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화이트채플

은화의 제국-150년의 경제전쟁

by 정섭

1790년 런던, 그해 늦가을은 유난히 습하고 차가웠다. 매캐한 석탄 연기와 뒤섞인 안개가 도시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날 아침, 토마스 크롬웰은 자신의 집 거실에서 난롯가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어스름한 새벽빛이 창문으로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막 잠에서 깬 막내딸 릴리가 퉁퉁 부은 눈으로 아장아장 다가와 그의 무릎에 올라와 앉아 눈을 비비며 말했다.


"아빠, 그림책 읽어 주세요."


릴리의 작은 손이 그의 턱수염을 간질였다. 크롬웰은 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어리광부리는 아이 소리를 흉내내어 말했다.


"미안하다, 아가. 공장에 일이 생겨서 말이야. 오늘은 더 좋은 기계를 들여놓는 날이란다. 이 기계가 우리 릴리도, 릴리의 친구들도 모두 잘 살 수 있게 해줄 거란다."


부엌에서 나온 아내 사라가 차 주전자를 들고와 크롬웰이 들고 있는 찻잔에 뜨거운 차를 더 부어준 후 주전자를 탁자에 놓고 그의 옆에 앉았다.


"여보,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니에요? 요즘 당신 안색이 말이 아니에요. 밤늦게까지 공장에 계시고... 길드 사람들의 불만도 갈수록 커진다고 들었어요."


사라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남편을 바라봤다. 크롬웰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낮게 한숨을 쉬었다.


"당신은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리고, 이건 피할 수 없는 일이요. 잠시 고통이 따르겠지만, 결국 모두를 먹여살리게 될거요."


그는 최근 자신을 향한 적대적인 시선과 불길한 소문들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횟수는 줄었지만 공장 외벽에는 경고 쪽지가 여전히 붙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낡은 질서의 발악'이라 치부하려 했지만, 밤마다 찾아오는 불면증과 식은땀은 그가 느끼는 불안의 깊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사라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래도... 몸조심해요. 우리의 미래는 당신에게 달려있으니까요."


크롬웰은 아내의 손을 감싸 쥐고 잠시 온기를 느꼈다. 이 아침, 가족의 따뜻함만이 그를 지탱하는 유일한 힘이었다. 이들을 위해서라도, 이 혁신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성공이 결국 더 많은 사람들에게 풍요를 가져다줄 것이라 굳게 믿었다. 그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아담스미스 교수가 쓴 책의 첫 문장을 읽던 순간의 전율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모든 나라의 연간 노동은 그 나라가 해마다 소비하는 생활필수품과 편의품을 근본적으로 제공하는 재원이며'


아담스미스 교수가 쓴 책은, 크롬웰이 가장 애지중지하는 '국부론'이었다. 노동으로 생산한 생활필수품과 편의품의 양을 국부라고 전하는 이 책은, 읽는 순간부터 크롬웰의 성경이 되었다. 강연에서 만난 아담스미스 교수로부터 싸인을 받은 책이었다.


아담스미스 이전에 국왕은 금과 은을 국부라고 했다. 전 세계를 다니면서 약탈해 온 금과 은은 국왕의 창고에 쌓였고, 그것이 국부의 원천이라는 것이었다. 노동으로 생산한 것이 국부라는 아담스미스 교수의 주장은 글로 쓴 혁명이었고, 크롬웰은 자신을 혁명아라고 굳게 믿었다.


공장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다시 차가운 현실 속으로 들어섰다. 굉음과 함께 뿜어져 나오는 증기가 새벽 하늘을 가로질렀다. 크롬웰은 며칠째 밤늦도록 공장을 지켰다. 새로운 증기기관 직조기가 완벽하게 작동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낡은 작업복을 입은 채 기계의 나사 하나하나를 점검하고 원단의 품질을 확인했다.


그날 저녁, 허름한 작업복 차림의 노동자들이 지친 기색으로 교대 근무를 마치고 공장을 나서고 있었다. 다른 날보다 일찍 퇴근 준비를 하는 크롬웰을 보고 그의 오른팔 격인 공장 감독관 조지 휘트모어가 큰 소리로 말했다.


"사장님, 오늘은 일찍 퇴근하십니다. 좋은 일이 있으십니까?"


잘 생각했다는 투였다. 아닌게 아니라 크롬웰은 전례 없이 이른 퇴근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일찍 공장을 나서는 것은 과거에 같은 길드에서 일했던 동료 장인 존 러드의 집에 가기 위해서였다. 존 러드는 최근 병을 얻어 가족들을 돌보지 못 하고 있었다. 이번이 두번째 방문이었다. 크롬웰이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스피탈필즈에 일이 있어 가네."

"꽤 먼 곳입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조심하십시오."


크롬웰이 가는 길을 멈추고 진지하게 말했다.


"내일 아침이면 더 많은 원단이 쏟아져 나올 걸세. 새 기계가 직물 생산 방식을 또 한 단계 혁신적으로 바꿀 것이네. 변화의 파도를 타지 못하면 모두 다 가라앉게 될거야."


그의 목소리는 확신에 가득차 있었다. 휘트모어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휘트모어의 얼굴에도 복잡한 심경이 스쳐 지나갔다. 그 역시 길드 출신이었지만 크롬웰의 비전을 따르기로 결정한 터였다.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는 일을 잃은 옛 동료들에 대한 미안함과, 크롬웰에 대한 길드 장인들의 거세지는 불만의 소리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는 얼마 전 시장에서 만난 옛 동료가 자신에게 던졌던 증오에 찬 시선을 떠올렸다. 그 시선은 분노라기 보다 모든 것을 잃은 자의 절망에 가까웠다. 휘트모어는 애써 평정을 유지하려 노력했지만 그 강렬한 시선을 잊을 수 없었다.


크롬웰은 휘트모어에게 '수고하라'는 말을 하고 공장을 나섰다. 몇 주 전 일요일 처음으로 스피탈필즈에 있는 러드의 집에 갔을 때 그의 집에는 존 러드와 그의 아들만 있었다. 올해 15살인 아들 네드는 말수가 적은 아이였다. 취업을 하고 싶지만 최근 팔을 다쳐 집에서 쉬고 있다고 했다. 존 러드의 걱정은 오로지 아들뿐이었다. 크롬웰은 존에게 약간의 돈을 건네고 아들의 취직 자리를 알아보기로 하고 그의 집을 나왔던 것이다.


크롬웰은 공장 앞에 서있는 영업용 마차 해크니 캐리지에 올라 곧장 존 러드의 집으로 향했다. 차가운 밤공기가 그의 폐 속으로 밀려들었다. 런던의 밤거리는 늘 그랬듯 소음으로 가득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마차 바퀴 소리, 술에 취한 이들의 고성, 그리고 알 수 없는 쇠 부딪히는 소리 같은 것들이 그의 주변을 에워쌌다.


사실 크롬웰은 존 러드의 아들 취직자리를 구했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그의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영국 중부 지방에 있는 노팅엄의 방직공장 애니스톤이 그곳이었다.


마차가 빈민가를 지나 런던 북쪽 외곽에 있는 존 러드의 집에 도착한 것은 꽤 시간이 지난 후였다. 존 러드는 크롬웰의 두 손을 잡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존 러드가 아들 네드 러드를 불러 크롬웰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라고 했다. 크롬웰은 네드의 어깨를 한번 툭 치고 애니스톤의 위치와 찾아갈 사람에 대한 몇 가지 사항이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그제야 네드 러드는 눈을 똑 바로 든 채 크롬웰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밤이 늦어서야 크롬웰은 존 러드에게 미리 준비한 돈 봉투를 건네고 그의 집을 나섰다. 존 러드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과 그래도 뭔가 그에게 도움되는 일을 했다는 마음이 뒤섞인 복잡한 심정이었다. 거리에 다니는 마차도 정류장도 보이지 않아 크롬웰은 잠시 걷기로 했다. 집으로 가기 전에 빈민가인 화이트채플이 있었고 어차피 거기를 지나야 마차를 잡을 수 있었다.


한참을 걸어 화이트채플에 도착해 골목으로 접어들자 크롬웰의 발길이 빨라졌다. 사실 이 골목은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가로등도 없는 골목이었다. 간혹 나타나는 창문 넘어 불빛을 따라 길을 찾아 걸었다. 골목은 꽤 길었다. 한참을 걸어 골목을 거의 빠져나갈 때 쯤이었다. 크롬웰의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한 명의 발소리가 아니었다. 같은 방향으로 가는 행인이라 생각하면서도 크롬웰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등 뒤의 발소리도 크롬웰의 발걸음을 따라 빨라졌다. 빈민가의 낡은 집들이 양옆으로 도열한 채 그를 짓누르는 듯했다. 눅눅한 벽돌에서 뿜어져 나오는 습기와 곰팡이 냄새가 그의 코를 이따금씩 스쳤다. 그는 거의 뛰다시피 했다. 그의 숨이 거칠어지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등 뒤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 소리는 마치 굶주린 짐승의 숨소리 같았다. 그의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갑자기 골목 끝의 막다른 벽이 그의 눈앞에 불쑥 나타났다. 차가운 벽돌이 그의 발걸음을 막았다.


'길을 잘 못 들었나?'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그는 뒤로 돌아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안개 속에서 희미한 그림자 두 개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크로 작은 검은 그림자의 냉랭한 기운뿐이었다. 그림자 속에서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개에 잠긴 듯, 그의 목소리는 희미했지만 울림을 지니고 있었다.


"토마스 크롬웰, 당신은 모든 것을 가졌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잃었다."


마치 책을 읽는 듯한 침착하고 낮은 목소리였다. 그 침착한 목소리에 크롬웰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침착함을 잃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누구냐?"


아무 소리가 없었다. 크롬웰은 다시 소리쳤다.


"내가 빼앗은 것은 아니지 않나?"


그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목구멍을 겨우 지나는 작은 목소리였다. 안개 속에서 분노에 찬 목소리가 또 다시 튀어 나왔다.


"빼앗은 것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당신의 번영과, 우리의 폐허는 어떻게 설명하려는가? 대대로 내려오는 길드의 명예를 내팽개치고 당신이 얻은 것은 탐욕 외에 무엇이 있나? 당신의 그 탐욕이 형제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크롬웰은 뒷걸음 쳐 등 뒤의 벽에 바싹 달라붙었다. 공포에 질린 채 눈앞의 그림자들을 노려봤다. 죽음의 공포가 온몸을 덮쳤다. 이성을 마비시키는 원초적인 두려움.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살아남고 싶다는 절박한 충동만이 가득했다.


"내 힘으로... 런던을 뒤덮은 공장 굴뚝의 연기를 멈출 수는 없지 않소. 이미 시작된 흐름이 나 하나 죽인다고 멈추겠소? 제발… 제발 나를 살려주시오. 내가 무엇이든 해주겠소! 돈이든… 무엇이든!"


그는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외쳤다. 그의 절박한 애원에도 불구하고, 그림자들은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잠자고 있던 그림자가 슬쩍 앞으로 나섰다. 낮고 침착한 목소리의 그림자가 다시 한번 소리를 쳤다.


"멈출 수 없다고? 토마스 크롬웰, 당신을 죽여서라도 우리의 의지를 드러내야겠어. 이로서 우리의 투쟁은 멈출 수 없는 동력을 얻게 될 것이야."


말이 끝나는 것을 신호로 목소리 없는 그림자가 그를 향해 튀어왔다. 크롬웰은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머리에 강한 충격을 느끼면서 비명조차 치를 틈도 없이 크롬웰은 바닥에 쓰러졌다. 쓰러진 크롬웰의 머리 위로 또 다시 충격이 가해졌다.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타격은 멈추지 않았다. 가슴을 향해 몇 차례 가격이 더 가해진 후 타격이 멈췄다. 범인들은 미리 준비한 석탄 덩어리 하나를 던져놓은 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크롬웰의 숨이 서시히 멈추면서 생명의 기운이 사그라졌다. 크롬웰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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