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모두의 외출이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 되자, 집에서 요리를 해 먹는 일이 많아졌고, 이에 밀키트 사업이 대세가 되어 동네 여기저기 무인 밀키트점이 생겨나고 있다.
무려 20년 전, 대학에서 국문학을 배우면서 내가 온전히 감당하기에는 추상적이고도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공부 방법을 몰랐고, 또 어울리느라 깊이 있게 파고들며 공부할 틈도 없었다. 특히 2학년 2학기 문예사조 과목을 들을 때는 나는 누구, 여긴 어디라는 고민이 정점을 찍으며 결국 휴학을 결단하게 되었다. 고3 때는 언어영역 비문학 지문 읽기가 "즐거운" 학생이었을 정도로 오직 읽는 것이 좋아 선택한 학과였으나, 나의 감수성만으로 감당하기에는 부족한 것이 틀림없었다. (1년 쉬면서 공부도 더 해서 잘해보고자 했으나, 아주 아주 잘 놀았다. 하필 그때 2002 월드컵도 해버렸지 뭐야..)
내가 택한 학문이 한없이 비실용적으로 느껴질 무렵 인문학과는 양끝에 서있을 것 같은 경영학과를 복수전공으로 신청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땐 내가 20년 후쯤엔 삶을 글로 풀어내고 싶어 할 줄 상상도 못 했던 어린 시절이니 그 오만함을 용서하기로 한다. 복수(複數) 전공이지만, 당시 나의 심리로는 비실용적 학문에 대한 복수(復讐)의 느낌으로 선택했다.
그렇게 듣게 된 "소비자 행동론"은 푸근하고 인심이 좋을 것 같은 교수님의 예리하고 뾰족한 수업이었다. 과자의 경우 원가가 상승하면 제품 가격을 올려야 하는데, 그럼 소비자의 반감이 생길 수 있으니 중량을 줄이되 질소를 빵빵하게 넣어 제품의 가격을 유지한다는 이야기. 이럴 수가!! 이런 예시를 친절하게 실어둔 전공서적을 보며 '이건 사기인데?'라는 생각을 했더란다. 이 역시 치기 어린 젊은이의 오만함이니 용서가 필요하다.
그럼 그렇지, 나라는 사람의 시선은 경영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뼛속부터 소비자의 입장에 있었던 것이다. 그 강의를 통해 호기롭게 시작한 실용적인 학문에 대한 욕구는 깔끔하게 사라졌다. 모르고 당하는 것도 기쁘진 않지만, 알고도 당하는 모습을 생각하니 그건 더 자존심이 상하더라.
그래도 그 수업을 들을 때쯤 남들 한번 다 해보는 사업구상을 해봤는데, 그것이 "요리방"이었다. 당시 동기, 선배들과 틈만 나면 노래방, PC방 등을 다니던 때라 ㅇㅇ방을 떠올렸을 거다. 기본적으로는 각 방을 예쁜 파티룸처럼 꾸며두고, 프런트에 냉장진열대를 두는 것이다. 그곳에는 각종 요리 재료가 요리 종류별로 세팅되어 있어 하나씩 집어가서 친구, 연인과 내 입맛대로 요리해 먹으며 노는 곳, 요리방.
아무리 생각해도 대박 아이템이라고 생각해 언젠가 내게 기회가 오면 꼭 써먹어야지 했는데, 세상에! 밀키트라는 멋진 이름으로 나타나버렸다. 이거 분명 내가 20년 전에 생각한 건데!라고 억울해하기엔 내가 너무 아끼느라 누구에게도 발설한 적이 없어 나를 위로해줄 증인도 없다. 나 혼자 내 감이 맞았군! 하고 혼자 한번 껄껄 웃고 말뿐.
이번 크리스마스에도 여러 개의 밀키트의 손길을 빌려 가족 파티를 열었다. 구매 영수증을 보며 다시 한번 쓴웃음을 삼키고, 나의 공상을 현실화해준 대기업에 박수를 보내본다. 그리고는 껄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