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전의 사무실. 테이블 옆에 놓인 가열형 마도구와 수많은 원두 봉지들. 평소라면 커피를 끓이는 이는 헤르카였을 테지만, 오늘만큼은 그 역할을 아니카가 맡았다.
"이 비율로 계속 넣을게?"
아니카는 헤르카가 일러준 대로 원두와 물의 비율을 맞춰 [약커피]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헤르카는 자신이 마시는 커피의 이름을 '약커피'라고 지었다. 릴리와 샤를로트─ 두 사람의 인생을 살아왔지만, 헤르카만큼이나 작명 센스가 별로인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아니카가 술집의 조리실에서 가져온 큰 통. 깨끗이 씻은 통 안에, 막 끓인 커피가 부어진다. 그리고 통에서부터 뻗어져 나온 기나긴 빨대. 그리고 빨대의 반대쪽 끝부분은─
"그럼, 시작하지."
─헤르카가 입에 물고 있었다.
헤르카는 이런 상태(?)로 나와 함께 [인신매매 극단 사건]의 리라이트를 진행할 것이다.
레드 라이트 이야기를 하다보면 헤르카의 과거 기억과 감정이 극대화될 수 있으니까, 이런 조치(?)는 필수불가결이다.
뭐─ 확실히─
그림이 이상하긴 하지만.
['셰로키 스트리트의 인신매매 극단. 낮에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공연을 하며 납치. 밤에는 경매를 통해 아이들을 판매─']
"─그 당시 릴리가 내린 결론이야. 그 당시 탐정의 발언은, 레드 라이트가 유죄를 판결 받을 좋은 증거가 됐겠지."
─물론 릴리 역시도 거짓 정보에 속은 거였고, 실제로 레드 라이트는 무죄였지만.
"...... 어떤 자료들이 그대에게 갔길래, 그런 결론이 나온 거지?"
헤르카는 다량의 커피를 빨아들이며 질문했다. 그녀의 표정에서는 조금씩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오는 게 보였으나, 헤르카 자신이 어떻게든 침착함을 유지하려하고 있었다.
"그때 받았던 자료 중에 [증거] 역할을 했던 건, 두 개였어."
이번에는 난 손가락을 펼치지 않았다.
"하나─ 극단이 뿌린 전단지의 내용. 시간대와 연령대에 따라 두 가지 공연을 바꿔가며 진행한다고 나와 있었어. 낮에는 어린 아이를 대상으로, 밤에는 성인을 대상으로 말이야."
"─실제 전단지였나."
"아니. '그런 전단지가 있다'라는 보고서였어."
"─극단의 이름은 확인하지 않았던 것인가."
"확인은 했어. 다만... 릴리의 기억력이 좋은 편은 아니라서 말이지."
이야기의 흐름은 기억해도, 인명이나 지명 같은 고유명사는 잘 기억 못하는 편이었다.
"애초에 릴리를 [마녀사냥]할 때 레드 라이트를 범죄조직이라고 했었으니까, 보고서의 극단명도 가짜를 썼을 가능성이 높아. 나중에 우연이라도 내가 진짜 [레드 라이트]의 전단지를 접하게 된다면 그들 입장에서도 일이 골치 아파질 테니까."
지금 생각하면, 탐정이라는 간판을 내세웠으면서도 정작 출처와 근거는 살펴보지도 않았다. 극단의 이름도 조금만 조사하면 가짜임을 확인할 수도 있었다. 실제 전단지도 아니고, 조작될 가능성이 높은 문서였음에도─ 릴리는 의심하지 않았었다.
"... 탐정 실격이네. 충분히 의심할만했는데."
"상관없다. 이제라도 다시 쓰는 거다."
헤르카는 쌓아놓은 자료들 사이에서 낡은 종이 한 장을 꺼내들었다.
"이건?"
"그게 진짜다."
중앙의 무대 사진 주변으로 개성 있게 꾸민 배우들의 모습이 둘러져있는 형태의 구성. 색감 자체는 수수하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관람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디자인. 헤르카가 내게 건넨 건, 레드 라이트 극단의 정보가 담긴 실제 전단지였다.
"...... 같은 내용을 전연령 대상으로 1일 3회 공연."
나는 전단지에 적힌 [진실]을 읽었다.
"... 관람료도 적혀 있구나."
싸진 않지만, 1시간의 여흥을 사기엔 적당한 가격의 관람료.
아이들을 납치해서 인신매매를 하려면, 연고가 없는 거리의 부랑아들을 대상으로 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료 관람이 필수였어야 했다.
"직접 보는 거로, 바로 해결되는 거였네."
그저 미안했다. 전단지 속의 배우들은 이미 릴리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다 죽은 사람들일 것이고─ ... 이 사람이구나. 꽤나 훈훈하게 생긴─ 헤르카의 소중한 사람.
나의 자책에 가까운 [성찰]에─ 헤르카는 슬픈 표정으로 커피를 들이켰다.
"됐다. 그대의 탓이 아니다. ... 지금은 그렇게 생각한다."
"... 고마워, 헤르카."
─분명 과거 기억과 감정들을 억누르면서, 날 위해 위로해주는 거겠지.
"그럼 두 번째는 뭐지? 그대가 말했던 가짜 증거."
헤르카는 빨대를 입에 문 채, 나 대신 손가락 두 개를 앞으로 펼쳐보였다.
"... 둘─. 아이들을 매매한 장부. 인신매매가 일어났던 기록을 확인했어."
"그게 진짜라면, 확실한 증거가 맞겠군. 하지만 레드 라이트의 진짜 장부도 내가 가지고 있다."
헤르카는 다시 한번, 쌓아놓은 자료들 사이에서 파일철을 꺼냈다. 그 내용은─ 매일 관람료를 통해 평범한 수익을 얻었다는 것이었다. ─레드 라이트가 무죄라는 명백한 증거.
"... 음?"
하지만 이번에는 단순히 [검증]에서만 끝나지 않았다.
"왜 그러지?"
"장부에 적힌 제이어드... 이 사람은 누구야?"
"... 레드 라이트 극단의 총무다."
헤르카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변했다. 이 사람이 헤르카의 연인이구나. ... 아니카 역시도 그 이름을 알고 있는지, 헤르카가 트라우마에 빠지지 않도록 서둘러 커피를 통에 부었다. ... 그래도 물어볼 건 물어봐야 한다.
"─원래 장부에는 파는 사람의 이름이 적히는 거야?"
"탐정직이라면 모를만하군. 소비자는 여럿이기에 보통은 적어두지 않지만, 판매자의 이름과 정보는 장부에 필수적으로 표기되어야 한다. 게다가 장부에는 [소유권] 마법을 걸어두어야 하니, 기재하지 않았더라도 누구의 소유인지 확인이 가능하다."
헤르카의 말을 듣고, 장부에 마나를 흘려보내보았다. [소유권]을 열람해보니, '제이어드'의 정보가 선명하게 보여졌다.
"그럼─ 파는 사람의 이름이 없고 거래내역만 있다면, 그건 어떤 경우야?"
"조작된 장부이거나, 비밀거래라서 일부러 숨겨두었거나... 일 것이다."
"릴리가 봤던 장부 자체는 꾸며낸 가짜가 아니었어."
"... 그게 무슨─"
"─[인장]도 있고, [소유권]도 확실하게 걸린 거로 기억해."
[소유권]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해당 물체에 마나를 흘려보내야만 한다. 마나결핍증에 시달렸던 릴리였기에 그 당시에는 파는 사람의 정보를 열람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소유권] 자체는 걸려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게다가─ 당시에 [관찰]로는, 장부가 진짜라는 [인장]까지 확인했다. 인장은 단순한 개념이 아닌 법칙으로, 이건─ 결코 조작할 수 없는 것이었다.
─새로운 가능성을 [추리]해버렸다.
"헤르카. 인신매매 자체는─ 실제로 이루어진 것 같아."
"확실히... 장부가 진짜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겠군. [마녀사냥]은─ 있던 죄를 떠넘기는 거였지, 없던 죄를 만들어내지는 않았으니까. 그럼, 그대가 보았던 그 장부는 [진범]이 사용했던 것이란 말인가?"
헤르카는 핵심을 파악했다.
"맞아. 그때, 나는 '그 녀석' 말만 믿고 장부의 출처가 극단인 줄 알았거든. 릴리가 마나결핍증인 걸 이용해서 과감하게 속이려고 한 것 같아."
"... 그렇다면, 그때의 장부를 찾아야하는 거로군."
"그래. 장부를 찾아서 [소유권]을 열람하면, 아이들을 판매한 [진범]을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럼 그 장부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가?"
"... 페이시가, 그 당시 사건 담당자가 유르하르드라고 했었지?"
나는 질문에 질문으로 답했다.
"... 그렇다."
"실제로도 그랬지. ... 그런데 내 기억 속 당시는 좀 달라."
["인신매매 극단이라고? 그렇게 큰 사건인데 왜 유르하르드 경이 직접 안 온 거야?"
"기사들이 눈치채기 전에 제가 직접 조사해서 구해온 거니까요. 탐정님. 이번 사건은 제가 활약하게 해달라구요!"]
"릴리에게 자료를 가져온 건 조수였어. 유르하르드가 담당이었던 건 형식적인 걸 거야. 대부분은 조수가 다 했겠지."
"릴리 탐정사무소의 조수, 르코 말인가..."
"욕심이 많은 그 녀석이 스스로 나설 정도면, 인신매매 자체는 꽤나 높은 귀족과 관련이 되어있다는 의미일 거고."
─잘만 하면 이번 건으로 [절후회]에 큰 타격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헤르카 역시도 내 말의 의미를 이해한 듯, 입에 물었던 빨대를 이제서야 떼었다.
"그나저나─ 들켰을 때 자칫하면 위험해질 수도 있는 장부를 맡기다니... 그대의 조수는 [절후회]에 충성심이 꽤나 높았나 보군."
"─난 그런 조수 없어."
단호한 내 대답에 헤르카의 눈이 살짝 커졌다.
"... 실언했다. 사과하지."
"... 아무튼, 그러니까─ 르코. 그 녀석을 찾아야겠어. 자료 정리도 잘해두는 편이고, 이미 봤던 자료도 릴리가 원할 때마다 금방 다시 가져왔으니까─ 아직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커."
"릴리 탐정사무소에 있을 가능성은 없는가?"
"일단 확인은 해봐야겠지. 그런데 내 비상금까지 털린 마당에, 탐정사무소에 두었을 확률은 적은 편이야. 어제 페이시랑 직접 가봤을 때도 별거 없었고."
"그럼 르코가 사는 곳을 위주로 조사해봐야겠군. ... 루루와가 나으면 진행하도록 하지."
"... 아니. 내가 할게. 나 혼자서 하게 해줘."
"위험하다. 릴리는 이미 르코에게 목숨을 한 번 잃었지 않나."
"위험한 건 루루와도 마찬가지야. 그 녀석도 아이리스처럼 총을 쓰는데, 루루와가 또 위험해질 수 있어. 게다가 더 이상 내가 해야할 일을 떠넘기고 싶지는 않아. 내가 명예를 맡긴 건 암전이고, 루루와 역시도 암전에 포함이잖아?"
"... 내가 보기엔 그대가 더 걱정이다. 하이젠베르크 저택에서도 루루와를 보내고 혼자 해결하려했지 않았나."
"그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내가 끝내야 할 이야기인 걸. 그리고... ─나도 생각이 있어."
"그건─"
헤르카는 잠깐의 침묵 이후, 이전에도 본 적 없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질문을 이었다.
"─릴리의 생각인가? 아니면 샤를로트의 생각인가?"
옆에서 지켜보던 아니카는 갸우뚱했다. 헤르카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달은 건─
오직 나뿐이었다.
죽고 싶었던 릴리와, 살고 싶어했던 샤를로트.
"당연히─"
이제는 내게 소중한 사람들이 있다. 헤르카를 비롯한 암전의 모두를 위해서라도─ 무사히 살아 돌아올 것이다."
"─샤를로트의 생각이지."
"... 그럼 됐다. 작전에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도록."
헤르카의 진지한 표정은 어느새 [안심]으로 변해있었다.
"걱정하지마. 반드시 성공할 테니까."
어떻게 묶었는지 모를 매듭처럼, 억지로 이어진 릴리의 이야기.
샤를로트는 그 매듭을, 끊을 생각이 없다.
yes24, 북센, 알라딘에 검색하면 단행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브런치에 올라온 것과 내용은 똑같고, 대신에 미공개 일러스트와 본편에 나오지 않은 설정 등의 내용이 추가된 굿즈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