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색의 매듭 4화

by 도토리


하이젠베르크 후작가. 셰로키 스트리트의 귀족으로, 거리의 시민들 사이에서도 악명 높은 부패귀족이다. 특히 차기 가주인 '드나르 하이젠베르크'는 뒤에서 사병을 거느리며 이것저것 좋지 않은 사업들을 하는 모양이다. 탐정으로 독립하기 전, 그레이 가의 여식으로서 참여한 모임에서 드나르를 몇 번 본 적 있었는데─
["자매가 둘 다 쓸만하군. 내게 올 생각은 없나?"]
─확실히 별로긴 했다. 그 때 플로라는 그저 웃으며 넘겼는데, 나는 표정이든 말투든 불편한 티를 팍팍 냈던 것 같다. 덕분에 그 후로 나한테는 말을 걸어오지는 않았지만, 플로라한테는 꽤나 집적댄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지금 암전의 일원으로서 하이젠베르크 가의 불법 은닉 재산을 빼돌리는 것에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어때? 경비가 있는 쪽에 골드가 있지 않겠어?"
아니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장소는 하이젠베르크 후작령 내의 창고였다.
"저택 외부인데다가, 눈에 띄는 장소니까. 재산을 보관하기에는 적절치 않아. 아마 사병들이 사용하는 무기 보관고일 거야."
아니카는 나의 [추리]를 듣고 이내 수긍했다.

지금은 헤르카의 [부탁]으로, 아니카, 페이시와 함께 '하이젠베르크 가의 은닉재산'이 숨겨져 있을 장소를 추리하고 있었다. 추리의 근거가 되는 단서는, 지금 테이블 위로 잔뜩 펼쳐진 흑백의 그림들. 하이젠베르크 후작령 내의 건물 모습과 저택 내부의 모습들이 정교하게 나타내어져 있었다.
─이건 사진이 아니다.

"다음은 서재로 하겠습니다."
─페이시가 그린 그림이다.

빠른 손놀림으로 빈 종이에 선을 긋는 페이시. 선들은 모여서 곧 면이 되고, 페이시의 기억 속 하이젠베르크 저택의 서재가 순식간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형태만 잡히는 게 아니다. 책장에 꽂힌 책들의 제목부터, 책상 위의 서류에 적힌 작은 글씨까지. 세밀한 부분까지 재현되고 있었다.

[완전기억능력].
페이시의 손재주와 합쳐지니, 그냥 사진기 그 자체였다.

잠입과 탐색은 루루와의 특기였지만, 정작 루루와 본인이 촬영 마도구를 사용할 수 없기에 이번 일은 페이시가 맡은 듯했다. 페이시는 현직 아카데미 교수니까(처음 봤던 이미지가 맞았다.)─ 그 신분과, 만들어낸 적절한 사유를 이용해 하이젠베르크 저택을 둘러볼 수 있던 것.
잠깐 본 것일지라도, 페이시에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은 반드시 [기억]된다. 그리고 내가 할 일은─ 형상화된 그녀의 기억에서 [관찰]을 통해 [단서]를 찾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탐정 릴리의 역할이다.

"페이시. 물."


어느새 다가온 루루와는 페이시에게 물잔을 건넸다. 수많은 기억들이 그려지는 동안, 페이시를 서포트(연필과 지우개를 교체해주는 역할)하는 건 루루와의 몫이었으니까.
"... 고맙습니다, 루루와."
페이시는 계속 움직이던 손을 잠시 멈추고 루루와가 건네준 물을 들이켰다. 단순 작업량만 생각해도, 한 사람이 쉬지 않고 하기엔 쉽지 않은 일이니까. 페이시의 표정을 읽지 않아도, 그녀가 얼마나 고생하는 지를 알 수 있었다.
"샤를로트. 뚜껑."
루루와는 겸사겸사 내게 사탕 상자를 건넸다. 나는 상자를 열어주고, 사탕을 입에 넣은 루루와의 볼 한 쪽이 볼록 튀어나온 것을 잠깐 지켜보다가, 페이시에게 말했다.
"페이시. 그만 그려도 돼."
"... 아닙니다. 이것만 다 마시고 다시 시작하죠."
얼마 안 남은 물잔을 살짝 보이며 그녀는 다시 연필을 잡았다.
"아니, 정말로. 그릴 필요 없어."
"... 아. 그렇군요."
페이시는 내 말의 뜻을 이해한 듯, 조용히 연필을 내려놓았다.
"왜? 뭔데? 골드가 어딨는지 찾은 거야?"
아니카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이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근거는 두 가지야."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

자정 무렵, 하이젠베르크 후작령의 무기 보관고. 저택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 있지만 중요한 곳이기 때문에 늦은 밤임에도 여덟 명의 경비병이 두 눈 부릅뜬 채 지키고 있었다.

살랑─
들리지도 않을 소리와 함께, 건물 옆 수풀 사이로 무언가가 지나갔다. 잽싸게 움직이던 그림자는 무기 보관고의 벽면에 무언가를 붙이고, 다시 재빠르게 멀어졌다. 하지만 경비병 중 그 누구도 수상한 그림자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잠입의 고수, 루루와였으니까.

루루와가 도망쳐나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무기 보관고의 한 쪽에서 순간적으로 섬광이 일었다. 고막을 뒤흔드는 거대한 폭음과 함께 무기 보관고가 화염에 휩싸였다. 멀리서 보았을 때, 두터운 건물 잔해들도 여러 곳에 흩뿌려진 상태였다.

라키의 폭탄. 성능이 과할 정도로 확실하다.
루루와는 노예경매장 때보다 더 위력이 커진 폭발을 보고 동공이 꽤나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런 루루와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이제 들어가자, 루루와."
작전대로─ 무기 보관고에서 발생한 테러에 이목이 쏠리는 동안, 우리 둘은 경비의 눈을 피해 저택 쪽으로 몸을 옮겼다.

이번 작전은 루루와와 나. 둘이서만 진행하기로 했다. 물론 헤르카는 처음엔 루루와 혼자 잠입하는 것을 제안했었다. 하지만, 결국 추리를 한 주체는 릴리다. 검증하는 것도 내가 직접 해야 한다.

내가 한 추리에─ 조금이라도 책임을 지고 싶었으니까.


헤르카는 내 의견을 존중해주었다. 그리고 작전이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라키의 폭탄 하나와 역소환 마도구 두 개를 건네주었다.
라키의 폭탄은 마나 없이도 작동하는 공학장치. 루루와가 저택 외부의 중요한 장소에 폭탄을 설치해서 사람들의 눈길을 돌린다. 역소환 마도구는 마나를 불어넣으면 대상을 정해진 좌표로 소환시켜주는 일회용 마도구. 루루와 혼자라면 들켜도 빠져나올 수 있지만, 샤를로트는 그렇지 못하니까. 하나는 목표인 골드를 옮기는 데에 쓰고, 하나는 내가 탈출할 때 쓴다.
─그런 작전이다.
그리고 지금은 순조롭게, 저택 안쪽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
페이시의 말대로, 저택 내 보물고는 두 사람의 경비가 지키고 있었다. 외부의 소란에도 절대 움직이지 않을 이들. 하지만 우리의 목표는 보물고가 아니다. 그냥 피해서 가면 된다. 저 둘은─ 오직 보물고만 지킬 테니까.

우리는 무사히 서재 앞에 도착했다. 예상대로 서재의 문은 잠겨 있었지만, 다행히도 페이시가 이곳의 열쇠를 봐두었다. 그녀의 기억대로 복사된 열쇠는 당연하게도 서재의 잠금을 해제해주었다.

철컥─
조용히 문을 열자, 복도의 잔빛으로 인해 어둠 속의 서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책상 위는 조금씩 배치가 달라지긴 했지만, 페이시의 그림과 완전히 똑같은 서재의 모습. 이곳이 바로─
─은닉 재산이 숨겨진 장소다.


근거는 두 가지다.
하나─ 책이 가득 채워진 책장.
페이시가 그려준 저택내외의 모습을 보았을 때, 찬장의 식기는 모든 공간을 다 채우고 있었다. 장식품 진열장도 비어있는 칸이 없었다. 책상 위의 서류철과 필기구 역시, 저마다의 보관함의 한 군데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건 곧, 하이젠베르크 가의 누군가에겐 무엇이든 깔끔하고 알맞게 채워 넣어야 하는 기벽이 있는 것.
이는 서재의 책장에도 적용되었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책장이 아닌─ 책상 위에 있던 한 권의 책이다. 한 권을 뺐다면, 그 순간에는 빈 공간이 생길 수밖에 없다. 책상 위 작은 보관함에는 필기구 하나가 빠져나오면서 생긴 빈 공간이 있듯이─.
하지만 그림 속 책장은─ 빈 공간 없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루루와와 함께 서재의 책장을 자세히 훑어보았다. 그림과 마찬가지로 같은 너비, 같은 높이, 같은 두께의 책들이 가득 꽂혀져있었다. 그 어떤 책도 같은 시리즈는 없고, 주제 분류조차 되어있지 않았다.
어느 위치에 무언가를 숨기더라도 티가 나지 않게 하기 위함.
즉, 이 책장의 책들 중 하나는─
"찾음...!"
─책인 척하는 상자인 것이다. 루루와는 가장 높은 곳에 있던 열에서, 책처럼 생긴 [비밀 상자]를 찾아내었다.
살포시 바닥으로 착지한 루루와로부터 상자를 건네받았다. 비교적 쉽게 열리는 상자 내부에는─ [열쇠]가 들어있었다.

휘릭─
"음?"

열쇠를 집으려는 내 손목이 루루와의 꼬리에 감겼다. 덕분에 내 손가락은 열쇠를 잡기 직전에 멈추었다.
"위험함. 여기, 가시."
루루와는 손가락으로 열쇠의 [잡는 부분]을 가리켰다. 루루와 정도의 시력이 아니라면 찾지 못할 독바늘. 나름대로의 방범 장치였던 모양이다.

... 하마터면 두 번 죽을 뻔했다.
돌아가면 루루와한테 사탕 두 개 줘야겠다.

아무튼, 열쇠를 찾았으니 이제는 [자물쇠]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틀림없이, 그 자물쇠로 잠긴 문은─ 이곳에 있다.

둘─ 수많은 창문.
페이시가 그린 저택의 모든 장소는, 창문이 존재했다. 심지어 침실 쪽은 전부 창문을 통해 들어온 볕이 침대에 닿을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었다. 그만큼 후작가 사람들은 밝은 걸 선호하고 채광이 잘 되도록 저택을 설계한 것이다. 하지만 단 한 군데─. 이곳, 서재는 단 하나의 창문도 없다.
원래는 있었겠지. 하지만 책장으로 막거나 해서 없앤 것이다.
─누군가 밖에서 볼까 봐.

그리고 직접 [관찰]하면서 깨달은 사실이 있다. 바닥에 깔린 사각형의 카펫. 처음 봤을 때에는 책상 앞에서 끊겨있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책상 밑에까지 뻗어 있다.

왜─ 책상 밑까지 카펫을 깔겠어?


곧바로 책상을 옆으로 옮기고, 카펫을 들어올렸다.
"찾음...! 대단...!"
역시나─ 바닥에 숨겨진 문이 있었다. 헝겊으로 감싼 열쇠로 자물쇠를 열자, 문은 약간의 쇳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다지 깊지 않은 통로를 따라 내려가자, 그 끝에는 작은 방 하나 크기의 공간이 있었다. 그리고 공간을 가득 채운─ 수많은 골드 현물들.
"돈! 골드!"
루루와는 흥분된 표정으로 골드 주화로 쌓인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1억의 가치는 족히 되는 양이었다. 그레이 백작가에서도 이정도의 골드는 본 적 없었는데─.

가지고 온 보자기로 골드를 최대한 감쌌다. 역소환 마도구로 옮길 수 있는 대상은 한 가지이지만, 이렇게 해두면 '한 가지'로 취급되니까. 마도구에 마나를 불어넣자, 골드들은 문제없이 암전의 사무실로 소환되었다.

이것으로 일단은 해결이다. 추리가 현실과 맞아떨어졌을 때─. 탐정으로서 가장 뿌듯한 순간이다. 암전에 필요한 자금도 마련되었고, 발각도 되지 않았다. 이제는 무사히 돌아가기만 하면...

......
... 어라?

위화감. 골드가 역소환되며 텅 비워진 이 비밀 공간에서─ 내 안의 작은 의심을 [성찰]해버렸다. 탐정의 습관은, 은닉 재산을 발견한 직후 마음이 풀어진 와중에도 계속되고 있었다.


어째서 이곳에 다다를 때까지 경비를 두지 않은 걸까?
경비에게조차 알리고 싶지 않았던 걸까?
그리고...

─계속 신경 쓰였던 한 가지. 아무리 은닉 재산이라고 해도, 귀족가마다 가지고 있는 보물고 정도에만 넣어도 괜찮다. 경비가 지키는 동안에 그 누구도 쉽게 노릴 수 없으니까. 굳이 비밀창고를 만들지 않아도, 귀족의 재산은 함부로 빼내어가지 못하니까.
게다가 은닉 재산 정도는 불법일지라도 들켜봤자 크게 타격이 없다. 하물며 드나르는 부패 귀족인데. 고작 골드 따위를 너무 신중하게 숨겼다. 이건 마치─

─더 큰 걸 감추기 위한 미끼 같잖아.

"루루와. 벽이랑 천장을 살펴줘. 수상한 게 있을 거야."
루루와가 벽을 짚고 살펴보는 동안, 나는 바닥을 샅샅이 조사했다. 분명 뭔가가 더 있다. 탐정의 직감? 아니다. 이건 명백히─
"구멍... 있음...!"
─추론의 결과이다.
루루와가 가리키는 곳은 출입구의 오른쪽 벽.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각도에─ 루루와 정도의 시력이 아니라면 찾지 못할 바늘구멍이 있었다.
"루루와! 아까 그 열쇠!"
루루와는 곧바로 헝겊으로 싸둔 열쇠를 다시 가져왔다. 열쇠의 잡는 부분을 구멍이 있는 벽에 가져다 대고, 그대로 힘을 실었다.
열쇠에 달린 미세한 바늘은, 그 구멍에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독바늘은 함정뿐만 아니라, 제2의 열쇠 역할까지 하는 것이었다.

끼이─익
뭔가 장치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눈 앞에 새로운 비밀 공간이 열렸다. 역시, 은닉 재산은 침입자가 만족할 만한 가짜 해답. 이렇게까지 해서 드나르가 숨긴 진실은─

"히, 히익...! 살려주세요..."
─꽤나 충격적이었다.

어두운 비밀 공간. 철창 안쪽으로, 양 손목에 족쇄를 차고 있는 릴리 또래의 여성. 낡은 카펫 위에서 누더기 하나만을 걸친 채, 드문드문 드러나 있는 피부에는 수많은 상처들이 있었다. 한쪽 다리에는 발목 부근까지 붕대가 감겨져 있었는데, 다른 한쪽에 비하면 확실히 짧았다.
"너는... 클로에...?"
릴리는 오른쪽 다리가 잘린 이 여성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레안 백작가의 둘째 딸─ 클로에 레안. 친하지는 않지만, 사교 모임에서 가끔 인사 정도만 나눴었다. 릴리가 사형 선고받고 난 이후 즈음에 실종되었다고 들었었는데─.
"제, 제발...! 사, 살려줘요...! 흑흑..."
클로에는 울음을 터뜨렸다. 루루와도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이해한 듯, 철창 이곳저곳을 살펴보며 열 방법을 찾고 있었다.

드나르 하이젠베르크─.
생각 이상으로 쓰레기구나.


귀족의 딸을 납치해서 감금. 거기에 고문까지─. 이는 존속 살인과 마찬가지로, 제 아무리 귀족이더라도 [사형]당하는 중죄이다. 그러니 이렇게 꼭꼭 숨겨두었겠지.

"페톨리움... 안 열림..."
루루와는 열쇠 구멍조차 없는 창살을 연신 긁고 있었다. 확실히 루루와의 말대로, 철창은 페톨리움으로 만들어졌다. 이 정도면 마법으로 잘라낼 수도 없다.

... 그런데 어째서 열리지 않게 만든 거지?

"... 클로에. 잠깐 그 카펫 좀 옆으로."
내 말을 들은 클로에는 곧장 바닥의 낡은 카펫을 입으로 물고 옆으로 당겼다. 그렇게 드러난 바닥에는 두 개의 [마법진]이 있었다.

하나는 소환 마법진. 다른 하나는 역소환 마법진.
이걸 이용해서 클로에를 이동시켰구나. 마법진을 통해서 이동했다는 건, 족쇄는 페톨리움이 아니라는 뜻이다.
즉, 클로에는 마도구에 마나를 불어넣을 수 있다. 그렇다면─

"클로에. 이거 받아."
철창 사이의 공간으로, 하나 남은 역소환 마도구를 그녀에게 건넸다. 루루와가 놀란 눈으로 쳐다봤지만, 클로에를 구할 수 있는 건 지금은 이 방법뿐이다.
"역소환 마도구야. 거기에 마나를 불어넣으면, 안전한 곳으로 갈 수 있어."
"에... 저, 정말요...?"

족쇄 때문에 손을 들어올릴 수 없던 클로에는 옆으로 누운 채 마도구에 손을 대었다.

"소환되고 나면, 은발의 여자가 있을 거야. 그 사람에게 모든 걸 말하고 도움을 청해."
"네, 네...!"
클로에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저, 정말로... 고마워요... 흑흑..."
이윽고 그녀는 암전의 사무실로 역소환되었다. 헤르카라면, 그녀를 잘 보살핀 뒤에 드나르 하이젠베르크를 고발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겠지. 그렇다면 이후의 문제는 없는 것이다. 다만─

소환 마법진 위에서 다른 소환 마법이 발생하면, 소환진을 그린 사람이 감지하게 된다. 즉─
─곧 있으면 이곳으로 적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후작가의 사병들이면 평균적으로 샤를로트와 같은 하급 기사의 바로 아래 정도. 비록 내게 기사 급의 힘은 없지만, 마법을 쓸 수 있다. 샤를로트가 지니고 있던 소드 마스터 급의 마나를─ 마법사로서 응용할 수 있다. 노예 경매장 때의 만만한 상대는 아닐 테지만, 잘 싸우면 승산은 있다.

다수를 상대할 때 좁은 공간이 좋긴 하지만, 이곳에 계속 있다가는 출입구를 봉쇄당해 이도저도 못할 수도 있다. 나는 루루와의 손을 잡고 곧바로 서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루루와. 무슨 일 생기면 혼자서라도 도망쳐."
"... 싫음."

아무래도 루루와는 나와 함께 싸울 모양이다. 사탕 상자를 열어주면서 정이라도 든 걸까? 안 그래도 오늘 나랑 함께 하면서 좋은 파트너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위험함. 여기, 가시."]
["찾음...! 대단...!"]
["돈! 골드!"]

오늘의 루루와가 마치... ...... 조수처럼 느껴졌다.

"그래, 같이 싸워보자."
나도 모르게 나오는 미소를 숨기며, 나와 루루와는 비밀 공간을 빠져나왔다.

벌컥!
숨겨졌던 문에서 나오자마자, 서재 문이 열렸다.
"이거, 이거. 쥐새끼가 남아있었군. 곧바로 도망친 줄 알았는데 말이지."
─드나르 하이젠베르크. 본인이 가장 먼저 나타났다.
"다행이군. 비워진 감옥을 뭘로 채워야 하나 걱정했는데. 네 년 정도면 귀족이 아니더라도 꽤 쓸만하겠군."
역시나. 그 이상한 기벽은 이 녀석의 것이었나. 거기다 말하는 것도 예전이나 다를 게 없─
...... 잠깐─.

"드나르 님! 무슨 일이십니까!"
드나르가 서재의 입구를 막고 있는 사이, 경비병들이 다섯 정도 달려왔다. 마나 감응으로 보았을 때, 소드 엑스퍼트 상급 정도 되는 이도 한 명 있었다.
"고양이 계집은 죽이고, 저 년은 최대한 상처 없이 제압─"
"야, 드나르."
드나르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최대한 진정한 상태에서, 조용히 [추리]를 시작했다.

하나─ 클로에 레안이 실종된 시기.
분명, 릴리가 사형 선고 받고 난 이후 즈음이었다.

둘─ 드나르의 기벽.
지하의 비밀 감옥조차도 한 사람이 채워져야 하며, 지금까지는 귀족 영애들이 한 명씩 갇혀 있었다.

셋─ 클로에가 갇히기 전, 이전에 있었던 소녀의 존재.

비슷한 시기에 사망 소식이 들려왔던 귀족 소녀─

"─플로라 그레이."
─내 동생.

"네가... 그랬냐?"
─진정할 수가 없었다.

옆에 있는 루루와도 흠칫할 정도로, 분노의 감정이 드러났다. 지금─ 떨리는 내 손끝으로, 마나가 격하게 모이기 시작했다.


["...... 미안. 릴리는 죽었어. 살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복수심 따위도... ... 없어."]

... 이젠 아니다.
릴리의 죽음은 샤를로트의 삶으로 이어졌다. 끊어진 복수심은, 충분히 매듭으로써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와닿으니까, 더 확실하게 느껴졌다.

샤를로트는 살았다.
죽고 싶은 생각도 없고─
릴리의 복수심은 이제서야 이어졌다.

─그렇게 순간적으로 [성찰]을 해냈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그 어느 때보다도 명확하다.

"뭐, 그런 년도 있었지. 자매가 쌍으로 마음에 들었었는데, 아쉽게도 언니 쪽은 지 애미 애비 죽이고 뒤따라가버려서 아쉽더군."

결국 유르하르드는─ 플로라를 죽인 범인마저 조작한 거였구나. 애초에 그레이 가문 전체를 없애려고 했으니, 플로라의 납치를 도왔을 수도 있겠네.

"아무튼, 영광으로 알도록. 귀족이 아닌 여자로 감옥을 채우는 건 네 년이 처음이니."

드나르의 도발에도 나는 별 반응 없이 침착했다. [성찰] 이후에 내 감정은 차분해졌으니까. 그렇다고 분노가 사라진 건 아니다.

그저, 표출하는 방법을 제대로 알았을 뿐.

나의 오른손에는 계속해서 마나가 모여들었다. 최대한 얇게─ 최대한 날카롭게 얼음 원소를 정제해냈다.
─이제 준비는 다 되었다.

"그렇게 채워 넣는 게 좋다면─"

서걱.
무언가, 잘리는 소리와 함께 경비병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네 관부터 채워."

내 손짓 한 번에─ 드나르의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yes24, 북센, 알라딘에 검색하면 단행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브런치에 올라온 것과 내용은 똑같고, 대신에 미공개 일러스트와 본편에 나오지 않은 설정 등의 내용이 추가된 굿즈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