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밀고 가는 힘

by 리틀윙

서로 다른 두 속성이 의미 있는 관계를 맺어가는 또 다른 예로 이번에도 영화 이야기로 열겠습니다. 지금 소개할 영화는 카잔차키스의 유명한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그리스인 조르바>입니다. 앞의 영화 <허수아비>와 이 영화는 여러모로 닮은꼴입니다. 두 영화 모두 특이하게 두 남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데, 인물의 성격이 완전히 다릅니다. <허수아비>의 두 주인공이 남성성과 여성성으로 대비된다면,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들은 감성적 인간과 이성적 인간으로 대조를 이룹니다.

이 영화는 30대의 청년 ‘나’가 50대의 그리스인 알렉시스 조르바에 관해 1인칭 관찰자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학식과 지성을 갖춘 작가에다 세련된 양식의 삶을 살아온 청년과 막노동꾼으로 한 평생을 자유롭고 방탕하게 살아온 조르바, 이렇듯 양극단으로 대비되는 두 사람 사이에는 서로 어울릴 여지가 전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소심하고 수줍은 성격의 청년 작가는 조르바라는 자유로운 영혼을 통해 그간 엄격한 자기규율 속에서 살아온 자신의 굴레를 벗어던지면서 창조적인 영감과 상상력을 터득해 갑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카잔차키스의 자전적 소설이라 하죠.

이 영화 속의 두 인물을 보면서 역설의 철학자 니체를 떠올리게 됩니다. 니체의 주저 <비극의 탄생>에 따르면, 인간은 크게 아폴론적인 유형과 디오니소스적인 유형으로 나뉩니다. 태양의 신 아폴론은 이성의 상징인 반면, 디오니소스(바쿠스)는 술의 신으로서 감성의 상징입니다. 단정함과 엄격함, 질서와 조화를 추구하는 아폴론적 요소는 영화 속 인물 ‘나’와 그대로 합치되며, 감각적 도취와 본능 그리고 쾌락으로 대변되는 디오니소스적 속성은 ‘조르바’와 딱 맞아 떨어집니다. 주지하듯이, 니체는 아폴론보다 디오니소스를 더 선호합니다. 니체는 “극단으로 가는 길은 지혜의 궁전에 이른다.”고 말할 만큼 격정적이고 충동적인 디오니소스적 가치를 신봉했습니다. 영화 속의 청년 작가 또한 조르바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소시민적 한계를 극복하면서 작가로서 성장해갑니다. 말하자면, 조르바의 디오니소스적 속성이 청년 작가에겐 혁신적인 지혜의 원천으로 작용한 것입니다.

철학자 니체가 뭘 말하건 저는 아폴론적 속성과 디오니소스적 속성 가운데 어느 한 쪽에 치우칠 생각은 없습니다. 두 상반된 성향의 가치를 통합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입장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교육자로서 우리가 니체의 ‘파격적 노선’을 역설적 관점에서 수용할 필요가 있다는 말을 하고자 합니다. 학교라는 곳에선 아폴론적 인간을 모범생이라 치하하는 반면, 디오니소스적 인간을 문제아로 낙인찍기 쉽기 때문입니다.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를 보신 분은 그 감동적인 마지막 한 장면을 기억하실 겁니다. 주인공 ‘나’가 그간의 신중하고 말쑥한 인텔리의 껍데기를 벗고서 조르바와 함께 해변에서 춤을 추는 장면입니다. 자기네들과 정을 나눴던 여인들을 비롯하여 주변인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는가 하면, 야심차게 기획한 비즈니스가 수포로 돌아가는 등 모든 것이 허물어져 정신적 공황을 맞은 상태에서 뜻밖으로 청년은 조르바에게 춤을 가르쳐달라고 합니다.


춤 좀 가르쳐 주실래요 Teach me to dance, will you?

춤? 방금 춤이라고 말했나요? Dance? Did you say, dance?


그러고선 두 사람은 광활한 바다를 등지고서 나란히 서서 춤을 춥니다. 막춤은 아니고 그리스 전통악기 부주키로 연주되는 <조르바의 춤>이란 제목의 OST 음악에 맞춰 품위 있는 춤사위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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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에 길이 남을 이 아름다운 장면은 우리로 하여금 ‘춤’에 대해 새로이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 한국인들에게 춤은 긍정보다는 부정의 인식이 강하죠. 춤바람이란 말이 상징하듯, 춤은 어떤 탈선(脫線)을 연상케 합니다. 요즘 학교에선 야영활동이나 레크리레이션 문화가 보급되면서 학생들에게 춤추기가 권장되지만, 우리들 학창시절에 학생이 춤을 추는 것은 일탈적 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인간의 원초적인 표현행위인 춤이 터부시되었던 것처럼 우리네 학교에서는 디오니소스적 가치에 대해서는 깡그리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사실입니다.

학교라는 곳이 교사와 학생이 가르침을 주고받는 곳인 만큼 아폴론적 가치를 소홀히 할 수 없음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학생의 전인적 성장이나 집단의 조화를 위해 디오니소스적 가치도 존중되고 또 권장되어야 합니다. 집단 내에 냉철한 이성을 지닌 아이가 있다면 감성적이고 충동적인 아이도 필요합니다. 과도하게 진지한 아이가 있다면 광대 같은 아이도 있어야 합니다. 심지어, 기성의 궤도를 벗어나 일탈을 일삼는 아이조차 범생이들을 단련시키는 점에서 일정한 순기능을 수행하는 역설이 성립한다고 믿습니다. 교육공동체 내에서 아폴론적 가치와 디오니소스적 가치가 서로 충돌하고 부대끼며 균형을 잡아갈 때 그 구성원들이 조화를 이루며 건강한 성장을 꾀해 갈 것입니다.

미와 추, 사랑과 증오, 고통과 기쁨 등 삶의 온갖 모순적인 측면들을 긍정적인 자세로 포용하는 것을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긍정 Dionysian affirmation’이라 일컬었습니다. 이 긍정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좋은 시를 소개드리면서 글을 맺겠습니다.



세상을 밀고 가는 힘


임 보


여름은 더워야 제 맛이고

개는 짖어야 한다.

잡초는 뽑아 내도 계속 자라야만 되고

아이들은 늘 무릎이 깨져 있어야 제격이다.

바람둥이 여편네는 남몰래 서방질을 하고

사기꾼은 사기를

중은 염불보다 잿밥에 마음을 두어야 하리

이것이 제대로 굴러가는 세상이다.


만약, 어느 날 문득

여름이 여름처럼 덥지 않고

시끄럽던 개들도 입을 다물고

김맨 자리에 잡초도 다시 돋아나지 않는다면

그리고

아이들도 어른처럼 점잖을 빼고

바람둥이 여편네도 두문불출 요조숙녀가 되고

사기꾼들은 모두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중들도 목탁만 열심히 두드린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흔들리는 갑판처럼 거리는 뒤뚱거려

사람들의 발걸음은 휘청거리고

부질없는 만남들로 흥청대던 도시는

이제 극지의 설원처럼 적막해지리라

이것은 구원이 아니라 파탄이다

세상을 이처럼 재미있게 한 것들의 절반은

세상을 이만큼 버티게 한 것들의 절반은

우리가 평소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는

저 거칠고 불손한 것들임을 기억해야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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