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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쓴다

by 도시골사람






질감이 바뀐 바람을 맞으며 아이의 유치원 차량을 기다린다, 두어 달 남은 올해를 짧게 가늠해 본다. 눈에 보이는 많은 것들이 달라질 순간이 코앞에 닥쳐와 있는 이 계절에는 시간을 뭉텅뭉텅 도둑맞는 기분이 든다. 계절의 온기를 훔쳐 가는 이의 소맷단을 부여잡듯 짧고 간절하게 숨을 들이켠다. 멀리서 양 볼에 점등을 밝힌 노란 버스가 다가온다. 속도를 줄인 차에서 내린 아이의 담임 선생님은 '안녕하십니까' 여느 때처럼 씩씩한 인사를 건넨다. 나도 짧은 찰나에 감사를 전한다. 선생님과 인사를 나눈 아이가 버스 계단을 올라서자 따라 등을 돌린 그녀는 마침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황급히 돌아서며 내게 묻는다.


"어머니, 요즘 수영장에서 일하세요?"


아이를 보낸 후 운전석에 앉아 떠올린다. 아이가 '엄마는 매일 수영장에 있다'라고 말해서 수영장에서 일을 하시는 줄 알았다고 그녀는 말했다. 질문이 무엇이었을까. 짐작 가는 그 질문에 나는 무엇이라 대답할 수 있었을까. 책상 한편에 필기구가 무시로 쌓인 트레이가 은빛으로 빛난다. 외면하듯 감춰놓은 검은 만년필 한 자루를 뒤적여 찾는다. 듬성듬성 먼지가 앉은 검은 만년필은 유품처럼 놓여있다. 펜 뚜껑을 돌려 뽑아낸 펜촉의 끝에는 동일한 만년필 제작 90주년을 기념하는 숫자 '90'과 언제 말랐는지 가늠할 수 없는 잉크 자국이 남아있다. 90주년이라. 이 만년필을 선물받은 지 10년이 넘었으니, 이미 100주년을 기념했겠구나. 내가 모르는 영광을 혼자 누렸을 검은 펜 한 자루가 어딘지 야속하다. 함부로라는 말이 어울릴 법한 손놀림으로 펜을 그어본다. 펜촉은 희미한 압흔만을 남기며 답 없이 갈겨진다.


미지근한 물을 담은 유리병에 메마른 만년필 촉을 담근다. 펜촉 끝에서 밤하늘처럼 확장해가는 사유를 써내려가던 기억이 푸른 띠를 이루며 새어 나온다. 무언가를 이룰 수 있을 것 같던 치기 어린 시절처럼 눈이 시리도록 맑고 푸르게. 그 푸른빛이 농도에 따라 켜켜이 쌓여가는 유리병 속에서 기어이 마지막 순간까지 부유하는 맑은 빛을 찾으려는 집착에 숨이 무거워진다. 이 만년필과 있었던 기억을 반추해 보면 언제나 이런 식이다. 못 이긴 척 펜을 찾고, 뚜껑을 열어 촉을 그어보고, 말라붙은 것을 보고 한숨 쉬고, 세척한 후 다시 잉크를 넣어두고, 다시 방치하는.


대학 졸업 무렵, 아버지는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며 이 만년필을 선물하셨다. 졸업 축사로 딸이 굶어죽길 바란다는 말을 한다며 짧게 나무라곤 펜을 건네받았다. 잠긴 방문을 뒤로하고 열어 본 검은 상자 속 아버지의 마음은 외면하고 싶은 나의 누추한 재능을 비추는 초라한 램프 빛처럼 느껴졌다. 납득할 수 없는 가격의 만년필에 대한 엄마의 질책이 방문을 넘어 흘러들었다. 탁, 하는 소리를 내며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아버지의 근사한 바람과 대비해 내가 가진 재능이 어쩐지 비루하게 느껴졌다. 물정 모르는 처지에도 이 재능은 내 속에 제때 곡기를 넣어주지 못할 것이라 짐작하게 만들었다. 이후의 시간 속에서 나는 한계에 내몰려보지 못 한 인간처럼 태연하게 살았다. 그러다 툭. 하고 마음에 금이 간 날이면 무시로 그 만년필을 꺼냈다. 그러곤 넓은 메모지를 마음 삼아 거칠게 휘갈겼다. 아무것도 쓸 수 없는 말라붙은 펜촉으로. 마음의 다급함을 그어놓던 날들의 기억 속에서 모난 생각을 마음껏 종이 위에 부려놓던 미운 손끝을 떠올린다. 누가 볼까 서랍 속에 은밀하게 보관된 메모지들이 무심결에 손에 딸려 나온 날. 깊고 복잡한 압흔에 닿은 시선을 통해서 그 감정을 짐작한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짐작만으로도 나를 상처 입힌다.


욕실 문이 열리자 뽀얀 수증기가 밖으로 흩어진다. 물기를 머금은 두 볼이 발그스레하다. 아이의 노르스름한 머리칼을 닦이며 물었다.


"**야, 혹시 선생님이 엄마 요즘 뭐 하시냐고 물어보셨어?"

"네."

"그래서 **는 뭐라고 했어?"

"엄마 수영한다고 했어."


아, 하고 짧은 탄식이 새어 나온다. 아이를 등원시키던 나의 차림새가 바뀐 탓에 선생님께서 궁금증이 일었던 모양이었다.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직업적 해석(job)에 물음을 던진 선생님에게 기능적 행위(do)로 대답한 아이의 천진함에 내심 고마움을 느낀다. 그러곤 마음속에 숨겨놓았던 비밀스러운 행위의 귀퉁이를 슬그머니 내밀어 본다.


"그래, 맞지. 엄마 매일 수영하는 거. 똑똑하네 우리 강아지. 그런데 그거 알아? 엄마 다른 것도 하는 거."

"뭔데요?"

"엄마 글 써. 엄마 요즘 수영하는 것만큼 글 쓰는 것도 많이 해.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 누가 엄마 뭐 하는지 물어보면, 엄마 글 쓴다고 말해주면 좋을 것 같아. 그러면 엄마가 좀 더 신날 것 같아."

"엄마 글 쓰는 거 한 번도 못 봤는데?"

"엄마가 항상 너희들이 잠든 밤에 몰래 썼어."

"왜요?"

"음...... 이유는 엄마도 잘 모르겠어. 근데 앞으론 너희한테 글 쓰는 모습 많이 보여주려고. 앞으론 몰래 쓰지 않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쓸게."


앞에 있는 아이에게 전하는 말인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이 입 밖으로 흐른다. 입술을 타고 나온 말이 진동하며 귓바퀴를 타고 몸속으로 전해진다. 그 소리는 마치 내 것이 아닌 듯하다. 아이의 양어깨를 쥔 손에 어쩐지 옅은 결연이 흐른다.'빈곤한 재능이라 여기지 않을게. 수치로 환산되는 것에 대입하지 않을게. 기대함직한 것들로 네 사유를 폄훼하지 않을게.' 입 밖에 꺼내지 못 한 진동들로 가슴이 떨린다. 고요히 정적이 내려앉은 밤, 나는 뼈마디가 하얗게 불거질 정도로 힘을 주어 잉크의 굳은 뚜껑 열었다. 푸르다 못해 검은 잉크가 찰랑하고 넘친다. 급히 티슈를 뽑아 방울져 떨어진 짙은 잉크를 눌러 닦는다. 검푸른 잉크는 넓은 티슈 자락에 번져나가며 차츰 색을 밝힌다. 가만히 눌러 둔 손을 떼자 옅은 파랑의 자국이 남아있다. 마치 무언가 이뤄내고 싶었던 시절의 맑은 잔영처럼. 누군가 알아봐 주길 바랐던 희미한 재능처럼. 그러므로 요즘의 나는 쓴다. 지연된 페이지의 새로고침을 무심코 누르는 마음으로 기대하는 것 없이 쓴다. 그저 써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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