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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가 Apr 12. 2023

갓김치

갓김치를 며칠동안 먹으며 생각에 잠겨본다.

제주도에는 야생 갓이 많다. 단순히 ‘많다’가 아니라 조금만 신경 써서 주위를 둘러보면 곳곳에서 무리지어 자라고 있는 갓들을 어디서든 볼 수 있다. 그 중 차도에서 꽤 거리가 있고, 제초제나 살충제 같은 농약으로부터 청정한 지역에서 나고 자란 갓을 발견한다면(이를테면, 나의 집 앞마당처럼) 갓김치를 담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갓김치는 담그자마자 바로 먹어도 그 맛이 훌륭하지만, 곰삭은 홍어도 맛있게 먹는 내 입맛에 아직까지는 최고의 맛이라고 할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며 갓이 익어갈수록 젓갈 특유의 냄새와 짠맛이 줄어들면서, 칼칼하고 알싸하며 달달한 맛과 더불어 여러 가지 맛의 결합으로 미각을 깨우는 새로운 맛이 탄생한다. 이 때의 갓김치는 최고의 밥반찬임에 틀림없다.


한번은 며칠 동안 매일 갓김치를 먹은 적이 있다. 매 끼니마다 갓김치에 밥을 먹는데, 질리지도 않고 오히려 날마다 새로워지는 그 맛에 감탄했다. 심지어 흐르는 시간에 따른 발효라는 물리적 법칙을 깨고 갓김치가 점점 신선하고, 예뻐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마치 사람이 성인으로 인정받는 스무 살 정도까지는 늙어간다 하지 않고 커간다, 성장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때 나는 깨달았다. 맛은 깊어가지만 오히려 내게 신선하게 느껴진 갓김치와 같이, 어떤 이들은 매일 밝고 새로운 에너지 속에서 하루를 다채롭게 살아갈 것이다. 반백년의 나이를 먹은 지금 그 어떤 이가 비록 지금의 나 자신이 될 수는 없지만, 누군가 나날이 신선한 하루를 열고 살아가는 상상만으로 설렘을 가슴 가득 느낄 수 있는 것은 나 역시 과거에 그러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리라.


나의 갓김치 예찬론이 계속되자, 같이 식당에서 일하시는 누님은 갓김치 더러 ‘갓김치는 참 좋겠다, 사장님이 예뻐해 줘서’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때의 표정은 정말 부러워하는 얼굴이었다. 누군가에게 소중하게 대우 받는 것은 행복한 일이니까 말이다. 누님의 그 말에 나도 깊이 동감하면서, 주변의 누군가에게 받는 관심과 애정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려 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태어나서 제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스스로 먹지도 못해 보호자에게 의존해야만 하는 시기를 거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자연이 선물처럼 갓난아이에게 쥐어 준 귀여움과 생명의 경이로움 은, 가만히 누워 어머니의 젖만 잘 먹어도 온갖 관심과 칭찬이 축복처럼 쏟아지게 한다. 인생에서 들을 수 있는 칭찬의 절반 정도가 갓난아이부터 약 5살까지의 시기에 집중된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내 경우에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 이후, 빠르면 10대 후반에서 20-30대에 이성과의 연애관계에서 남은 칭찬의 절반을 듣게 될 확률이 높다. 물론 이상적인 결혼생활을 이어가는 커플들은 긴 결혼생활이 이어진 후에도 서로의 배우자로부터 따뜻한 애정의 말을 듣겠지만, 현실적으로 많은 부부가 ‘인간아, 화상아’ 소리만 안 들어도 다행이라는 것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마치 첫사랑의 설렘과 같았던, 가슴 두근거리고 간지러웠던 감각들은 지금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내게는 기억 저편의 것들이다. 그리고 어린 시절, 경험했던 애정이 듬뿍 어린 시선과 말 그리고 행동들로부터 느낀 감정은 지금은 단지 마음속 깊이 화석처럼 남아있다. 그러나 종종 그때의 기억을 떠올릴 때면, 나에게도 그런 소중한 날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에 빙그레 미소가 떠오른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김치의 숙명이 그러하듯 갓김치의 신맛이 강해져서 그냥 먹기가 어려워진다. 이럴 때 갓김치에 사용된 모든 양념, 특히 고춧가루를 깨끗한 물에 씻어낸 뒤 들기름과 양파, 간마늘, 새 고춧가루, 간장, 설탕 등의 재료를 넣어 볶아서 쉬어버린 갓김치의 맛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어느 정도의 세월을 살아내면 생기가 사그라지고 싱그럽기만 하던 젊음이 가시는 시기가 찾아온다. 언제나 주변으로부터 환영받던 시기에서, 소수의 사람들만이 보내는 인정 속에 살아가고, 끝내는 아무에게도 환호 받지 못하는 나이를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삶의 찬란했던 오색빛깔 위로 세월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 갓김치에 새로운 맛을 찾아주는 재료처럼 인생의 양념을 더해보는 것은 어떨까. 자신에게 필요한 목표와 열정, 도전 정신 등의 맛깔스러운 양념을 넣어주면 갓김치가 되살아나듯 삶의 심장박동이 다시 힘차게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변화와 성장을 추구하면서, 우리는 지난 시간을 후회하는 것보다 더욱 가치 있는 현재의 순간을 소중히 여길 수 있다. 지금껏 걸어온 인생에 대한 아쉬운 시선을 거두고 펼쳐질 날들을 희망으로 바라보며 더욱 맛있게 익어가는 인생을 즐겨보자.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깊이 있는 맛을 내는 인생을 살자.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참 예쁘다.’, ‘정말 잘했다.’라는 응원과 격려를 건네며 더불어 성숙하고 무르익어가는 인생을 함께 즐기자. 그러면 어제보다 아름다운 오늘의 ‘나’가 되고 다가올 내일의 ‘나’는 오늘보다 더 맛있는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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