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

by 서채



시험 기간의 도서관은 전장과도 같다.

새벽부터 자리를 잡기 위한 고지 점령으로 시작해 시험에서 우위를 선점하기 위한 전투가 조용히 벌어지는 곳.

조금의 부스럭거림도 바로 총살로 이어질 수 있는 이곳을 우리는 도서관이라 쓰고 전쟁터라 읽는다.


"너 준비 많이 했어? 오픈북이라 양이 꽤 많던데"


"그런 건 미리미리 해야지 임마. 오픈북 준비는 이미 끝나고 지금은 다른 거 준비하고 있다"


"벌써? 잘됐다. 그럼 정리한 거 나 좀 보여줘. 양이 너무 많아서 도무지 감이 안 잡혀"


"니가 그럴 줄 알고 안 가져왔지. 의지 하려고 하지 말고 스스로 고민해서 해라. 그러게 시험이 코앞인데 술을 왜 먹냐? 이제 다 왔어. 조용히 해"


이른 아침 도서관에 도착한 친구와 난 로비를 지나 A실로 들어선다.


"야. 저기 봐. 오늘도 있어 히어로 형"


"응? 아 그러네. 그런데 형? 형인지 어떻게 알아?"


"그냥 딱 보기에도 나보다 나이가 있어 보이잖아"


"나이는 니가 더 들어 보여 임마. 이제 조용히 하고 시작하자"


매달. 매일.

누구보다 일찍 자리에 앉아 꼼짝 않고 책을 읽는 정체 모를 남자.

우리 과는 확실히 아니고 다른 과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당최 그 소속을 알 수 없다.


일반인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고 있는 이곳은 선택받은 자들의 공간이다.

그런 이곳에 들어와 한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는 일반인 같은 남자를 친구는 히어로라 불렀다.


집중의 시간.

자기의 것에 몰두하고 있는 이 곳의 사람들에게 시간의 흐름은 무의미하다.

하지만 어디에서나 그렇듯 공간을 무너뜨리는 균열은 반드시 발생한다.

오늘의 균열은 구석 자리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들은 진공 처리된 무균의 공간을 한 번의 움직임으로 끝내버리는 바이러스들처럼 정적의 결정체인 이곳을 서서히 잠식하며 먹어 들어갔다.


"야. 이 사진 좀 봐봐. 진짜 웃겨"


"어디? 하하하. 이걸 어떻게 찍었어?"


"우연히 찍힌 건데 표정이 정말 웃겨. 이거 게시판에 올릴까?"


"한번 올려봐. 반응 장난 아니겠다"


구석 자리에서 시작된 그들의 대화는 10분이 훌쩍 지나 30분이 다 되어가도록 계속된다.

그 바이러스들 덕에 집중력이 흐트러진 A실 사람들의 표정이 일제히 일그러진다.

하지만 누구 하나 나서는 사람이 없다.

개인화가 철저히 이루어진 이곳에서 논쟁의 중심에 설 용기는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은 탓이다.

그건 나와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친구가 눈을 마주치며 입구 쪽으로 고갯짓을 한다.


'그래. 시작 한지 한참 됐으니 커피나 한잔하고 와야겠다'


친구와 A실 통로를 지나 입구로 나가려는 순간,


쾅!


의자가 뒷 책상과 부딪힌 뒤 큰 소리를 내며 엎어진다.

바로 우리의 히어로, 아니 친구의 히어로가 신경질적으로 일어서며 벌어진 일이었다.

뒤이어 히어로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응시한다.

정적의 공간을 압도하는 범상치 않은 사내의 카리스마는 구석 자리의 바이러스들을 비롯해 그 공간 안에 있는 모든 이를 굳게 만들었다.

이윽고 사내의 고개가 천천히 구석 자리를 향해 돌아가고 A실 안 모든 이의 시선은 사내를 향한 채 멈춰버렸다.


"야!!!"

굵직한 사내의 크고 정확한 음성이 A실 사방에 울려 퍼진다.


"왜.. 왜.. 요?"



"너네 조동히 못하겠더? 둑고딮어?"






누군가에게 안 좋은 평가를 받고 상처 받은 이를 보며 떠올랐던 에피소드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범상치 않은 사내는 대학 시절 친했던 형입니다.

현재는 각자의 삶이 바빠 소원해졌지만 대학 시절에는 누구보다 절 챙겨줬던 고마운 형이었습니다.


"형은 말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아마 얼굴로 우리 학교를 평정하고도 남을걸?"


정말 잘생기고 카리스마 넘치던 형에게 우리가 입버릇처럼 했던 말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우리를 비롯한 거의 모두가 형에게 비슷한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는 겁니다.


"내가 어때더? 난 아무덯지도 않아. 너나 달해 인마"


맞는 말입니다. 누가 누굴 평가하나요.


각자에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면 누굴 평가할 필요도, 누군가에게 평가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누군가 날 안 좋은 말로 평가하고 있다면, 조용히 마음으로 '친절한 금자씨'를 만나게 해 줍시다.


너나 잘하세요.


그리고 도서관에서는 떠들지 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