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천문학계에는 큰 이슈가 있었다. 바로 명왕성의 왜행성 분류다. 이 사건은 이른바 '명왕성의 태양계 퇴출 사건'으로 불리며 큰 화제가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한 번쯤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을 순서대로 외우며 공부했을 것이다. 그 덕에 태양계라는 시계로는 가늠도 되지 않는 공간에 존재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친근감을 가진 탓인지, 명왕성의 태양계 퇴출에 대해 나를 비롯한 많은 주변 사람들이 섭섭했었다. 이에 국제천문연맹( IAU)는 행성의 세 가지 기준인 태양 공전, 구형 유지, 궤도 청소 중 명왕성은 궤도 청소 능력을 충족하지 못했으며, 주변 천체와 궤도를 공유하는 등 궤도 지배력이 부족한 것을 근거로 제시했다. 따라서 명왕성에 대한 행성 기준을 새롭게 정립하여 명왕성, 에리스, 세레스 등을 왜행성(명왕성형 천체)으로 분류했다. 그리고 현재 왜행성으로 분류된 명왕성은 식별 번호 '134340'으로 불린다. 이 번호들로 불리기 전 플루토(Pluto)는 명왕성을 명명하는 단어였다. 이것은 그리스어로 '넉넉하게 하는 자'를 뜻한다. 그 속에 담긴 뜻처럼 태양계의 반경을 저 멀리까지 넉넉하게 가져갔던 명왕성은 134341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134340으로 남았다. 한순간에 격하된 듯한 명왕성의 지위에 설움이 이는 동시에 지고한 오래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토록 깔끔할 수 있다는 점이 사뭇 신선하게 느껴졌다.
요즘의 주변을 돌아보면 모두뛰고 있다. 정말이지 모두뛴다고 말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많은 이들이 달린다. 시원적 역동의 폭발과 견디는 기쁨을 동시에 안겨주는 듯 보이는 달리기는 어딘지 내 것 같지 않아 몇 차례 권유에도 가만히 웃고 말았다. 양 발을 번갈아 가며 땅을 디뎌 걷는다. 지탱하는 축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안정감을 주는지를 느끼며 깡총하게 짧아진 햇살을 만끽한다. 멀리서 일정한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탁. 탁. 탁. 탁. 탁.
점점 가까워지는 땅을 고르게 박차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푸드득 얇은 운동복 상의를 휘날리며 달리는 사람이 지나간다. 고르게 땅을 디디는 두 다리 아래로 낮은 허공이 생겼다 말았다 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봤다. 양 발을 번갈아 디뎌 바닥을 차고 몸을 부양시킨 상태에서 빠르게 이동하는 이의 뒷모습을 보며, 모두가 달리는 요즘, 어째서 나는 달리지 않는가. 왜 두 다리를 공중에 띄우지 않는가. 한 축의 지탱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되묻는다. 그러다 발아래 허공이 주는 자유로움에 아득히 혼란해지고야 만다.
미국의 과학철학자 토머스 쿤은 저서 <과학적 혁명의 구조>를 통해 패러다임 시프트(paradigm shift)라는 개념을 창시했다. 이는 기존의 사고방식, 가치관, 제도 등이 갑자기 바뀌며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는 혁명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과학, 사회 등 다양한 분야에 기존의 지배적 패러다임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많아질 때 새로운 패러다임을 수용하여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점진적 변화가 아닌 혁명적 전환, 기존의 질서를 단절시키고 새로운 질서를 급격하게 확산시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는 무언가를 늘 이어 땋는 습관이 있는 나의 삶에 크게 상관 없을 것만같던 개념이었다. 얄팍함이 들킬까 손에 꼭 쥔 나의 패러다임으로 해석할 수 있는 세계가 적게나마 남아있을 때까지의 일이었지만 말이다.
이런저런 사물에 앉은 먼지를 가볍게 털어내기 적합한 작은 먼지털이개를 구입했다. 마른 걸레로 닦아낸 듯 말끔히 제거되는 신통함에 온종일 작은 털이개를 총총거리며 들고 다닌다. 오래된 다이어리 위에 쌓인 먼지를 털다 스무 살 무렵 사용했던 빨간색 수첩을 꺼내든다. 하루가 멀다 하고 취기에 흥청거리던 시기답게 술을 마시러 가기 전 쓰고, 술을 마시다 쓰고, 술을 마신 후 쓴 메모들로 가득하다. 어쩐지 마시지도 않은 술에 취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다이어리의 낱장이 눅눅한 것이 술 냄새가 나는 것도 같다. 먼지를 털던 것을 잠시 잊고 다이어리를 들고 앉을 자리를 찾았다. 그렇게 한 장 한 장을 넘기다 흠칫하는 순간을 맞이해 버렸다.
'서 있는 두 발에도 정성을 다하자.'
굵은 펜으로 보지 않을 수 없게끔 적어 둔 문장에 몸서리를 치며 다이어리를 한구석으로 내동댕이 쳤다. '미친 거 아냐'라고 작게 읊조린다. 네가 이따위(?) 마음가짐으로 살아서 내가 지금 이 꼴(?)이 아니냐고 스무 살의 내게 따져 묻고 싶었다. 서 있는 두 발에도 정성을 다하라니. 그 시절 내가 지니고 살던 내 안의 정상성에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어떠냐'하고 그때의 내가 물어본다면 애석하게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기에 전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의심 많은 늙은 짐승처럼 어느 한 쪽의 발도 쉽게 떼지 못한 채. 습관이 되어버린 정성을 어찌하지 못하고 여전히 두 발의 끝까지 마음을 쓰며 버티고 서 있으니.
양 발을 허공에 띄워 본 마지막 기억은 언제의 것이었을까. 내가 경험한 것들로부터 유추한 옳음에 스스로 반론을 제시하지 못한 상태로 매사 깊게 기뻐하고, 슬퍼하고, 화내어 왔다. 언제까지 다음 발이 디디러 올 때까지의 기약 없는 시간 동안 고집스럽게 한정적인 주관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다가오는 전환의 순간이 멀리 있다는 것이 두렵다. 하지만 나는 나의 한 쪽 발로 디디고 선 땅을 잃을 용기가 있는가. 내 발아래 놓인 땅에서 떨어지는 일에 두려움을 느끼면서 남의 어깨 위에 먼지처럼 쌓인 알량한 기득권을 욕할 자격이 내게 있나. 이어 올 또 다른 전환의 순간은 멀지 않다는 것 또한 두렵다.
물먹은 빨랫감처럼 무거워져 가는 머릿속을 환기 시켜준 것은 명왕성에게 134340의 지위를 준 천문학자들이다. 1930년 해왕성의 외부에서 발견된 행성에 기라성 같은 그들은 머리를 맞대어 그 행성을 태양계의 것으로 분류하고 명왕성이라 이름 붙였다. 그 후 한 세기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2006년, 명왕성의 이름과 자격을 가차 없이 박탈해간 것도 역시 그들이었다. 많은 지구인들이 이에 대해 적잖은 섭섭함을 토로하는 와중에 그들은 오히려 '명왕성이 자신에게 어울리는 가족(명왕성계)을 찾았다'라고 말한다. 이 반론은 내게 반대쪽 다리로 균형을 이동시키며 생겨난 허공처럼 느껴진다. 그들은 축의 중심을 상실하는 것에 대한 집착을 가진 내게, 양 발을 땅에서 떼는 것은 디뎠던 발의 과오를 욕보이는 것이 아님을, 디뎠던 땅을 상실하는 것 또한 아님을 알려준다. 그것은 오히려 여태 인지하지 못한 새로운 허공을 제시한다. 가능성이라 부르고 싶은 이 허공은 역설적이게도 내가 디딘 현실을 의심해 볼 수 있도록 나를 북돋는다. 양 발을 땅에서 떼는 찰나를 가지며 얻게 되는 삶의 작은 배짱이다.
주머니 속에 든 모래알 같은 용기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린다. 가볍게 달려보자 결심하기 직전, 두 다리를 번갈아 박차며 몸을 허공에 띄우는 순간에도 이어 갈 수 있을만한 것을 선별한다. 삶과의 협상에는 어떤 각오가 필요하므로 불필요한 것들은 대충 서랍 속에 밀어 넣는다. 살짝 발끝을 떼어 본다. 낮게 뛰는 두 다리 아래로 생긴 허공을 탁. 탁. 떨어지는 발소리에 맞춰 느낀다. 그 허공에 띄워질 나의 공고한 패러다임에 대한 반론을 상상해 본다. 내 안의 꼰대와 젠 Z(Generation Z)가 충돌한다.
30분 후. 아이고 숨이 차서 아무것도 모르겠다. 원만히 합의하던지, 아무나 이겨라. 명왕성이고 청소고 인생의 기준이고 나발이고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