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왓...!"
별안간 릴리는 몸을 일으켰다. 답답한 흉통에 자신의 가슴을 부여잡았지만, 이내 상처가 없음을 깨닫고 숨을 겨우 내쉴 수 있었다. 떨리는 호흡이 몇 번 반복되자, 그제서야 통증 자체도 거짓임을 알 수 있었다.
"꿈... 이구나..."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 샤를로트의 목소리. 울먹거림이 섞여 있어 더욱이 이질적이었기에, 지금의 자신이 릴리가 아님을 새삼 다시 인지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명탐정 릴리 그레이─ 아니, 살인범 릴리의 최후가 설마 조수에게 배신당하는 거라니. 하하, 누가 알았겠어?"]
믿었던 이에게 총을 맞아 목숨을 잃었던 그 순간.
─버러지 같은 꿈.
─실제로 일어났던 현실.
눈을 뜨고 있음에도 주변은 여전히 어두웠다. 볕 하나 들지 않는 실내. 잠자리라는 명목 하에 대충 깔려진 이불은 식은 땀으로 젖어있었다. 백작저에서 지냈던 침실과는 결코 비교할 수도 없겠지만, 릴리 탐정사무소와 견주어도 이곳은 편안히 잠들기 힘든 열악한 공간이라 말할 수 있다.
끼─익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 보이는 손잡이를 잡았다. 살며시 힘을 주고 천천히 문을 열자 문틈의 선을 따라 곧바로 빛이 들어왔다. 지하 3층의 비밀 사무실에는 수상한 사람뿐만 아니라 햇빛마저 들어올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전등의 빛이라도 반가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전등이 켜져있다는 것은─
─헤르카의 커피 타임.
아침이 되었다는 뜻이다.
암전의 지하 사무실. 거실 자체를 사무실로 사용하고, 나머지 방들은 창고나 개인실로 이용하는 구조이다. 지명수배를 당하고 있는 리더 헤르카와, 따로 주거공간이 없는 루루와도 방 하나씩 지분을 가지고 있다.
나 역시도 암전과 함께하기로 한 날부터, 남은 방 중에 한 군데에서 지내기로 했다. 그리고 내 방의 위치는, 문을 열면 바로 테이블이 보이는 곳. 헤르카가 직접 커피를 타는─ 그 테이블이다.
헤르카는 조용히 테이블 쪽에서 가열형 마도구에 마나를 불어넣고 있었다. 그 옆으로는 페이시가 사온 다양한 원두가 보였다.
"어... 헤르카. ......"
괜한 어색함을 깨기 위해서 일단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아무리 백작가의 자제였더라도─ 명망 높은 탐정이었더라도─
일단은 암전에 속한 이상, 리더인 헤르카를 따라야하니까.
["기사, 샤를로트. 암전에게 명예를 맡깁니다."]
게다가 그런 말까지 해버렸으니, 명백히 헤르카는 나의 상관이다. 암전에서 리더를 제외한 나머지는 수평적인 관계라고 해도, 결국 헤르카와는 수직적인 관계. 기사들도 본인보다 서열이 높은 기사들에게는 인사 대신 '경례'를 한다지? 비록 릴리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문화지만, 나름의 대세와 법도를 따르기로 했다. 그렇게 내린 결론은─
"... 좋은 아침."
─간단한 안부 인사였다.
"......"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헤르카는 흘깃 쳐다보고 고개만 살짝 까딱했을 뿐, 다시 커피 타는 데에만 집중을 옮겼다.
...... 괜히 어색한 분위기만 더 짙어졌다. 머쓱함이 생겨서일까, 굳이 헤르카의 표정을 읽고 싶지는 않았다. 유독 헤르카만큼은 불편하단 말이지.
─죄책감 때문일까.
......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있다. 오늘 나의 악몽이 현실이었던 것처럼─
["레드 라이트 극단에도... 헤르카 님의 연인 분이 계셨으니─"]
그때, 헤르카의 현실도 악몽이었겠지.
"... 사탕."
─불편한 침묵을 끊어준 건 루루와였다. 커피 향기에 깼는지, 어느새 루루와는 비몽사몽한 눈으로 사무실로 나와있었다. 루루와는 찬장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와 내게 내밀며 다시 한번 말했다.
"샤를로트. 뚜껑."
투명하면서도 한 손으로도 감쌀 수 있는 작은 상자. 안에는 상자보다도 작은 사탕 한 알이 들어있다. 루루와로부터 상자를 받아든 나는 약간의 마나를 실어 상자로 흘려보냈다. 이윽고 잠금이 해제되었고, 루루와는 곧장 내용물을 집어 입 안으로 던져넣었다.
"우물우물... ... 차가움."
얼음 원소를 다룰 수 있는 마나라서 그런지, 상자형 마도구에 흘려 넣는 과정에서 사탕이 차가워진 모양이다. 그래도 루루와는 시원한 사탕에 만족했는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오물거렸다.
루루와의 사탕. 사탕 자체는 무향이지만, 씹을 때 입 안에서 사과향이 퍼진다. 맛을 어떻게 아느냐고? 일전에 생각없이 꺼내먹었다가 벌(?)로써 루루와의 꼬리에 3시간을 묶여 있었으니 알 수 밖에.
... 맛있긴 하더라.
아무튼 수인용 디저트답게 루루와가 정말 좋아하지만, 케이스 자체는 마도구였기에 열기 위해서는 적정량의 마나가 필요했다. 수인 종족은 신체 능력이 좋은 대신 마나가 거의 없기에(거의 릴리급) 루루와를 위해서는 누군가 대신 뚜껑을 열어주어야 했다.
내가 오기 전까지 사무실에서 사탕 상자 뚜껑을 열어줄 만한 사람은 헤르카 밖에 없었다. 상황만을 읽어보면, 지금까지는 루루와가 부탁하기도 전에 헤르카가 미리 상자를 열어두고 커피 타임에 들어간 것 같은데, 내가 오고 나서는 그러지 않았다.
─내가 루루와랑 가까워질 기회를 마련해준 걸까?
... 너무 좋은 방향으로만 생각했나. ...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 굳이 헤르카와 불편한 거리를 둘 필요는 없는데.
***
지하 3층의 사무실에는 세면실이나 욕실이 따로 없다. 그래서 나랑 루루와는 같은 건물 지상 2층에 있는 빈 방의 샤워실을 쓰기 위해 계단을 쭉 올라왔다.
"어... 루루... 샤를... 왔어?"
방문을 여니 아니카가 널부러져 있었다. 방 안 가득 술냄새가 풍겨왔지만, 이 방에서 술판이 벌어진 건 아니다.
전부 아니카의 호흡에서 나오는 알코올 기운이었으니까.
루루와는 일찌감치 코를 막고, 별일 아니라는 듯이 곧장 샤워실로 향했다. 나를 보는 아니카의 표정에서는 [반가움]이 읽혔지만, 정작 본인의 상태는 그렇지 못한 듯했다.
아니카의 술집은 새벽 1시까지 일을 하는데, 영업 종료 이후에 지인들과 한 잔 걸친 모양이었다. 그리고 집에 가지 않은 채 그대로 술자리를 즐기다가 2층 빈 방으로 와서 쓰러져 있는 게 지금의 상황.
"헤... 헤헤... 이따 봐..."
그녀는 나에게 떨리는 손을 흔들어주었다. 어차피 점심에 암전의 회의가 있을 예정이니까, 그때까지 회복하라는 의미에서 아니카의 주변에 시원한 공기를 만들어주었다. 속이 진정되는 데에는 도움이 될 테니까.
... 그나저나 아니카가 저렇게 힘들어 할 줄이야.
암전에 처음 들어오고 회식했을 때를 생각하면, 헤르카보다도 더 잘 들이켜던 인간이 아니카였다.
많이 마시고─. 많이 즐기고─. 그랬었는데.
... 이쯤 되면 아니카의 친구들이 괴물이 아닌가.
죽어가는(?) 아니카를 뒤로 한 채, 나는 걸친 옷을 벗고 샤워실로 들어섰다. 샤워실은 이미 수증기로 뿌연 상태. 루루와는 자신의 꼬리로 거품이 보송보송 나는 샤워 타월을 집은 채 몸을 문지르고 있었다. 저런 거 보면 참 편리한 꼬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거울을 보니─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 얼굴이 보였다.
처음 보았던 푸른 빛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머리카락.
원래는 붉었지만 릴리가 들어옴으로써 머금게 된 푸른 벽안.
나는 이 소녀가 누군지 몰랐었다. 내게는 정보를 수집할 능력이 없었으니까. 암전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그녀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샤를로트.
19세, 여성.
강함을 추구하며─ 명예를 중요시 여기는─
그리고─
유르하르드로 인해 숙청당한 하급 기사.
[마녀사냥]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불쌍한 소녀.
페이시로부터 얻은, 샤를로트에 대한 정보였다. 아무래도 릴리가 감옥에 갇혀있었을 때 유르하르드가 [면회]와서 지껄인 말에 샤를로트도 포함인 모양이었다.
...... 그렇다.
생전의 샤를로트는 자신만의 [정의]를 위해, 친구인 페이시와 루루와를 도우며 부패한 사회를 바로잡으려 했다. 그런 샤를은 중급 이상의 기사들에게 눈엣가시. 중급 이상의 기사들과 부패 귀족들이 처리할 기회를 넘보는 와중에 그녀가 참여한 것은 그레이 백작 부부 피살 사건의 [재수사].
그래. 나─ 릴리의 부탁이었던 [재수사].
사형을 선고받은 릴리의 부당함을 말하다가 이렇게 된 것. 유르하르드는 일부러 하급 기사들에게 사건의 재수사를 떠넘기고, 그 기회를 이용해 단번에 그들을 처리한 것이다.
나로 인해─. 나를 위해─.
아무래도 릴리와 샤를로트는 목적이 같은 모양이다.
영혼과 몸이 매듭지어진 게, 우연이 아니었나.
왠지, 샤를로트가 되고 나서부터 [성찰]하는 시간이 많아진 느낌이다. 수많은 생각과 함께 샤워를 끝마치고, 다시 아니카가 쓰러져 있는 방으로 나왔다.
"어으... 그, 그만..."
먼저 나온 루루와는 코를 막은 채 쭈그리고 앉아 아니카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고 있었다. 사이 좋게 놀고 있는 두 사람을 뒤로 한 채, 거울을 보며 막대 형태의 마도구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위이이잉─
바람 원소를 생성해주는 마도구. 보통은 머리를 말리는 데에 쓴다. 릴리 시절에는 마도구를 작동시킬 마나조차 없어 자연 건조시켰었는데, 이럴 때는 참 편안하다.
생각할수록 억울하네.
이런 좋은 것들을 누리지 못했다니.
위잉... 틱.
머리도 어느 정도 말렸고, 이제는 페이시가 알려준 [관리]를 해야 할 차례인가. 사실 지금의 머리 스타일은 페이시의 솜씨이다. [완전기억능력]과 별개로, 페이시의 [미용] 실력은 상당했다. 솔직히 말하면 백작가 전속 미용사보다도 나은 수준.
["인상, 눈동자, 머리스타일만 바뀌면 보통 못 알아봅니다."]
혹시라도 샤를로트의 뒷모습을 알아보는 이가 있을까 봐 페이시가 직접 손을 써준 것이다. 여기에 모자까지 얹으니 확실히 인상이 달라졌다. 완전기억능력자가 말하니 더 신뢰가 갈 수밖에.
페이시의 말마따나, 지금이야 내용물과 눈동자가 변했다지만 원래의 샤를과 릴리는 둘 다 세상에 돌아다녀서는 안 되는 존재다. 개방된 술집에서 일하는 아니카는 그렇다 쳐도, 나랑 루루와가 이렇게 해가 떠있는 아침에 사무실 바깥을 나돌아다닐 수 있는 건,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니까.
실제로 지명수배가 된 리더 헤르카는, 사람이 돌아다니지 않는 시간에 변장을 한 상태로 건물 안에서만 다니는 게 허락된다. 뿐만 아니라, 지금은 다른 곳에서 도움을 주는 '라키' 역시도 얼굴이 알려졌기에 [연구실] 밖으로 나오질 못한다고 한다. 덕분에 나는 아직까지도 라키를 본 적이 없다.
......
─그 미친 폭탄을 만든 양반을.
***
["샤를로트. 당분간은 이 정도만 하도록."]
헤르카의 지시에 따라 오전 동안에는 간단한 조사 활동을 했다. 셰로키 스트리트에서 현재 활동 중인 기사 현황이라든가, 운영 자금을 벌어들일 방법이라든가. 별 소득은 없었지만, 릴리에게 있어서는 본인이 직접 정보를 [수집]한다는 의미 있는 활동이었다.
무엇보다 예전의 병든 몸이 아니라서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나름대로 즐거웠다.
점심이 다 되어서야 간단한 식사거리를 사들고 사무실로 복귀했다. 헤르카는 이미 오늘의 두 번째 커피를 타 두었고, 시체나 다름없던 아니카는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평소의 텐션으로 부활한 상태였다. 그리고 루루와는─
"먼지. ... 오직 먼지."
─방금 도착해서 보고를 전했다.
"음, 역시구나... 헤르카. 내 [비상금]은 없는 모양이야."
루루와가 다녀온 곳은 다름 아닌 [릴리 탐정사무소]. 지금은 섣불리 접근할 수 없는 곳이기에 루루와가 탐색하고 온 것인데.
─이미 다 털린 모양이다.
처음에 은신처를 부탁하면서 내려고 했던 돈도 원래 릴리 탐정사무소에 잘 숨겨둔 골드였는데.
... 열심히 모아둔 거였는데.
"어쩌지, 헤르카? 술집에서 버는 돈으로는 부족할 거야..."
아니카가 곤란해하고 있었다.
정확한 설명을 듣지는 못했지만, 지금 암전의 목적 중 하나는 라키가 만들고 있는 [날개]라는 이름의 도구. 최대한 빨리 만들어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골드가 있어야 한다고 대강 들었다.
하지만 우리와 다르게 헤르카의 표정은 [걱정]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그녀는 테이블 위로, 구체형으로 된 통신용 마도구를 꺼내들었다.
"페이시의 보고에 따르면, [하이젠베르크 가]에 은닉 재산이 있는 것 같더군. 그걸 노리면 될 거다."
이틀 전부터 페이시는 헤르카의 특별 지시로 단독 조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 쪽의 조사였나? 하긴, 헤르카는 뭔가를 잘 말해주지 않는 타입이니까. 나야 뭐, 명예를 맡긴 기사 입장에서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니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이후 헤르카의 말은 내 예상 밖이었다.
"부탁해도 되겠는가?"
헤르카는 명령이 아닌 부탁을 했다. 지금까지 보여준 적 없던 모습이다. 하물며 그 대상은─
"릴리. 그대 말이다."
샤를로트로서 명예를 맡긴 이후로─ 샤를로트가 되겠다고 하며 암전에 들어온 이후로─ 나는 샤를로트라고 불리고 있었다. 나 스스로도 그것이 나았다. 더욱이─ 헤르카에게 릴리는 겸연쩍은 존재였기에, 그녀가 나를 릴리라고 부를 일은 없을 줄 알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지금 상황에서는─"
─헤르카가,
"─탐정 릴리가 필요하다."
─먼저 거리를 좁혀주었다.
yes24, 북센, 알라딘에 검색하면 단행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브런치에 올라온 것과 내용은 똑같고, 대신에 미공개 일러스트와 본편에 나오지 않은 설정 등의 내용이 추가된 굿즈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