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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생활수영인 에세이 - 적절한 소환

by 도시골사람




가볍게 스윽 문지른 눈자위가 붉어진다. 근래에 들어 자주 있는 일이다. 반복해서 스쳐진 눈가의 피부가 붉어지기 시작하더니 점점 헐게 되어 일상적인 수영 생활을 하기가 어려워졌다. 피부과에 갔더니 접촉성 피부염이라 했다. 의사는 꽤나 진지한 얼굴로 수영을 하지 말라는 엄포를 부린다. 그 말을 귓등이나 귓바퀴쯤으로 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문득 어깨 힘줄이 파열되어 수술받은 아버지가 비교적 멀쩡한 반대쪽 팔로 퍼팅 연습을 하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내둘렀던 혀가 내 것이었다는 사실에 머쓱한 마음이 빼꼼 고개를 내민다. 내게는 아버지처럼 비교적 멀쩡한 다른 눈이 없으므로 어떻게 증상을 심화시키지 않고 수영을 계속할 수 있을까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수영 동호인 커뮤니티에 '접촉성 피부염'이라고 검색한 후 갖은 글을 섭렵한다. 그 결과 많은 의견이 '수경의 문제'로 수렴되었다. 즉시 눈과 가까운 피부에 자극이 덜하도록 만들어진 알이 커다란, 그러나 미적으로 매우 불만족스러운 수경을 구매했다. 끔찍하게 생긴 새 수경에 적응하기 위해 수영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바쁘다. 그러나 수업 시간 전에 미리 새 수경을 쓰고 가볍게 워밍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강습을 시작하자마자 어지러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손의 높이, 몸의 각도, 머리의 위치. 어느 것 하나 익숙하게 다가오는 것이 없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멀미와 같았다. 시신경에 전달된 감각이 변형됨과 동시에 익숙하다 여겼던 물에서의 모든 느낌이 낯설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아찔했는지. 글을 쓰며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으로 구역질이 밀려드는 듯하다.



<힐마 아프 클린트 : 적절한 소환>의 전시장을 산책하며 드는 한 가지의 가장 큰 의문도 이와 같았다. 시신경을 통해서 비친 일상의 많은 것들을 무엇으로 해석하여 평면 위에 옮기는가. 실제 존재하는 것을 일반적인 눈에 비치는 것과 다르게 자신만의 해석을 거쳐 손끝으로 그려내기까지 작가의 정신에서는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 것일까. 이러한 그의 정신세계를 시대의 한계로 인해 회화로 마주하지만, 만약 그가 금 세기에 태어났다면 그의 해석 체계를 움직이는 영상으로 볼 수 있었을까. 만약 그랬다면 눈앞에 그려진 이 평면 속의 기호들은 어떤 모습을 그리며 나아갈까. 눈에 보이는 것을 고스란히 출력해 내는 것을 바랐던 동시대의 사람들은 힐마의 그림이 영매의 것으로 폄하했다고 한다. 눈에 보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적절히 연결 짓지 못해 일어나는 불쾌한 감정 더미 속에서 그의 작품은 깊고 오랜 잠을 자게 된다. 그 뒤 힐마의 유언에 따라 사후 20년 동안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그의 작품은 2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못하다가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80년이 지나고서야 불려내어진다. 세계와 맞지 않는 그의 진동을 누군가 불현듯 느낀 것일까. 아니면 드디어 세상과 주파가 맞게 된 것일까.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위대한 일은 시시하고 장난 같아 보이는 일에서부터 시작한다. 힐마의 작품 또한 그렇다. 식견이 짧은 나의 해석은 형식적 실험에 불과해 보이는 장난 같은 그림들에 닿는다. 자칫 그것은 작가에 대한 이해 없이 가치를 논하는 일을 곤란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가 가진 특별한 해석에 의해 색을 입은 그 작품들은 도처에 놓인 작은 낄낄거림을 가벼이 넘길 수 없게 만든다. 이것은 위대하고, 저것은 형편없다 말할 수 있는 자에 대한 의구심을 품게 한다. 작품 속에 녹아든 긴장과 공명, 그리고 경계에서 역동하는 것들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그 정신의 궤적을 뒤따라 밟아 나가게 하는 힘을 건넨다. 마침내 그 힘은 눈에 비친 많은 것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정제하게 만든다. 기어이 한 가지 감각으로 해석한 것에만 기대어 온 수많은 조응을 확장시킨다. 도식화된 해석이 생래적 감각에 차분히 녹아나간다. 그리하여 끌어올려진 감각은 그가 마련한 반듯한 선 위에 놓이는가, 그렇지 않다. 그는 보란 듯 새로운 작품을 시작할 때마다 스스로 기존에 만든 체계에서 벗어난다. 마치 무한에 가까운 궤적을 지닌 존재처럼.



가끔 멍하니 상상한다. 우주 속의 작은 부스러기인 인간의 존재에 대하여. 그중에서도 중력이라는 힘에 의해 우연히 발을 붙이게 된 인간에 관해서. 만일 중력이 없다면, 인간은 힐마의 정신세계처럼 엄청난 궤적을 그리며 우주 속으로 나아가겠지. 인간이 우주의 일부라는 큰 가정 아래에 마찬가지로 인간은 지구의 일부라는 작은 가정을 둔다. 그리고 우주를 그리듯 무한에 가까운 동그란 기본 값을 그려본다. 그 속에 지구에 사는 인간이 만든 수많은 질서를 작게 그려 넣는다. 포개어진 두 개의 동그란 원 사이의 낙차를 눈을 감고 가늠해 본다. 이는 마치 긴 시간의 비행 끝에 게이트를 벗어나며 느끼는 육지 멀미를 연상시킨다. 흔들리며 뻗어나가던 저마다의 정신이 붙잡혀 있는 작고 탐욕스러운 질서의 땅. 힐마는 이 땅에서 어떤 육지 멀미를 겪었을까. 무한으로 확장해가는 자신의 세상을 흔들리지 않는 땅 위로 끌어내리려 애썼던 시도들. 세계에 대한 사랑이 아니고서야 그 노심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전시의 끝에는 그러한 일상적 혼동 속에서도 끝내 자신의 궤적을 전달할 수 있다는 신념을 잃지 않았다는 증명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나는 결국 더운 숨을 토해내는 수밖에.



수영을 며칠 쉬었다. 그 사이 피부가 많이 호전되었다. 눈 주위의 피부 짓무름과 새로운 수경의 시야 이슈로 짧은 멀미를 겪었지만 이미 양서류 인간의 삶에 익숙해졌으므로 수영을 포기할 수는 없다. 며칠 간의 공백만큼 끝내주게 수영을 하고 말리라는 결의를 다지며 못난 수경에 안티포그(수경 내부에 체열에 의한 김 서림이 생기지 않도록 바르거나 뿌려주는 용액)를 바른다. 수경이야 어찌되었든 수영복 만큼은 가장 마음에 드는 것으로 입고 밀린 수영 욕구를 소급해 방출한다. 한 시간쯤 헤엄쳤을 무렵, 눈이 비정상적으로 뻑뻑해지고 앞이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수경을 벗고 옆에 서 있는 수친(수영 친구)에게 말했다.



"갑자기 눈이 안 보여."

짧고 급박한 호흡을 삼킨 그녀는 긴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눈이 게(Crab) 같아!"

귀를 의심하며 다시 물었다.

"뭐......?"

"눈에 게거품이 꼈어!"



눈에 게거품이 낀 현상에서 거슬러 추적해 보니 나의 이 지독한 멀미는 2주 전 구매한 새 안티포그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새 안티포그는 기존에 사용하던 것과 달리 수경에 바르고 난 뒤 '반드시' 세척한 후 사용해야 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존 사용 제품과 마찬가지로 씻어내지 않고 사용하다가 눈가에 약품 독이 올랐던 것이다. 화학 제품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던 내 눈은 이날만큼은 기어코 안티포그 게거품을 물며 토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깜짝 놀라는 수친을 앞에 두고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외쳤다. 잡았다 요놈(?) 드디어 멀미 끝이다. 수영을 금지당하기 일보 직전에 이처럼 '적절한 소환'이라니. 80여 년 전 영면의 순간을 맞은 힐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사랑하는 이들을 두고 질서의 땅을 떠남에 애달팠을까, 마침내 맞이한 긴 육지 멀미의 끝을 기뻐했을까. 이처럼 작은 수경 이슈로 그의 삶이 가늠될 리가 없지. 같은 우주 떠돌이라며 니캉내캉하려 했다니, 참으로 불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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