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그락 달그락. 단조로운 소리가 주방을 메운다. 인지 초절전 모드로 가능한 일을 하는 동안은 자그만 이어폰을 통해 남의 이야기에 빠져든다. 그러다 최근 이어 청취하는 여성학자의 팟캐스트를 듣다 멈칫하게 된다. '아'하고 짧은 탄식이 입 밖으로 흘러나온다. '그랬구나.' 작은 말이 입술 틈에서 뭉개어진다. 주말 오전 수영장에서 마주친 미끄덩한 중년의 남자를 떠올린다. 자주 끈적한 말을 던지는 남자를 피하기 바빴던 날들과 달리, 어떤 유난한 결기가 샘솟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그날도 쉬고 있는 틈을 놓치지 않고 말을 걸어왔다.
"자기(내가 왜 너의 자기냐)는 관리를 잘 해서 남편이 너무 좋아하겠다."
"궁금하시면 남편한테 제가 관리를 잘 해서 좋은지 한 번 물어봐 드릴까요?"
순간, 멈칫하는 남자의 모습 위로 찰박이는 물소리만 고요하게 들린다. 오늘도 웃으며 적당히 '아, 네.'라고 말하리라 여겼는지 적잖이 당황한 모습이다. 벌겋게 달아오른 남자의 얼굴이 미세하게 흔들린다. 속으로 짧은 쾌감을 느꼈던 것도 잠시, 나는 종일에 거쳐 쏘아붙인 말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되짚었다. 나는 타인의 것을 곧잘 흡수해 버리곤 하므로 종종 내 안에 솟아오르는 낯선 소리의 주인을 찾는다. 누구에게서 온 것일까 하고. 내 안에 들어온 것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로 깨져 흐르는 것을 아직은 용인할 수 없으므로.
최근 나의 플레이리스트는 영화 <위키드>의 삽입곡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위키드>는 1995년 미국 소설가 그레고리 맥과이어가 연재하기 시작한 소설로 유명 판타지 소설 <오즈의 마법사>의 스핀오프 작품이다. 이야기는 시골집에서 도로시가 회오리바람을 타고 날아오기 이전으로 거슬러 간다. 다복한 집에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태어나 사랑받으며 자라온 금발의 착한 마녀 글린다. 어머니의 혼외정사로 잉태되어 초록색 피부와 날카로운 손톱을 가지고 태어나 평생을 원죄 속에서 살아가는 서쪽 마녀 엘파바. 원작에서 정형화시킨 두 마녀의 선과 악에 서사를 부여하는 <위키드>는 보고 있는 것만으로 기회비용을 이기지 못 한 억울함이 시나브로 녹아내리는 기분이 든다.
두 주인공이 위즈 대학에 입학하여 생활하던 어느 날, 글린다는 엘파바를 놀릴 심산으로 할머니의 모자를 선물하며 무도회에 초대한다. 이에 엘파바는 자신에게 찾아온 위선을 (비록 착각이었지만) 선으로 여기며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을 글린다에게 건넨다. 그 후 엘파바는 벅찬 마음으로 무도회에 참석하지만 엘파바에게 돌아온 것을 싸늘한 시선뿐이다. 반면 글린다는 자신이 건넨 사실마저 희미해진 위선이 단단한 진심이 되어 돌아온 것을 알게 된다. 얼어붙은 시선이 쏟아지는 홀의 한복판에서 여태껏처럼 엘파바는 '나는 상관없어. 아무렇지 않아'라는 것을 보여주듯 평범하지 않은 움직임을 만든다. 모두가 엘파바의 움직임을 보고 웅성거리기 시작하자, 글린다는 양심에 드리운 그늘을 느낀다. 그 짙은 그늘이 자신을 집어삼키기 전 글린다는 엘파바에게 다가선다. 그리고 엘파바의 움직임을 인용하기 시작한다. 엘파바조차 수취인을 알 수 없었던 자신의 움직임은 마침내 글린다의 인용을 통해 오롯이 그들의 것이 된다.
위선이 선이 되어 되돌아왔다. 그러나 애초에 둘의 경계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있는가. 선과 위선이 악이 되어 돌아오는 일 또한 수두룩하지 않나. 이 모든 것이 예측할 수 없는 우연에 의해서 달라지는 흐름 속에서, 선과 악의 인과관계에 대해서 어떠한 맥락도 짚지 못하게 하는 이야기는 내 마음속에 긴 그을음을 남긴다. 그러나 그 깊은 음영 끝에는 작은 빛이 방울진다. 그 작은 빛을 주시한다. 인간의 의지라는 이름의 작지만 눈부신 빛을. 이후 엘파바와 글린다는 상대의 삶을 스스로의 의지로 인용하고, 자신의 삶을 인용당하며 서로의 시간을 채워나간다. 영화 속 두 주인공을 보며 나는 무엇을 인용하여 내게 허용된 시간에 덧입힐 것인지 까마득해지고야 말았다.
나에게 올해는 기억에 남을 만큼 많은 사람들의 삶을 인용해 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해였다. 이제껏처럼 하나의 붓으로 긴 획을 이어긋지 않고, 여러 굵기의 붓과 손들이 저마다의 색을 가져와 남긴 자국들을 기꺼워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물론 운이 좋았기에 가능했다. 때때로 타인의 조각이 나의 생활 속에서 유유히 떠돌도록 할 때면 ‘나’라는 존재가 허상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다양한 색을 입을 때마다 어제 잠들었던 내가 아닌 '다른 나'가 깨어나는 기분이 들곤 했다.
반들반들한 예쁜 홍시를 샀다. 평소의 나라면 결대로 뜯어서 껍질을 벗겨가며 와라락 먹었겠지만, 누군가 우아하게 홍시를 먹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는 흉내 내어보자 생각했다. 과도를 꺼내 터지지 않도록 네 등분으로 나눈 후 접시에 담았다. 속살이 터지지 않도록 압력을 조절해가며 조각을 내는 동안 이미 가진 인내심은 다 쓴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벌어진 틈 사이로 반짝이는 홍시의 속살을 보니 조금 행복했다. 자그만 티스푼으로 과육을 떠 입에 넣는다. 말캉한 속이 입속에서 뭉개어진다. 그러다 한 조각을 채 먹기도 전에 멀리서 ‘엄마!’하고 나를 찾는 아이의 소리가 들린다. 불모지에서 고상함을 키우려 했던 자신에 대한 껄끄러움이 한숨과 함께 가슴속을 떼굴떼굴 굴러다닌다.
“왜!” 하고 큰 소리로 외친다.
"태블릿이 잘 안돼요!"
“알았어, 갈게!”
다소 체중이 실린 걸음으로 아이에게 향한다. 방문을 열어보니 고개를 숙인 채 태블릿 위로 연신 빼죽 내민 입술을 찍어내리는 아이를 발견한다. 태블릿의 액정이 아이의 입술로 얼룩져 있다. 가슴속에 치미는 것을 감추고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묻는다.
“너 지금 뭐 해?”
“뽀뽀. 이러면 얘가 말을 좀 잘 들을까 싶어서.”
아득한 패배감을 느낀다. 내가 타인의 있어 보임을 인용하려 애쓰는 사이, 어디에선가 사랑으로 회유하는 법을 인용해 온 아이를 바라본다. 나의 남루한 상상력이 닿을 수 없는 영역을 들여다본 듯하다. 저것은 내가 오래전 인지하고도 인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이므로. 내게 그토록 어려웠던 것을 어렵지 않게 삶에 인용해온 아이를 아무렇지 않은 척 바라보는 표면 아래, 섣부른 마음만 필사적이다. 앞으로 내게 주어진 시간 중 저 같은 사랑의 회유가 차지할 수 있는 순간이 있을까. 후락한 나의 것을 가져다 저토록 눈부신 아이의 시간을 덧칠해 버릴까 겁이 난다. 꼭 그 두려움만큼 나는 아이가 가진 것을 어설프게 모방한다. 얇은 트레싱지(기름종이)를 대고 그린 그림은 '반칙 같아서' 싫다던 너에게, 나의 반칙이 들통날까 봐. 네가 보다 정교해지기 전에 나는 너를 인용해낼 수 있을까. 아직 나는 선이 무엇인지 답을 낼 수 없다. 그러나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말초가 저릿해오는 이 같은 마음을 선이라 말할 수 없다면, 무엇을 내 삶 속으로 끌어올 수 있을까.
그러나 나는 이와 반대된 것을 느낄 때도 있다. 1995년 7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던 법원은 2025년 실패한 쿠데타도 처벌하지 못하고 있다. '이기면 장땡'이라는 논리 아래 많은 사람들 위로 군림했던 그들은 이번에는 이길 수 없게 되자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을 때까지 버티고 있다. 여전히 그들을 사회적 합의로서의 '악'이라 판결 내리지 못하고 있지만, 내 심장은 세차게 뛰며 이들을 악이라 이름 붙이려 한다. 그리하여 적당한 야만을 기대하게 한다. 내 마음속에 새어드는 이 기대는 악일까. 이처럼 삶의 도처에는 빙퉁그러진 선과 악이 나뒹군다. 그렇기에 저려오는 손끝과 뜨겁게 뛰는 심장을 느낄 때면 나는 늘 혼란스러워지고야 만다. 나의 감각만을 믿어도 좋은가. 타인의 표면을 인용하는 것으로 채워진 나를 온전히 믿을 수 있나. 애초에 나를 믿는다는 것이 착각에 불과한 것 아닌가. 일신으로서의 혼란은 계속해서 가중되어왔다.
다양한 색이 드리운 올해를 돌아본다. 많은 이들이 남기고 간 발자취들이 고운 색이 되어 남았다. 타인에게 물들어 내가 사라질까 우려했던 것도 잠시, 사방을 가득 채운 색들 속에서 나는 다시 피어난다. 어떤 아픔을 떠올리자 하나씩 색들이 날아든다. 춤을 추듯 일렁이는 색의 조각이 말한다. '나도 아팠노라'라고. 기쁨을 떠올리지 같은 방식으로 행복을 나누는 색들이 나를 감싼다. 나는 그 창연함 앞에 겸허해지고야 만다. 이것은 즉각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단정 지을 수 없다. 나의 테두리 안에서 일어난 감각을 타인의 색에 비추어 흡수하므로. 꼭 그 색의 수만큼 감각은 다양해진다. 허용된 색의 수만큼 느껴지는 감각에 신뢰가 스민다. 머릿속에 금이 가고, 새로운 바람이 드나든다. 마음을 작게 다독인다. 이들의 손이 함께 저려오는 순간을 쫓아가 보자. 이 같은 자유를 아낌없이 누려야지. 세상의 모호함을 더 이상 혼자 구분 지어 이름 붙이지 못할 테니. 내 안의 이곳저곳에 흔적을 남긴 이의 저린 손끝을 상상하며 한 걸음 내디뎌야지. 이 작은 다짐은 불확실을 디딜 용기를 줄 테니.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