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시간 눈이 떠진 건 오늘 하루의 기대가 컸던 탓일까. 일상의 부스러기들을 집 안에 밀어 넣고 미안하다는 말, 눈 빛으로 전하고 이른 아침 집을 뛰쳐나왔다.
우리 버스는
38선을 지나 북쪽으로 가고
밖은 자랄 때 고향의 풍경처럼
세월이 멈춘 채 남아 있다.
가을걷이를 마친 들판은
누런 그루터기와 갈색 흙빛으로 덮여 있고,
산 정상 전망대에 오르니 저쪽과 이쪽 산들이 아무 일 없이 다가가도 반기지 않고
멀어져도 붙잡지 않을 듯
서로를 응시하는 자세가 거만하다.
- 휴전선 -
한과 한을 이어 가운데 그려놓고
칠십여 년을 저렇게
바람에 구름만 보내고 있는
하늘이 오늘도 처량하다.
어느 겨울 초토화된 땅 위에 눈이 덮여
하얀 말이 누워 있는 듯 보인다는
어느 미군이 명명(命名) 한
경이로운 백마고지는 지호지간이고,
이제 역사의 증인이 되어 시간조차 느긋하게 받아들이며 꽃을 피우고 떨어뜨리며 힘없이 누워 있다.
오를 때 보다 내려올 때 심했던 모노레일,
고소공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정리됐는데
"도대체 저걸 왜 저렇게 버려놨어"
하시는 이 선생님이 가리키는 노동당 사는 사진으로 보았던 전쟁과 풍수의 상처는 지워지고 사라졌다. 그냥 평범한 건물 벽이 되어 있었다. 40여 년 전 전국을 돌며 이곳 노동당사 안에서도 시대의 아픔을 살풀이춤으로 달래셨던 선생님은 존치의 이유를 지워버린 개념 없는 당국자를
원망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나도 그랬다.
잘 차려 놓은 밥상과 주인의 환대로
따뜻한 음식을 먹으며 나눈 정겨운 대화는
하루를 더 포근하게 감쌌고 막걸리 한 잔씩이 돌고 누군가 "캬" 하는 소리에 웃음꽃이 피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강원 산골의 별미
다시 한번 올 수 있다면 좋겠다.
이어진 여정은 고석정 꽃밭 축제
끝에서 끝으로 탱크가 훈련하던 곳을
꽃밭으로 가꾸어 놓았다. 축구장 30여 개의
넓이라 한다. 차창을 통하여 스치어 지나가고 주상절리로 향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허공에 매달린
잔도는 자연이 빚은 거대한 시(詩)였다.
나는 앞만 보고 걸었다.
유리 바닥 길은 끝내 걷지 못했지만
높은 공간을 연결한 출렁다리를 건넜고
다 모여 앉아 어릴 때 불렀던 동요도 불렀다.
옷에 습기를 머금게 했던 흐린 날씨는
적당한 비를 내려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줬다.
물줄기는 우리가 갈 수 없는 북에서부터
흘러 남으로 내려오고 어디론가 흐른다. 다가오는 것도 떠나가는 것도 때론 세차게 때론 조용히, 자유롭게 흐르고 있다.
버스에 올랐다.
나는 걸었고 올랐고 높고 흔들리는 다리를
건넜다.
오늘 하루는 도전이었고
극복이었고 감사의 시간이었다.
함께해 준 분들의 사랑으로 이룬
기적 같은 하루였다.
시간이 멈춘 듯 평안하다.
25. 11월
경기도민일보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