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포장의 키친타월을 껴 안은 할머니 한 무리가 횡단보도를 지나간다. 얼마 전 한 약장수(?)가 동네에 사무실을 냈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것도 같다. 살방살방 걸으시는 할머니 무리를 보며 생각한다. 언젠가부터 앉았다 일어설 때마다 무릎에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체납 고지서가 날아들 듯 내게도 노화라는 놈이 찾아온 것이다. 함부로 대해온 몸은 채권자 마냥 모든 대가를 일시불로 갚으라 요구해 온다. 훌륭하게 자라라며 힘껏 부채질 받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쩐지 이 갑작스러운 요구가 부당하게 느껴진다. '꽃중년', '저속 노화'와 같은 단어에서 느낄 수 있듯이 곱게 늙거나, 늙지 않는 일에 혈안이 된 세상 속에서 '늙는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먼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혼돈스러운 세상 속에 주저앉아 있다가 '아이고' 소리를 내며 일어나 보니, 항노화의 최신 유행을 좇는 일과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일이 '노년의 예의'가 된 세상에 서 있다.
수영장을 이용하는 어르신들은 대체로 관절에 부담이 가지 않도록 물속에서 걷는 운동을 하시지만, 그중 연령대가 낮은 편에 속하는 60-70대 어르신들은 아가미가 달린 것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 정도로 오래 장거리 수영을 하신다. 어느 날은 어떻게 그렇게 오래 수영하실 수 있는지 궁금해서 어르신께 묻자, '나이 들면 젊은 사람처럼 빨리는 못 가도 온갖 일 겪으며 살다 보니 참을성이 생겨 오래 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노년의 삶을 잉여의 삶쯤으로 여긴 내 속마음을 그분께 들킨 것만 같이 얼굴이 뜨거워졌다. 자신이 가진 에너지를 길게 나눠 쓰는 지혜와 인내를 가진 어른은 못내 탐욕스럽다 여겼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날의 짧은 대화를 통해 나의 노력으로 가진 줄 알았던 젊음을 그러 쥔 손에 조금은 힘을 빼기로 마음먹었다.
요 몇 주간 계속해서 마주치는 할머니가 계신다. 늘 내게 자신은 쫓아갈 테니 젊은 사람 먼저 출발하라 말씀하신다. 저는 숨이 달려서 할머니처럼 오래 못 해요. 할머님 돌고 싶으신 대로 편히 도세요, 저는 불편하시지 않게 맞춰 들어갈게요. 내가 불편을 겪지 않으려 건넨 선의로 포장된 말에, 갑자기 한결 해사해진 얼굴로 본인의 올해 나이와 수영장엔 다른 할망구(?)들이랑 놀러 오는데 그래도 오가는 길을 항상 걷고, 수영장에 와서는 누구와 말을 섞기 전에 항상 스무 바퀴(1,000m)를 한 번에 도신다며, 이야기를 갑자기 주섬주섬 부려 놓으셨다. 길어지는 말씀에 시간을 가늠하려 흘끗 시계로 시선을 던졌다가 다시 할머니를 본다. 할머니의 골이진 눈가가 자부심으로 반짝인다. 아아. 잘 늙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자신의 한계를 친절한 방식으로 인정하는 것. 자신의 경험에 무해한 방식으로 자부심을 가지는 방법을 더해가는 것. 존재의 범위가 줄어드는 것에 체념하지 않고 계속해서 상황에 맞는 생활과 연대에 새로운 기준을 부여하는 것. 그러므로 늙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인생의 많은 부분을 부정하는 일이라는 것을 경계가 흐린 그 눈동자를 보며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적어도 앞으로 40년은 더 수영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근거 있는 행복에 가슴이 뻐근해졌다.
수건으로 몸을 닦다 탈의실에서 나누는 이야기에 귀가 쫑긋해진다. 얼마 전 왔다던 약장수에 관한 이야기다. 이것저것을 안기며 환심을 사대기 바쁘던 그 업자가 며칠이 지나자 상품을 사지 않는 할머님들께 막말을 했다고 한다. 노래하고 박수 치며 환대해 주던 곳이 순식간에 박대의 장으로 변한 모습에 울분과 당황이 한 데 섞이신 듯하다. 문득 어르신들께 이 수영장이 헤밍웨이가 말한 몇 안 되는 '깨끗하고 밝은 곳'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이용당해 주어야 할 잉여의 존재가 아닌 한 인간으로 오롯한 깨끗함을 보장받을 수 있는 곳이 겨우 여기가 아니었을까. 만일 '밝은 불빛과 어떤 종류의 깨끗함과 질서'를 영위할 수 있는 곳이 여기라면 '잠들고 싶지 않아 하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밤에 불빛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고픈 그 마음'을 눈치채지 못한 척하는 것으로 그들에 대한 경외를 표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