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색의 매듭 11화

by 도토리

[읽기]─.
탐정의 습관 중 하나로─, 표정을 통해 감정을─ 대화를 통해 거짓을─ 문장을 통해 의미를 알아낸다.
유르하르드는 나를 릴리라고 의심한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사실 그는 내 눈을 본 순간부터─ 릴리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의 표정에서 그런 [감정]이 읽힐 리가 없었으니까. 샤를로트의 몸 안에 있는 나를 마주하고부터─
["그리고─ '정체 모를' 당신에게 인계할 이유는 없습니다."]
─내 정체를 알고 있었다.

유르하르드는 여전히 검을 세워 든 상태. 내 눈 앞의 검날은 당장이라도 내 얼굴을 베어낼 듯─ 흔들림 없이 고정되어 있었다.
"내가 살아있는 걸 알고 있었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 아뇨. 여기서 직접 보기 전까지는, 추측 정도였습니다."
"알고 있는 다른 사람은?"
"없습니다."
"아니카를 해치려 했던 건, 날 유인하려고 그런 거야?"
"해칠 생각은 없었습니다. 상처만 낼 생각이었죠."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릴리. 지금의 모습은... 혹시 샤를로트입니까?"
이번엔 유르하르드가 질문했다.
"맞아. 너가 팔아 넘긴 불쌍한 소녀."

"... 대체 어떻게─"
"─그것까지는 모르겠네. 눈 떠보니 노예경매장이었고, 자세한 건 전혀 몰라. 그래도 덕분에 널 다시 만날 수 있게 됐으니."
─나는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릴리와 유르하르드의 대화 느낌은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실제로 릴리가 죽기 전까지는─ 유르하르드와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더더욱 릴리는 그의 [배신]을─
─믿고 싶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나저나─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질문에 순순히 답하는 걸 보면─"
─나는 재빠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무래도 한 쪽이 죽어야 되는 상황인 거, 맞지?"
곧바로 손가락 끝에 [살별]을 모아 유르하르드를 가리켰다. 유르하르드는 대답 대신에 온 몸의 마나를 활성화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를 향해 [살별]을 발포했다.

피잉─
[살별]은 유르하르드를 피해 뒤쪽의 벽에 도달했다. 난 분명 머리를 노렸는데, 유르하르드는 재빠른 움직임으로 마나 총탄을 피해낸 것이다.

"─죽이지는 않겠습니다."
유르하르드는 곧바로 들고 있던 게르단의 검에 마나를 끌어모았다.

순식간에 발생하는 오러. 괜히 상급 기사가 아니다. 마나 감응을 쓰지 않아도, 그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체감이 될 정도.
"로베르트 공작이, 샤를로트를 원했어서 말이죠."
─그는 이번엔 내게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촤악─ 콰앙!
"우왓...!"

유르하르드는 허공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무수한 양의 마나가 담긴 오러는 단 한 번의 검격만으로 거대한 충격파를 만들어내었다. 간신히 몸을 뒤로 빼며 피해는 받지 않았지만─

퍽─
"윽...!"
명치에 강한 충격이 느껴짐과 동시에 몸이 뒤로 밀렸다. 충격파에 대처하는 와중에, 유르하르드가 눈 한 번 깜빡할 사이에 달려들어 정권을 날린 것. [채색]을 사용할 틈도 없이 공격을 허용해버렸다.
[가속]─. 유르하르드가 자주 쓰는 스킬에 당한 것이다.

"크윽─ 콜록!"
가슴을 붙잡고 기침을 했다. 다행히 넘어지지는 않고 숨은 쉬어졌지만, 고통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인생에서 두 번째로 느끼는 실제 흉통. 샤를로트의 단련된 몸이라서 망정이지, 릴리의 몸으로 이 정도 속도의 공격을 받았으면 곧바로 사망했을 것이다.

"저항하지 않아줬으면 합니다, 릴리."

유르하르드가 이번엔 천천히 걸어왔다.
"으으... 내가 이대로... 무너질 것 같아...? 콜록."
나는 비틀거리면서도, 불안정한 호흡 중에도, 오른손 검지손가락으로 유르하르드를 가리켰다.
"소용없습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나는 오른손으로 마나를 모으지 않았다. 대신 왼손을 살짝 뻗어 곧장 유르하르드가 걸어오는 바닥 쪽으로 마나를 흘려보냈다. 아까보다 날카롭게─ 그리고 정교하게─

[채색].
빈 공간에 색을 칠한다. 푸름은 어떤 형태로든 채워지며, 무슨 모습이든 만들 수 있다.
마나를 방출함으로써, 원하는 좌표에서 원소 발현을 할 수 있는 스킬.

콰지직─
순식간에 바닥으로부터 날카로운 고드름을 만들어냈다. 총알도 피하는 [가속]일지라도, 의외의 방향에서 나오는 공격은 반응하지 못하겠지.
"......!"
그어지지 않을 [살별]에 집중하다가, 유르하르드는 방심했을 것이다. 덕분에 왼손으로 그린 [채색]은 송곳처럼 유르하르드의 오른발을 뚫었다.

유르하르드가 발에 박힌 것을 빼내려하는 사이, 나는 겨우 호흡을 가다듬고 진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상급 기사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 유르하르드─."
그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그는 여전히 나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내가 준 검은? 기사라면 검을 들고 다녀야지."
─내가 할 말은 아니긴 했다.
"죄인이 준 검을─ 어찌 들고 다니겠습니까?"
말과 함께, 유르하르드는 단단히 박힌 고드름의 형체를 뽑아버렸다. 막힌 혈관이 뚫리면서 피가 흩뿌려졌고, 이내 곧 그의 발 밑에 피웅덩이가 고이기 시작했다.
"... 아픈 소리 하나 내질 않네? 여전히."
"...... 아무렇지 않습니다."
─거짓말.

["유르하르드 경. 뭐 안 좋은 일 있어? 표정이─ ..."]
["평소의 무표정입니다만─."]

유르하르드는 자신의 속마음을 항상 숨겼다. 항상 가짜 감정을 내보이기만 했다.

["아니? 내가 [읽기]엔 좀 속상해보이는데?"]

그래─. 거짓 정보를 넘겨줄 때에도, 뭔가를 숨기는 듯했지.
그때 이후로는 유르하르드를 배려해서 굳이 더 캐묻지 않았었는데.


["...... 아무렇지 않습니다."]
─아무렇지 않을 리가.

"저는 명령을 수행하는 기사입니다. 과거의 당신이나, 지금의 당신이나. 악감정은 없습니다."
유르하르드는 들고 있던 검을 역수로 고쳐잡았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할 뿐. 그러니, 굳이 옛날 이야기를 꺼내도 의미는 없습니다."

휙─ 팟!

순간적으로 유르하르드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가속]을 써서 빠르게 움직이는 것일 테니, 곧바로 주변시를 이용해 그의 움직임을 쫓았다. 무언가의 형체가 빠르게 술집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발에 구멍이 났는데 이런 속도를 낸다고? 이래서는 섣불리 마법을 쓸 수 없다. 그렇다면─

콰지직─!
내 주변 바닥에 얼음가시를 [채색]했다. 눈으로 쫓지 못한다면, 이렇게라도 움직임을 제한하는 수밖에.

탁! 팟!

뒤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채색]을 깔아둔 것이 무색하게, 유르하르드는 곧장 내게 공격해온 것이다. 곧바로 몸을 돌렸으나, 유르하르드의 손길은 이미 내 앞까지 와있었다.


콱─!
휘이익─ 콰당!
"끄으으..."
─유르하르드에게 목을 잡혔다. 그대로 몸이 어느 정도 공중에 떠있는가 싶더니, 이내 곧 바닥에 뒤통수를 쳐박혔다. 쓰고 있던 모자도 멀리 날아가버렸다.
"제가 당신을 해치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당신이 넘어질 방향에 가시를 깔아 두었군요."
그래서 유르하르드는 일부러 나를 잡고 안전한 바닥까지 이동했던 것이다. 덕분에 목숨은 건졌지만─
"끄윽... 컥!"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유르하르드는 눕혀진 나를 기절시키기 위해 왼손으로 내 목을 강하게 조르고 있었다. 거기에 내가 몸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무릎으로 배를 짓눌렀다.
"끄으으...!"
움직이지 못하는 건 유르하르드도 마찬가지. 오른손 검지로 그의 머리를 가리키고 [살별]을 쏘려했다. 하지만─
"[블루 아웃]입니다. 괜히 반항하지 마시죠."
─유르하르드는 내 마나를 무효화시키고 있었다. 그를 떨어뜨려놓지 않는 이상, 나는 마법을 쓸 수 없다.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쳤지만, 상급 기사의 완력을 이겨내기는 힘들다.
"커흑..."
슬슬 정신이 혼미해진다. 입가에 침이 흐르는 것 같지만, 신경 쓸 여유는 없다. 나는 필사적으로 유르하르드의 손을 붙잡아 긁어대며, 떼어내려고 노력했다.


푸욱─
그러던 중, 유르하르드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검을 내 머리 바로 옆으로 내리찍었다. 박힌 검날을 따라 머리카락이 잘려나갔고, 유르하르드는 자유로워진 오른손으로 내 왼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저항하지 못하도록 내 머리 위쪽으로 당겨 바닥에 고정시켰다.

─이렇게... 또 무너지는 걸까?
나뿐만 아니라, 샤를로트도─. 그리고 암전의 모두도─.

또 잃어버리는 걸까?

...... 아니.
샤를은 나에게 기회를 줬어.
릴리가─ 아직은 좀 더 세상에 남을 수 있도록.

나는 탐정 릴리다.
이번에는─ 살아남을 방법을 [추리]하는 거다.

"... 포기한 겁니까."
나는 내 목을 조르던 유르하르드의 손에서 오른손을 떼어냈다. 언뜻 보면 포기한 것처럼 보이지만, 내 오른손은 주변의 바닥을 조심스럽게 더듬었다.

─확률은 희박하지만, 약간의 가능성은 있다.
내가 지금 쓰러져있는 이 주변은, 아니카가 있던 자리. 분명, [그것]이 남아있을 거다.
"그런 것도─ 소용없습니다."

유르하르드는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나의 오른손을 보고, 왼손의 구속을 풀어주었다. 대신, 목을 조르던 손을 바꿔 내 오른쪽 바닥에 뒹굴던 무언가를 잡아 던져버렸다. 유르하르드가 아니카를 범인으로 지목하기 위해 두었던 그 [가위]였다.
"이젠 진짜로, 얌전히 기절해주시죠."

─이거면 됐다.
내 진짜 목표는, [가위]가 아니었으니까.

아까부터 내 왼쪽 옆구리 쪽에서 느껴졌던, 얇은 금속의 느낌.
이제는 가져올 수 있다.
─내 왼손은 자유로워졌으니까.

나는 곧바로 옆구리 밑에 깔린 [그것]을 잡아꺼냈고, 자세가 바뀌면서 가까워진 유르하르드의 목 쪽을 노려 단번에 휘둘렀다.

─잿빛 머리 장식.
아니카가 남겨준 비장의 한 수였다.

푸욱─
"......!"
금속의 장식은 유르하르드의 경동맥을 꿰뚫었다. 아무리 기사라도, 급소에 가해지는 공격엔 취약할 수밖에 없다. 내가 명치를 맞고 고통스러워했듯이. 하지만─ 이번에도 유르하르드는 신음 한 번 내지 않았다.
그래도 유르하르드의 힘이 빠진 덕분에, 나는 그를 밀쳐내고 겨우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하악... 하아... 콜록! ... 하아..."
이럴 때가 아니다. 유르하르드는 아직 살아있다. 나는 곧바로 내 옆에 박혀있던, 게르단의 검을 뽑아 들었다.

"많은 걸 알고 있는─ 널 살려둘 수 없어."
상처 부위를 감싼 채 비틀거리는 유르하르드에게─ 검을 겨누며 말했다. 샤를로트로 되살아나며, 해가 될 이들은 반드시 죽이기로 마음먹었으니.
[블루 아웃]은 사용자 본인의 마나 소모가 극심하다. 나를 제압하기 위해 오랜 시간 [블루 아웃]을 사용했으니, 이제 그에게 남은 마나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에 비해 유르하르드로부터 떨어진 나는, 이제 마나를 자유롭게 쓸 수 있다.

검날을 따라─
[도화]가 피어났다.

푸른 [도화]의 검을 유르하르드에게 휘두르려는 찰나─.

"......"
─그와 눈이 마주쳤다.
유르하르드는 어떤 방어 자세도, 어떤 회피 준비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

나는 말없이 [도화]를 거두었다. 그냥 평범한 검날의 끝을 유르하르드를 향한 채, 천천히 걸어갔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오늘 유르하르드의 눈과 마주쳤을 때부터 계속 보였던 그의 [감정].

─[죄책감].

어느덧 유르하르드의 바로 앞까지 와버렸다. 나는 유르하르드의 심장 부근에 검 끝을 가져다 대었다. 그럼에도, 유르하르드는 그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다.

"... 대체 왜 미안해하는 건데?"

["─죽이지는 않겠습니다."]
─진심이었다. 나를 제압만 하려 했을 뿐.

["죄인이 준 검을─ 어찌 들고 다니겠습니까?"]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 그냥... 미안... 합니다... 릴리."

일전에도 들었던 말. 유르하르드가 찾아온 마지막 [면회]에서, 그는 사과 이후에 내게 눈을 마주치지 않았었다.
─사과 자체는 진실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릴... 리..."
경동맥의 상처로 인해 그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져 갔다.

"...... ─"
"......... ─"

유르하르드는 조용히─ 내게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거의 들리지도 않을 속삭임.
난 그것을 듣고─ 몇 마디의 말을 건넨 뒤─

─입술을 강하게 짓씹고, 가만히 서있는 유르하르드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었다.

푸욱─

"... 괜히 심란하게 만들고 있어."

***

"이제 괜찮다. 안심해라, 아니카."
암전의 지하 사무실. 루루와가 데려온 아니카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진정될 때까지 지켜봐 준 헤르카였다. 루루와 역시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헤르카는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아니카에게 자신의 옷을 입혀주었고, 이후 아니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헤르카... 샤를은?"
"... 싸우고 있다."
"뭐...? 상대는 상급 기사인데...?"
아니카가 몸을 일으켰다.
"혼자서는 안 될 거야. 뭐라도 도와야...!"

"아니."
헤르카는 아니카의 어깨를 잡고 다시 그녀를 눕혔다.
"유르하르드 정도면 루루와의 꼬리도 소용없다. 우리가 올라가도 샤를로트에겐 방해만 될 거다."
"하지만...!"

덜컥─.
두 사람이 실랑이를 하는 사이─ 사무실로 들어오는 문이 열렸다. 모습을 드러낸 건, 지쳐 쓰러지기 직전인 샤를로트였다.

"샤를─!"
아니카가 이불을 벗어 던지고 제일 먼저 달려들었다. 샤를로트에게 묻은 피와 얼룩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냥 냅다 안아버렸다. 덕분에 헤르카의 옷은 더러워져버렸다.
아니카에게 속박(?)당한 샤를로트는 문득 옆구리 쪽에 온기를 느꼈다. 루루와가 조용히 다가와 작은 손으로 꼭 잡은 것.
"뭐야, 이 목에 상처는? 기다려봐, 내가 약을─"
아니카는 뒤늦게 샤를로트의 목에 난 자국을 발견했다.
"괜찮아, 아니카. 금방 회복할 거야."
"정말? 별거 아닌 거 맞지? 다행이야!"
그리고 다시 껴안았다.
'... 무사했군.'
헤르카는 무신경한 척하지만, 속으로 깊은 안도를 하고 있었다.

"... 유르하르드는 죽었어."
샤를로트의 말을 듣고, 반쯤 감았던 헤르카의 눈이 뜨였다.
"... 그런가."

뭔가 잠깐 생각하더니, 헤르카는 조용히 커피를 타기 시작했다.
"딱히 노린 건 아닌데, 현장 자체는 게르단과 유르하르드가 치고 받고 싸운 것처럼 됐어. 아니카의 옷 조각들, 그리고 루루와의 털만 처리하면 될 거야. 두 사람끼리 동기도 충분하고."
샤를로트는 아니카가 혐의에서 벗어날 방법을 제안했다.
"게다가 영업 시간은 한참 지났으니, 이렇게 하면 아니카는 그저 다음날 와서 발견하는 [증인] 역할만 해주면 될 거야. '기사 두 사람이 언쟁했고, 저는 무서워서 먼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라고 하면 문제는 없어."
"샤를로트의 흔적은 지우지 않는 건가?"
헤르카가 커피를 마시며 물었다.
"... 내 죄는 내가 짊어져. 증거 조작도 사실 마음에 들지는 않아. 하지만 난 너희에게 명예를 맡겼으니까... 아니카랑 루루와가 피해보는 것도 싫고."
"샤를..."
아니카는 그제서야 샤를로트를 놓아주고, 그녀를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자, 샤를로트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니카─. 미안한데, 네 머리 장식..."
"응? 그게 왜?"
"─다음에 더 좋은 걸로 사줄게."
유르하르드의 경동맥에 꽂혔던 잿빛 머리 장식. 릴리와 샤를로트를 구했다지만, 주인에게 그런 걸 되돌려줄 수는 없었다.
"... 응! 기대할게! 고마워~"
다행히 아니카는 기쁜 마음으로 이해해주었다.

"그대 의견을 존중은 한다만, 그래도 염려가 되는군."
헤르카가 다시 말했다.

"만약, 그대가 유르하르드를 해친 범인이란 게 밝혀지면, 그때는 어찌할 거지? [정보의 바다]에서 그대의 신용은 떨어지고 말 텐데. 그렇게 되면 지금의 [리라이트] 작전도 소용이 없어질 거다."
합리적인 걱정. 하지만, 릴리에게는 생각이 있었다.
"그건 문제없어. 그걸 알아챌 정도의 탐정은─ 이제 세상에 없으니까."
"... 그도 그렇군."
헤르카는 납득한 듯, 다시 커피를 조금 마셨다. 그리고 잠깐의 생각 이후에, 결론을 내었다.
"─당분간 술집 영업은 하지 않는다. 아니카도 내일 [증인] 역할만 간단하게 한 뒤, 사건이 조용해질 때까지 사무실에서 쉴 수 있도록."
아니카는 집이 따로 있지만, 헤르카는 아니카가 암전의 비밀 사무실에서 지낼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비밀통로는 절대로 이용하지 않는다. 일전의 자금으로 [역소환 마도구]가 충분히 보급되었으니, 밖에 있는 페이시로부터 생필품을 조달 받는다."
등잔 밑이 어두운 것이니, 헤르카의 작전대로라면 암전의 비밀 사무실은 들킬 일이 없을 것이다.

"헤르카."
짧은 시간에 합리적인 결정을 내린 헤르카에게, 샤를로트가 조용히 말을 걸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브이 표시를 하고 있었다.
"... 뭐지."
"... 이걸로 너도, 만족했으면 좋겠네."
─유르하르드의 [마녀사냥]과 릴리의 잘못된 추리로, 레드 라이트에 있던 헤르카의 연인은 목숨을 잃었다.


"...... 고맙군."
─그리고 이미, 릴리를 용서한 모양이다.

"그리고 하나 더─"
샤를로트의 손가락은 두 개가 펼쳐진 상태. 아직 한 가지 더 할 말이 있다는 의미였다.

"중요한 정보야. 유르하르드가 죽기 전에 남겨둔─"

***

릴리가 탈옥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르코는 본인이 알고 있다며 곧장 어딘가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르코로부터 릴리를 사살했다는 연락을 들었다.

장소는 베라트 산 어귀. 나의 [가속]이라면, 다른 이들이 오기 전에 도착할 수 있다.

"유르하르드 씨, 오셨어요?"

차가운 돌바닥 위로, 죄수복을 걸친 검은 머리의 여성이 쓰러져있다. 그녀의 가슴 쪽에서 흘러나온 피는 아직도 굳지 않았다. 덥수룩한 장발 사이로 슬며시 비치는 파란 눈에는─
─이미 빛이 사라져있었다.

"... 뒤처리는 제가 하겠습니다."


그날, 나는 릴리의 시신을 수습했다.
그녀가 죽어서도─ 고통받지 않도록.

*

릴리. 간만에 당신 생각을 하다보니, 오늘은 저도 모르게 당신 흉내를 내고 있더군요. 어떤 형태로든 살아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 당신을─ 숙청당하기 전에 다시 만나고 싶었습니다.

["숙청당하겠지. 기사 개인이 [날개]를 막지는 못할 테니까."]

이대로 가면 결과는 뻔합니다. 그래서 저는, 저를 죽이려고 하는 기사를 데리고, 당신을 만날 계획을 세운 겁니다. 어떻게든 사건을 일으키면, 현실에서 탐정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죠. 이런 식으로 성공할 줄은 전혀 몰랐지만 말입니다.

["근데 왜 날 만나고 싶어 한 거야? 넌 릴리를 죽게 했잖아."]

할 말이 있었습니다.

그레이 백작 부부를 살해한 건, 이단심판관 '아이리스'와 당신의 조수인 르코입니다. '칼리자르 베켄하임' 공작의 주도 하에 [절후회]에서 당신을 비롯한 그레이 가를 처리하라는 지시가 내려왔고, 아이리스와 르코는 탐정 사무실에 [조작된 증거]를 심어두러 간 것입니다. 그러는 도중에 백작 부부가 방문하였고─


["그 이야기를 대체 왜 이제서야 하는 거야?"]

당신은, 유일하게 제 속마음을 알고 이해해준 사람입니다. 그런 탐정에게 느낀─ 이기적인 [죄책감]일 뿐입니다.

["하─ 그런 녀석이 플로라를 팔아넘기고, [마녀사냥]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준 거야?"]

저는 명예를 쓰레기들에게 맡겨버린 기사. 명령을 저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마지막까지 핑계일 뿐이지만, 그냥 진작에 목숨을 저버리는 것이 명예로웠을지도 모르겠군요. 사실 오늘도 당신에게 할 말을 전한 뒤, 자살하려 했습니다.

["......"]

탐정으로서의 당신─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제가 [절후회] 같은 쓰레기장에 속하지 않았다면, 당신과 더 좋은 사이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 이미지 세탁 하지마. 그리고 나 말고도, 지옥에 가서 모든 이들에게 사과해."]

─맞... 습니다. 저 역시도... 쓰레기장에 있... 던... ─ ...

쓰레기니까... 요...

['푸욱─']


......

["...... 괜히 심란하게 만들고 있어."]

......

...

["...... 잘 가."]



yes24, 북센, 알라딘에 검색하면 단행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브런치에 올라온 것과 내용은 똑같고, 대신에 미공개 일러스트와 본편에 나오지 않은 설정 등의 내용이 추가된 굿즈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