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색의 매듭 19화

by 도토리

"헤르카! 샤를!"

지하 1층의 술집에 들어서자마자 나와 헤르카를 반겨주는 아니카. 늘 그렇듯, 그녀는 돌아온 사람을 한 번씩 껴안아주었다.

"고생 많았어. 정말로... 우리 다 해낸 거지?"

"... 그렇다."

헤르카의 입가에서 자연스러운 미소가 보였다.

"아니카도 수고했다. 덕분에 불필요한 희생을 줄일 수 있었으니."

아니카도 이번 작전에 나름대로 고생을 많이 했었다. 베켄하임 공작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전부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폭발에 휘말리지 않도록 조용히 대피시키는 건 아니카의 몫이었다.

"그리고...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안 돼서, 주변에 사는 사람들 모두 몰래몰래 도망치게 했단 말이야. 라키의 폭탄은 매번 강해지니까..."

아니카는 술집의 바테이블 쪽에 앉아있는 라키를 흘겨보며 말했다. 라키는 우리 쪽을 신경도 안 쓴 채, 여러 가지 종류의 술들을 섞으면서 뭔가를 하고 있었다. 왼손만으로 현란하게 병들을 집어 옮기는 라키. 히죽히죽 웃고 침을 흘리면서─ ...


... 어라? 잔에서 뭐가 끓어오르고 있는데?


퍽!

"아얏! 무슨 짓이죠?"

주먹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린 라키.

"연구실 밖에서는 삼가 주시죠, 주인님."

라키의 하녀, 리스도 술집에 와있었다. 리스는 천으로 입과 코를 막은 채, 라키가 만들던 액체들을 버리려 밖으로 이동했다.


"... 추태를 부렸군요. 미안해요."

그제서야 헤르카를 발견한 라키였다.

"내가 말하지 않았는가. 허락 없이 연구하지 말라고."

헤르카가 한숨과 함께 라키를 나무랐다.

"... 잊은 건가. [절후회]가 무너지더라도, 그대의 지명수배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음? 저건 또 무슨 말이지?

"...... 연구의 자유를 보장해주세요."

라키는 고개를 푹 숙이며 중얼거렸다.


지명수배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건─ [절후회]의 [마녀사냥]과 관계없이 진짜 범죄를 저질렀다는 의미인가?

"아니카. 라키는 대체 뭔 짓을 한 거야?"

나는 옆에 있던 아니카에게 조심스레 물어봤다.

"... 이상한 실험하다가 거리 한복판에서 폭발을 일으켰어."


뭐야. 평범한 라키잖아.

... 혹시 오른팔이 없는 것도─

"─그때 폭발로 팔을 잃었고."

"......"

세상을 바꾸는 건, 미친 사람이 맞나 보다.


"... 루루와는?"

"여기있음."

"우왓─"

─깜짝이야.

어느새 내 옆에 기척도 없이 나타난 루루와였다. 라키가 바테이블에서 실험(?)하는 동안 숨어있던 건가?

"샤를로트, 뚜껑."

루루와의 손에는 사탕이 담긴 상자가 두 개 들려있었다. 뭐─ 오늘처럼 고생한 날은 여러 개 먹어도 크게 상관은 없지.

나는 양 볼이 사탕으로 부푼 루루와를 상상하며, 두 상자의 뚜껑을 열어주었다. 양손으로 사탕 두 개를 건네받은 루루와는, 나를 빤히 보더니─

"... 선물."

─한쪽을 다시 건넸다.

"... 내가 먹어도 돼?"

"......"

루루와는 말없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루루~"

옆에서 다 지켜보던 아니카는 루루와의 행동이 귀여웠는지, 루루와를 와락 안아버렸다.

뭐─ 나도 루루와가 사탕을 준다는 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으니까.


루루와에게 받은 사탕을 입 안에 머금었다.

시원한 감촉은 혀 위를 맴돌고─

이내 녹아내리면서 사과향이 퍼져나갔다.


정말로─

살아서 다행이다.


***


아카데미 쪽 시위에 같이 참여한 페이시는 오후 늦게가 되어서야 암전의 건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우리가 베켄하임 저택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거리의 시민과 하급기사들의 움직임을 절묘하게 통제하는 역할이 필요했으니까.


"클로에 씨와 네리힐 씨도 합류한 덕분에, 더 많은 시민들이 참여해주었습니다. 그 결과는─"

페이시는 헤르카에게만 조용히 말하다가, 암전의 모두를 향해 시선을 옮기고는 이어서 말했다.

"─'[절후회]와 [마녀사냥]의 존재를 인정. 그리고 관련된 이들의 처벌 및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입니다."

─암전의 목적이 달성되었다.


"꺄아~"

"해냄! 해냄!"

아니카와 루루와가 높은 텐션으로 기뻐했다. 헤르카와 라키는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표정에서 [기쁨]이 읽혔다. 그리고 나 역시도─

미소를 짓고 말았다.


드나르에게 당한 클로에 레안의 치료는 무사히 끝났고, 로베르트 공작에게 노예로 잡혀있던 네리힐 역시 해방되었다. 직접 피해를 입은 이들도 참여하여 목소리를 내준 덕분에, 부패 세력을 무너뜨리는 시위는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다.

페이시의 이후 설명에 따르면─ 거리의 시민들에게 단말기형 마도구가 다시 보급되었다고 한다. 이제 사람들은 [정보의 바다]를 다시 사용할 수 있다. 물론─ 암전에서 만들어진 [날개]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을 것이다.

베켄하임 가에 발생한 테러는─ 저택에서 이상한 실험을 진행하던 베켄하임이 뭘 잘못 건드린 것으로 결과가 내려졌다. 아니카가 대피시킨 사람들 대부분은 베켄하임에게 반감을 가진 이들이었고, '칼리자르 베켄하임이 저택 지하에서 위험한 일을 꾸몄다'라는 증언을 해준 덕분에─

─조사하던 기사들은 사고로 결론지었다.

베켄하임의 남은 시신도 라키의 폭탄으로 처리했으니,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그걸 알아낼 탐정은─ 나 말고 없으니까.


"그럼─ 우리는 이제 사무실로 돌아가지. 시위도 성공적으로 끝났으니, 사람들이 술집으로 몰리지 않겠는가."

헤르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카가 헤르카의 팔을 붙잡으며 물었다. 헤르카가 대답하기 전에, 아니카는 출입구 쪽으로 총총거리며 가서 [Closed] 간판을 걸어두고, 세상 밝은 미소를 지으며 우리 모두를 둘러보았다.

"오늘 술집은 휴업이야. 우리끼리 한잔하자!"

"... 그래. 그렇게 하지."

헤르카는 못 이기는 척─ 어쩔 수 없다는 척─ 아니카의 의견을 받아주었다.


그럼 뭐해.

처음부터 회식하고 싶어했던 표정이었는데.


뭐─ 그게 헤르카의 매력이겠지.


*


자정이 넘어가도록, 술집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넓은 공간에 일곱 명뿐이지만, 높은 텐션과 분위기는 사그라들 줄 몰랐다. 그 텐션의 대부분은 아니카와 라키가 내뿜고 있는 것이었지만─.


"라키~~ 나 한 잔 더 말아줘~!"

"저만 믿어주세요~ 흐으... 하앗...!"

아니카는 라키가 말아주는 폭탄주를 주는 대로 마시고 있었다.

바테이블 위로 올려둔 잔 위로 오직 왼손만 사용하며 새로운 비율의 술을 제조하는 라키. 공학을 연구하는 사람이라 그런가─, 폭탄만큼이나 폭탄주도 잘 만들어내는 라키였다.

"캬아~ 어떻게 마실 때마다 맛이 달라질까? 한 잔 더!"

"좋아요~ 아니카가 마셔줄 때마다 저는... 꺄흑!"

...... 저 술고래와 변태를 어찌하면 좋을까.


"─헤르카는 어때요? 다른 맛 도전해볼래요?"

라키는 이번에 헤르카를 보며 술을 권했다.

"아니. 난 그대로 가지."

헤르카가 마시는 술은, [약커피]의 원두가 들어간 알코올. 비율은 라키가 맞게 말아주었다.

"여기요~ 맛이 질리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라키는 언제 챙겨왔는지 모를 비커를 사용해 헤르카만의 술을 제조해내었다. 그리고 헤르카는 묵묵히 잔을 받아들고 그대로 마셔버렸다. 아니카만큼은 아니지만, 헤르카도 술을 꽤나 잘 마시는 타입이었다.

"... 음주하면서 약 먹어도 되는 거야?"

암전의 첫 회식 이후로 술을 먹어본 적이 없었기에,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 내가 비록 의학적 지식은 없다지만, 술이 건강에 나쁘다는 건 지극히 당연했으니까.

"애초에 카페인이랑 같이 먹는 약이다. 알코올이라고 다를 것 같은가."

"아─."

─이게... 맞나...?


"샤를로~~~~트! 당신은 어떻게 말아드릴까요?"

라키가 이번에 지목한 사람은 나였다.

"... 적당히 부탁해."

이번에도 라키는 왼손을 현란하게 움직이며 폭탄주를 제조해내었다. 마실 때마다 맛이 달라지긴 하지만, 라키는 매번 내 입맛에 맞는 술을 만들어냈다. 전 귀족의 입맛을 만족시키다니. 그것도 그거대로 대단하다.

새로운 술이 몸 속으로 들어오고, 슬슬 취기가 도는 걸 느꼈다. 그리고 반 정도 마신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 마셔도 됨?"

옆에서 빤히 쳐다보던 루루와가 물었다. 같이 주스를 마셔주던 리스가 잠들어서 그런가─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루루와였다.

"─미성년자는 안돼."

"...... 흥."

루루와의 볼이 부풀어졌다. 수인에게는 성인과 미성년자의 구분이 딱히 없지만, 무슨 상관인가. 나한테 루루와는 그저 어린 소녀일 뿐인데.

"대신, 이건 많이 마셔도 돼."

루루와의 잔에 사과주스를 가득 따라주었다. 그리고 서비스로, 주스에 직접 마나를 불어넣어 루루와가 좋아하는 시원한 맛을 만들어주었다. 꿀꺽꿀꺽 소리와 함께 주스잔을 들고 마시는 루루와의 옆으로, 이번엔 페이시가 다가왔다.

"샤를로트. 지금까지 고생 많았습니다."

피부색 하나 변하지 않고 멀쩡한 얼굴. 그리고 평소와 같은 사무적인 말투. 저번 회식 때와 마찬가지로 취한 티가 전혀 안나는 타입인 페이시였다.

"[마녀사냥]의 다른 피해자들과 마찬가지로, 릴리 그레이와 샤를로트의 명예도 공식적으로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페이시는 설명과 함께 손짓으로 내게 잔을 권했다. 나는 반쯤 남은 잔을 다시 집고 페이시의 잔과 작은 소리로 맞부딪혔다.

"... 샤를로트도 기뻐할 겁니다."

잔을 비워낸 페이시가 조용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씁쓸하면서도 만족스러운 표정의 페이시. 그녀는 원래의 하급기사 샤를로트와 친구였었다.

그래. 샤를로트도 계속 함께였지.

나는 잔을 마저 비우며, 곁눈질로 푸른 머리카락을 다시 보았다. 릴리의 눈과 같은─ 벽색. 샤를로트 덕분에 릴리의 이야기는 이어질 수 있었으니까.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자, 어느새 다가온 라키가 빈 잔들을 전부 채워주었다. 오늘은 진짜 끝까지 마시나 보다 싶은 생각과 함께 페이시를 슬쩍 바라봤더니, 초점이 맞춰져 있는 그녀의 눈을 [관찰]할 수 있었다.

완전기억능력을 남용하지 않기 위해 평소에는 어긋나있는 페이시의 초점. 하지만 지금은 술집 안의 모든 것들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페이시는 지금 이 순간을 기억에 담아두고 싶은 모양이다.

"... 그나저나─ 샤를로트는 이제부터 계획이 어떻게 됩니까?"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페이시는 머쓱한 듯 질문했다.

"계획? 끝날 때 되면 정리 도와주고 들어가서 자려고 했지."

지금 상황으로는 끝날 기미가 안 보이긴 하지만.

"아뇨. 지금 말고─ 앞으로의 계획 말입니다. 암전이 할 일은 없어졌으니─ 각자 새로운 걸 찾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 따로 생각은 안 해봤는데."

계속 과거와 현재에 치이면서 살다보니 잊고 있었다. 이제는 내일과 미래를 생각해도 되는구나.

아니카는 술집이 있고, 페이시는 교수직이 있고, 라키는 연구실이 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헤르카는 건물주고─ ...


... 그러게. 나 뭐해야 되지?


"아카데미에 입학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페이시가 또 다시 잔을 권했다.

아카데미라─ ... 샤를로트의 신분이라면 입학이 가능하긴 할 터였다. 하지만 뭔가 끌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저와 함께 대학원까지 가는 겁니다."

"음... 마음만 받을게."

내 잔이 페이시의 잔과 닿기 직전, 밀리미터 단위로 피해갔다.


"사무소! 차리자."

우왓, 깜짝이야.

페이시와 나 사이로 루루와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근데 뭐? 사무소?

"그래! 탐정! 사무소! 히끅!"

뭐야. 루루와, 왜 이렇게 텐션이 높지? 혀도 꼬인 것 같고─, 게다가 딸꾹질? 잠깐만─.

아차 싶은 마음에 루루와가 마시던 잔을 바라보았다. 혹시 술이 들어갔나? 라키가 술을 부은 건가? 아니면 루루와가 몰래 넣은 걸까? 여러 가능성을 떠올리며 잔을 집어들었지만, 내용물은 사과주스 그대로였다.

"다른 걸 마시지는 않았습니다. 루루와는 계속 사과주스만 마셨습니다."

페이시가 완전기억능력을 바탕으로 증언해주었다. 그렇다면 루루와는 정말로 사과주스만으로 취한 것이다.


"히끅! 차가운 주스... 마시고 기분 좋아짐! 히끅!"

"루루와, 일단 물이라도 마셔봐."

나는 헤롱거리는 루루와의 입을 열고 물컵의 물을 부었다.

"아무래도─ 나 때문인 것 같네... 하하."

루루와의 사과주스를 시원하게 만들어주려고 마나를 불어넣은 게 실수였다. 술 마시고 마나를 끌어내면, 당연히 알코올 성분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인데.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 못했네.


"우으... 히끅! 샤를로트, 탐정... 사무소..."

술기운에 쓰러져 그대로 내 무릎을 베고 누운 루루와. 정신 못차리는 와중에도 아까 했던 이야기를 이어서 말하고 있었다.


탐정사무소라─ ...

......


"... 루루와, 조수 할래. 히끅!"


... 뭐─. 나쁘지 않을지도.


***


"건물 2층. 사용해도 좋다."

탐정사무소를 차리고 싶다는 말에─ 헤르카는 기꺼이 건물의 빈 방을 내어주었다.

"─세 밀리면 용서하지 않을 거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릴리 탐정사무소보다는 좁아졌지만, 그래도 이제는 밖에 자주 나갈 수 있으니까─ 활동 공간은 더 넓어진 거나 다름없다. 게다가 암전의 멤버들과도 자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샤를로트, 뚜껑."

─매일 사탕 상자를 열어줘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귀엽고 소중한 조수도 생겼다.


[샤를 탐정사무소].

나에게 새 삶을 준 기사, 샤를로트. 그녀의 이름을 붙였다.


"......"


새롭게 붙여진 간판을 바라보니, 많은 생각이 들게 되었다.

나는 어째서 샤를로트의 몸으로 살아난 걸까? 지금까지 계속 고민해본, 내 나름대로의 [성찰]과 [추리]가 있다.


하나─ 육체와 영혼은 하나로 얽혀있다.

둘─ 그것이 끊어지면, 다시 묶일 수도 있다.


가끔씩 죽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나는 사람들이 그런 거겠지. 내 경우에는 릴리의 영혼이 샤를로트의 육체와 묶인 거니까─ 세계의 신이든 창조자든 간에, 다시 묶을 실을 착각한 것이라고 본다.


샤를로트의 육체와 릴리의 영혼은 같은 색깔이었다.


샤를로트의 체내에 쌓인 마나이자, 머리카락으로 발현된 색.

─샤를로트의 색, 벽색.


영혼이 바뀌면서 같이 바뀐 눈동자의 색.

─내 영혼의 색, 벽색.


끊어졌던 두 가닥의 푸른 실이 누군가의 착각으로 얽히는 과정. 그 과정에서 릴리와 샤를로트는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 이라고 추측한다. 물론, 검증되지 않은 주장이지만.


끊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단단히 묶인─


그래.




[벽색의 매듭]이지.



벽색의 매듭. 끝.



yes24, 북센, 알라딘에 검색하면 단행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브런치에 올라온 것과 내용은 똑같고, 대신에 미공개 일러스트와 본편에 나오지 않은 설정 등의 내용이 추가된 굿즈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