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색의 매듭 16화

by 도토리

"발 로베르트 공작도 숙청당했습니다."

페이시가 말했다. 지금까지는 아카데미의 교수직과 암전의 정보원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느라 바쁜 그녀였지만, 아카데미에 방학이 찾아오면서 간만에 암전의 사무실에 직접 찾아온 것.

"─시위 중인 기사와 시민들에 의해 [처형]당했다더군요."

"교회도 마찬가지야. 교황이 직접 엘나스 추기경을 파문했다나봐. 시민들의 알 권리를 빼앗은 데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말이야."

아니카도 페이시와 마찬가지로 정보를 구해왔다. 교황까지 나선 것은 의외였다. 신도들이 다같이 부패척결이라는 목소리를 내는 상황에서는, 관조자에 불과한 교황마저 개입할 수밖에 없었나보다.


덕분에 [절후회]는 순조롭게 무너지고 있었다.

─베켄하임 공작의 계획대로 말이다.


"그들마저 [꼬리]로 취급하는가..."

헤르카는 커피를 마시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절후회]는 이번의 [르코 건]으로 타격을 받았어야 했다. 발 로베르트 공작이 아이들을 납치 및 판매하고 칼리자르 베켄하임 공작이 아이들을 구입했다는 결정적인 증거─, [장부]가 [정보의 바다]에 공개되었으니까. 하지만 [절후회]의 [머리]인 베켄하임은 이미 극단적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거리의 시민들이 [정보의 바다] 자체를 이용 못하게 한 것. 정확히는─ 단말기형 마도구의 소지와 유통을 금지시킨 것이다. 귀족의 권력과 사병의 무력을 내세우면서.

그로 인해 [인신매매 극단 사건]의 리라이트와 [장부]의 내용은 퍼지지 못했다. [날개]가 완전히 펼쳐지기도 전에─ 언론통제가 이루어졌으니까. 게다가 이러한 언론통제의 주범을 교회의 엘나스 추기경과 로베르트 공작으로 만들었다. 뜻을 같이한 이들은 내어주면서 자신의 죄는 숨기다니─. 이보다 완벽한 [꼬리 자르기]는 없을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릴리."

헤르카와 눈이 마주쳤다. 샤를로트가 아닌 릴리를 부르는 헤르카. 그녀는 탐정 릴리에게 의견을 구하고 있었다.

"... 로베르트도 죽었고, 베켄하임도 발을 빼는 상황이라면─ 사실상 [절후회]는 제 기능을 다한 거야. 그러니 그쪽은 더 건드릴 필요가 없겠지."

"그렇다면 칼리자르 베켄하임. 그 자는 어찌하면 되겠는가."

"[정보의 바다]를 활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굳이 고발해서 무너뜨리기보다는, 우리가 사적으로 그를 처리하는 게 효율적이겠지? 드나르 하이젠베르크 때처럼."

─그냥 칼리자르 베켄하임을 암살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아마 헤르카도 여기까지는 생각해두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다음 작전으로 넘어간다. ... 그, ... [폭탄]을 만들어두도록."]

그래서 라키에게 폭탄 제작을 부탁한 것일 테지. 이미 그 시점에서 헤르카는, [절후회]의 [머리]를 직접 잘라낼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그녀는 유능한 [리더]니까─ 다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굳이 내게 의견을 묻는다는 건─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거지?"

"... 그렇다."

헤르카가 신경 쓰는 부분. 그건 바로─

"'─의미 없는 시간벌이' ─라고 생각한 거지?"

헤르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시민들에게 단말기형 마도구를 빼앗아도, [절후회]가 제 기능을 못하는 이상 사람들이 다시 [정보의 바다]를 이용하게 되는 건 시간문제다. 그때가 되면 [장부]도 모든 이들이 보게 될 것이고, 베켄하임의 죄도 드러나게 된다.

"칼리자르 베켄하임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다. [절후회]를 버리면서까지 대체 뭘 노리는 건지... 감이 안 잡히는군."

그렇게 말한 헤르카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생각과 사고가 저해되는 [약커피]를 마시면서 저런 말을 하는 거면...


─내가 이미 답을 알고 있다고 보는 거겠지?


그녀의 표정에서 명백히 읽히는 [기대]. 이건 다 릴리를 신뢰하기에 있을 수 있는 감정. 실제로도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설마 몰랐을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이번의 [스토리텔링]은 [기대]와 거리가 멀 텐데.

... 그래도─


─이야기가 만들어지려면 해야 한다.


"힌트는 두 가지야."

나는 손가락 두 개를 펼쳐보였다.


"하나─ 베켄하임이 아이들을 사들인 이유. 어째서 베켄하임은 [장부]에 기록이 남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아이들을 사들인 걸까?"

"유흥을 위한 게 아니었던 건가."

"단순히 유흥을 위한 거라면 노예 경매장이나 형식적인 입양처럼 비교적 합법적인 방법도 있었을 텐데?"

"... 확실히 그렇군."

"실제로 베켄하임 공작은 노예 경매장을 자주 이용했습니다."

페이시가 거들었다.

"고아원이나 보육원도 자주 방문한 모양이야. 예전에 술집에서 손님들에게 들었어."

아니카도 거들었다.

"그래. 베켄하임은 그런 식으로 아이들을 데려오고 있었던 거야. 그걸로도 부족해서 굳이 거리의 부랑아들까지 납치를 종용하고 사들인 거지. 그가 필요로 했던 건 일손이나 장난감이 아니야."

─거기서 떠올릴 수 있는 가능성은 한 가지다.

"─[소모품]이지. 실험이든, 유흥이든, 대량의 아이들을 [소모]할 필요가 있었던 거야."

지금 생각해보면, 수많은 [마녀사냥]도 결국 부모를 잃은 고아들을 만들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 역겹군."

루루와와 페이시, 아니카도 헤르카와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그 많은 아이들한테...?"

아니카가 양손을 입에 모은 채 물었다.


"둘─. [절후회]의 목적을 생각해보면, 답은 나와."

나는 대답 대신 [스토리텔링]을 이었다.

"기득권층의 유지. 그리고 대항 세력 척결."

헤르카가 바로 답을 말해주었다.

"그래. 그 두 목적을 이루기 위한 근본적인 방법이 뭐겠어?"

"... 압도적인 힘과 공포."

이번에도 헤르카는 답을 맞혔다.


수많은 아이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베켄하임이 이루고자 했던 것. 그건 바로─

"반영구 골렘과 페톨리움도 결국은 생명 에너지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거잖아? 그거랑 마찬가지로─ 아이들의 생명을 이용해 비윤리적인 전투병기같은 걸 만들려고 한 걸 거야."

─힘을 통한 지배였다.


기득권층의 유지? 모든 권력은 힘으로부터 나온다.

대항 세력 척결? 강한 힘 앞에서는 그 누구도 대항할 수 없다.


[장부]가 공개된다 하더라도─

강대한 억지력을 지닌 베켄하임을 재판장에 세울 수 없다.


"이미 목적을 이룰 수단을 마련했으니까─ [절후회]도 더 필요 없는 거겠지. 그리고 우리가 베켄하임을 암살하려고 해도, 정체모를 전투병기가 있는 이상 섣불리 접근할 수 없을 거야."

─이것이 헤르카가 신경 쓰고 마음에 걸려하던 부분이다.


"...... [장부]에 적힌 아이들만 봐도 백 이상의 단위였다."

헤르카는 남은 커피를 전부 입에 부어넣듯이 마셨다. 내가 말한 [추리]의 결과가 그만큼 충격적이었겠지.

"─장부가 르코의 손에 넘어간 이후에도 계속 매매가 이루어졌다면 그 수는 더 많을 거야."

"그 외에도 경매나 입양을 통해 들어온 아이들까지 생각하면─ 못해도 천 단위까지는 가겠네요."

페이시도 눈을 질끈 감고 구겨진 표정으로 말했다.

"으으... 우욱..."

아니카는 속이 안 좋아졌는지 구역질을 시작했다. 루루와는 재빨리 사무실 한 구석에 있던 큰 통을 가져와 아니카의 앞에 받쳐주었다.


"... 터무니없군."

헤르카는 새로운 커피를 들이켜며 말했다. 확실히─ 천 명 이상의 아이들을 죽여 [병기]를 만든다는 건, 근거가 있음에도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 그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나. 그래서 덤덤한 것인가."

나를 제외한 모두의 표정은 어두웠다.

[암전]은 불이 꺼진 어둠 속에서 세상을 바꾸기 위한 조직. 바뀐 세상을 선물 받아야 할 1순위는 다름 아닌 '어린 아이들'이었으니까.


"나도─ ... 내 [추리]가 틀렸으면 했어."

나 역시도 수많은 아이들의 죽음에 충격을 받지 않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야. 과거의 일에 자책만 하고 있으면, 이야기는 나아갈 수 없으니까."

이 말은 나 스스로에 대한 [성찰]이기도 했다. 과거의 나는 스스로를 포기하며 죽은 탐정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하자. 불은 이미 꺼졌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암전에서 새 삶을 찾은 기사.

"이전의 무대는 치우고, 새롭게 바꿔 놓자. 우리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사무실의 모두를 둘러보았다. 푸른 빛을 머금은 벽안에 모두를 담으며─

"─[암전]이잖아?"

─간만에 진짜 미소를 지었다.


*


"전투병기라 하면, 구체적으로 어떤 거라고 생각하나?

헤르카가 물었다.

"거기까지는 모르겠어. 거대한 마도병기를 만들었을 수도 있고, 사병의 무기를 강화시켰을 수도 있고, 사병의 신체 자체를 강화했을 수도 있고, 인조인간을 만들어 대량의 군대를 만들었을 수도 있고─ ..."

아무리 릴리라도 이건 확실하게 맞출 수는 없다. 내가 직접 베켄하임 공작저를 확인한 게 아니니까.

"... 금방 다 그리겠습니다."

페이시는 테이블의 한 쪽에서 흑백으로 공작저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녀는 이 중에서 베켄하임 공작저 외부를 둘러본 유일한 사람이니까.

지금까지 그려진 세 개의 종이가 테이블 위에 펼쳐져 있는 상태.

"... 아직까지 잘 모르겠는데."

하이젠베르크 때와는 다르게 내부는 알 수 없고 보이는 건 겉모습뿐.

─그래도 단서를 최대한 찾아내야 한다.

"샤를! 화이팅! 이번에도 찾을 수 있어!"

─나를 믿어주는 동료가 있으니까.


*


"......"

"고생했음."

"큰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해..."

서른하고도 두 장의─ 사진과도 같은 그림을 그려낸 페이시는 사무실 구석에서 아니카와 루루와에게 손 마사지를 받고 있다.

그만큼 힘든 작업이었으니까.


"알아냈는가."

"... 눈에 띠는 점이 없다는 거?"

"......"

멀리 있는 페이시에게서 [허탈함]이 읽혔다. ... 뭐,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하나의 단서긴 하니까.

"... 마도병기든, 무기 강화든, 인조인간이든─ 겉으로 보이는 곳에 두지 않았겠지. 그림을 보면 확실해. 보이는 곳에 단서가 없다면,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는 의미겠지. 분명 지하에 뭔가 있어."

나는 일부러 페이시가 듣도록 크게 말했다.


"그리고 추측일 뿐이지만, [정보의 바다]를 못쓰게 한 걸 보면─ 아직 완전하게 준비된 건 아닐 거야. 아주─ 약간의─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아."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군. 그 '약간의 시간' 동안, 병기를 막거나 피해낼 방법을 찾으면 되겠어."

"아니면, 조금 극단적인 방법도 있어. ... 헤르카. 원래는 라키의 폭탄으로 베켄하임만 암살할 생각이었지?"

"... 그렇다."

"그거 더 많이 만들어달라고 전해줘."

내 부탁에 헤르카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녀의 표정에서는 굳이 [읽기]를 하지 않아도 황당했음을 알 수 있었다.

"설마─ '다른 방법'이란 건─ ..."

"그래. 헤르카가 생각하는 그거 맞아."


병기를 막거나 피해낼 수 없다면─


"지하 채로 다 날려버리자."


─병기 자체를 없애버리면 된다.



yes24, 북센, 알라딘에 검색하면 단행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브런치에 올라온 것과 내용은 똑같고, 대신에 미공개 일러스트와 본편에 나오지 않은 설정 등의 내용이 추가된 굿즈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