 내리고 난 후의 깨끗한 공기를 들이키며, 고사리 채취를 위해 집을 나섰다. 전기 트럭에 몸을 싣고 하천리의 평화교를 건넜다. 이 길은 내가 외울 정도로 자주 다니는 곳이고, 제주도는 화산섬의 특성으로 물이 잘 고이지 않는 편이다. 평소에는 말라버린 바위와 풀 가득했던 천미천은 그동안의 오랜 갈증을 시원하게 해소하기라도 하려는 듯  우렁찬 물줄기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평소 돌밭 같은 모습으로만 보던 천미천이 이번비로 인해 색다르게 느껴졌다. 고고학자 탐험가에게 화석이 되살아나 말을 건다면 이런 충격일까? 물이 흐르지 않아 불완전했던 모습이 사라지고,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천미천의 모습은 참으로 경이로웠다.


요즘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엉또폭포도 평소에는 평범한 절벽과 다를바 없었다. 그러나 비가 많이 내린 날에는 진짜 폭포로서의 위용을 갖추게된다. 천미천을 바라보고 있자니 지금쯤 엉또폭포도 터졌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도에서 내가 본 폭포중 가장 웅장한 폭포인 ‘엉또폭포’는 비 오는 날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아름다운 본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어릴 적 로보트(로봇이 표준표기법인것은 알고있다) 만화에 열광했었다. 특히 주인공이 로보트와 합체하여 출격하는 장면에 굉장히 매료되었다. 로보트는 평소에 빈 깡통처럼 대기하다가 주인공과 합체할 때, 진정한 힘과 완성된 모습을 드러낸다. 비가 많이 내린 다음날의 제주도의 자연 풍경은 그 합체와 출격의 순간을 연상케 했다. 강렬하면서도 경이롭고 아름다기까지한 그 모습은 마치 제주도 버전의 '화룡점정'을 보는 듯했다.


벽에 그려진 눈이 없는 용이 눈을 얻어 승천하듯, 건조한 바위와 풀로 뒤덮인 천미천이 용처럼 구비치며 폭발적인 생명력을 불어넣는 물줄기에 의해 완전히 변화된 그 모습은 내게 로보트가 출격하는 순간을 볼 때와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로보트도, 전투기도 활동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그들은 그 짧은 순간을 위해 대부분의 긴 시간을 준비하며 대기한다. 제주도의 천미천도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제 모습을 드러내는 시간은 1년 중 극히 짧은 순간에 불과하다.


이는 우리 인간 생활과도 비슷한 면이 있지 않을까? 최근에 본 '극한직업'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 한국 유니버설 발레단의 발레리나와 발레리노들의 열정을 보았다. 그들은 1년 중 100일 정도 공연을 하며, 나머지 시간은 대부분 연습에 투자한다. 이처럼 그들도 인생에서 드물게 찾아오는 완성의 순간을 위해 끊임없이 준비하고 대기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례를 생각하며,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거듭나는 순간을 기다리며 인내해댜 겠다고 생각해본다. 그런 순간이 1년에 며칠 없더라도, 아니 인생에 그리 많지 않아도 너무 실망하지는 말자. 한동안 비가 오지 않는다 해도 너무 무기력해지지도 말자. 엉또폭포가 긴 세월 그래왔듯, 천미천이 그렇듯, 그 자리에서 의연하게 서서 인내의 시간을 견뎌보자. 그러면서 기다릴 수 있는 체력(재력 혹은 묘안)을 길러나가자고 생각했다.


트럭을 운전해서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니 저수지에 물이 가득 차 있었다. 저수지 가장자리에 물결을 이루며 떼 지어 있는 색의 두루미 무리가 보였다. 그 옆으로 다리를 반쯤 담그고 오랜만에 물의 충만함을 만끽하고 있는 말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표정은 마치 아기가 처음으로 따뜻한 물이 가득한 욕조에 들어갔을 때의 모습처럼 순수하고 행복해 보였다. 물이 주는 세상의 풍요로움과 다양한 감정이 내게 전해져왔다. 메말랐던 천미천과 가물어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던 저수지에 내린 비는 물의 축복이 되어있었다. 어제 새벽에 벌였던 나의 사투와 겹쳐지며 세상의 아이러니를 다시금 느꼈다. 마치 동전의 양면 같은 일이었다. 

     

비가 많이 내린 다음날이라 고사리도 부쩍 많이 자라있었다. 평소보다 고사리를 많이 채취했으니 나 역시 비(물)가 주는 풍요로움의 혜택을 누리게 된 것일까? 제주도의 아름다운 자연이 눈부신 초록빛으로 펼쳐졌다. 나는 그 속에서 신선한 물과 공기를 느끼고 동식물들과 함께 호흡하며 자연을 즐길 수 있었다. 그 속에서의 시간은 몸과 마음에 활력을 불어넣어주었다. 두둑하게 수확한 고사리를 가지고 흡족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온 것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루가 저물어 가는 동안 나는 제주도의 아름다움을 남김없이 눈에 담았다. 오렌지 빛 태양이 조금씩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며 주위를 붉게 물들였고 곧 여유로운 저녁이 찾아왔다. 저녁 공기는 새로운 희망과 감동, 그리고 은근한 아쉬움으로 채워졌다.     


제주의 특별했던 ‘그 날’은 내게 물이 가진 위력과 존재감을 일깨워주었다. 어제의 사투로 오늘의 나는 침수 피해 없는 상쾌한 아침을 맞이했다. 나의 사투 그 너머에서는 몰아치는 비가 축복이 되어 아름다운 자연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리고 곧 나 또한 자연 속으로 들어가 싱그러움과 풍성함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간밤의 땀방울이 씻겨나가고 소중한 축복의 일부가 되는 특별했던 순간을 오랜동안 간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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