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알프레드 마셜

은화의 제국-150년의 경제전쟁

by 정섭

편지를 꺼내 든 케인즈의 두 손이 떨렸다.


"파레토 교수에게"


파레토의 이름을 부르는 이 첫 구절에서 케인즈는 전율에 휩싸였다. 수십 년 전, 경제학의 거장 마셜이 또 다른 위대한 경제학자 파레토에게 쓴 편지였다. 마셜은 파레토보다 댓살가량 많았지만 동료 학자로 깍듯하게 대하고 있었다. 그랜트가 케인즈의 어깨를 감쌌다. 케인즈는 편지를 들지 않은 왼손으로 그랜트의 손을 잡았다.


"이탈리아에서 바다를 건너온 자네의 긴 편지를 단숨에 읽고, 한 동안 서재 창가에 앉아 런던의 하늘을 바라보았네. 자네가 말한 그 1790년 사건, 그리고 크롬웰이라는 인물의 삶과 죽음, 그 배경에 놓인 길드와 신흥 산업자본가들 간의 대립은 단순한 경제사의 사례를 넘어, 진보와 그 이면의 비극을 함께 품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네. 아담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은 분명 시장의 조화와 효율을 설명하는 탁월한 통찰이었지만, 자네가 지적했듯, 그 손이 때로는 잔혹한 손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네."


케인즈는 편지에서 잠시 눈을 떼고 눈을 감았다. 마셜은 지금 진보의 이면에 감춰진 비극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마셜의 이론도 결국은 세이의 법칙과 아담스미스를 전제로 세워진 것이었기 때문에 이 진술은 놀라운 것이었다. 케인즈는 편지의 다음 내용을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자네가 흥미롭게 던진 질문, 누가 합리적이고 누가 비합리적인가 하는 문제는, 농경시대의 합리성과 원시시대의 합리성이 다르다는 말로 해명될 수 있다고 생각하네. 장인들의 분노와 극단적 행동은 일면 비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생존을 위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네.

이 대목에서 나는 문득, 어느 시대에나 타당한 보편적인 합리성을 표시할 방법은 없을까 상상해 보았네. 혹여 사람마다 선택이 다르더라도, 그들이 느끼는 ‘만족’, 자네가 좋아하는 용어로는 '효용'의 크기가 동일한 경우가 있을 것이라는 가정말일세. 이런 상상이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는 새로운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봤네."


여기까지 읽은 케인즈의 눈에 편지 여백에 파레토가 펜으로 쓴 글씨가 들어왔다.


'효용의 크기가 동일한 점들'


이는 정확히 무차별곡선의 개념이었다. 케인즈는 편지를 계속 읽었다.


"자네가 말한 ‘석탄 조각’의 문양에 대해서도 한마디 덧붙이고 싶네. 두 개의 원이 서로 접하는 형상이라면, 자네 말처럼 그것이 과거와 현재든, 혹은 서로 다른 두 세계든, 두 개의 질서가 맞닿는 경계의 은유라고 해석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쉽고도 일반적인 해석이 아닐까 싶네. 그 경계에서는 언제나 마찰과 충돌이 생기고, 때로는 그것이 폭력이나 파괴의 형태로 표출되기도 한다면 어떨까? 어쩌면 자네의 고민에 적어도 한 가지 해답은 제공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자네가 고백한 ‘예측 불가능한 충동’의 문제는 내가 늘 마음 한켠에 두고 있는 의문이기도 하네. 모든 숫자와 수요공급 함수 뒤에는, 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는, 바로 그것, 예측불가능한 충동이 있기 마련이네. 나는 이를 ‘시장 외적 요소’라고 불러왔지만, 감정이든, 집단적 분노든, 혹은 단순한 우연이든, 그런 충동이 시장을 집어삼킨다면... 결과는 공황적 상황이 될 것이고..., 그렇다면 잔류물은 더 이상 잔류물이 아닌 것이 되겠지...

케임브리지의 여름은 올해도 여전히 축축하네. 부디 건강을 챙기고, 자네의 연구가 계속 빛나길 바라네.

1905년 여름,

자네의 오랜 벗, 알프레드 마셜"


급하게 마무리됐다는 느낌이 드는, 다소 짤막한 편지였다. 예측 불가능한 충동, 공황적 상황, 그리고 잔류물로 이어지는 자신의 논리에 마셜 스스로가 놀란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편지를 덮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랜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메이너드, 마셜은 마셜이네. 이 짧은 편지에 이렇게 많은 이치가 들어있다니 말일세."

"자네가 보기에 가장 특별한 대목은 뭔가?"

"모두 다 특별한데... 굳이 하나를 꼽자면, '어느 시대에나 타당한 보편적인 합리성을 표시할 방법은 없을까 상상을 해 보았네.' 하는 대목이야. 일개 살인 사건을 두고 대가들이 하는 말의 유희로는 최고 수준이 아닌가 싶어."


미소를 띠며 그랜트를 바라보던 케인즈가 물었다.


"그런데 말일세... 좀 이상한 대목은 없나?"

"글쎄..."

"석탄 조각에 대해 말하는 대목 있지 않나? 두 개의 원에 대한 설명 말일세. 두 세계의 마찰과 충돌 까지는 이해를 한다고 해도 폭력과 파괴 같은 단어는 마셜 답지 않게 지나치게 감정적이야..."


케인즈가 심각한 표정으로 두 세계의 폭력적 충돌을 지적하자 그랜트가 잠시 생각한 후 뜻밖의 의견을 냈다.


"마셜은 일종의 변증법적 인식을 고려한 것이 아닐까? '테제'와 '안티테제'의 극한 투장 말일세. 아마 그 투쟁이 끝나면 두 세계를 종합한 새로운 세계인 '신테제'가 나타나겠지. 그러자면 폭력과 파괴는 필연적인 것이고."

"재미있는 추론이군. 두 개의 원에 변증법적 인식을 접목했다... 폭력과 파괴를 통한 변증법적 변화라."


이번에는 그랜트가 물었다.


"그런데 예측 불가능한 충동을 공황과 연관시키는 것은 원래 마셜의 이론이야?"

"아니, 많이 다르네. 시장 참여자의 비이성적 행동이 불황의 원인이라고 보는 것이 마셜의 이론이네. 비생산적 투자나 투기 같은 것이 그런 예이고. 그건 예측 불가능한 충동과는 아주 많이 다르지. 물론 그렇게 해서 초래된 위기도 시장의 자기 조정 기능을 통해 스스로 해소된다는 입장이네."

"그런데 이렇게 사적으로 쓴 편지에서는 예측 불가능한 충동도 하나의 원인일 수 있다고 한 것을 보면, 이 문제를 자신의 경제학적 사고의 한 주제로 생각한 것은 아닐까 싶어."

"자넨 글의 이면을 읽는 탁월한 능력이 있군. 이야기를 듣고 보니 마셜에게 시간이 더 주어졌다면 아마 이 부분에 대한 연구를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야."


케인즈의 칭찬에 어깨를 으쓱해 보인 그랜트가 다시 말했다.


"그런데, 문제는... 만약 브룩스가 이 편지를 읽었다면 그는 예측 불가능한 충동 같은 것에 대한 마셜의 고민보다, 두 세계의 폭력적 대립에 대한 마셜의 언급에 매우 고무되었을 것이 분명해 보여."


케인즈는 동의하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랜트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두 세계의 대립에 대한 마셜의 이야기를 우리 식으로 해석하면, 길드나 공장제의 폭력적 대립 끝에 새로운 질서 내지 이론이 나타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케인즈가 '그럴 수도 있겠다' 하는 표정으로 듣고만 있자 그랜트가 한 마디를 더 붙였다.


"이건 자네에게 아주 좋은 소식이 아닌가?"


케인즈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조금 시간 간격을 두고 그랜트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여기 이 대목, '동일한 만족을 주는 효용점들' 같은 개념은, 뭐라더라 무슨 곡선의 개념 아닌가?"

"맞아, 그 말 자체가 정확히 무차별곡선의 개념이야."


그랜트가 '와우' 하며 놀라는 표시를 했다. 그에 대해서도 케인즈는 특별한 반응을 하지 않은 채 그랜트에게 미소를 지었다. 도서관을 나와 걷는 중에 그랜트가 케인즈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이 편지도 아서 브룩스가 읽었겠지?"


케인즈는 그가 틀림없이 읽었을 것이라 확신했다. 아마도 아서 브룩스는 마셜의 깊은 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폭력과 파괴라는 표현에만 고무되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그것을 실현할 사람이라는 신념이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그 화신으로서 마셜의 제자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랜트와 헤어져 집으로 오는 길에 케인즈는 문득 해리 도슨의 아내가 말한 매킨지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경시청으로 방향을 돌렸다. 톰슨은 케인즈를 반갑게 맞았다. 이제 둘은 거의 파트너가 된 것 같았다.


"어쩐 일이십니까? 연락도 없이."


케인즈는 자신이 피해자인 해리 도슨과 제이콥 모건의 집을 방문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래서 말인데 도슨의 아내인 메리가 말한 매킨지가 어디에서 근무하는지 알아봐 주기 바라네. 우선 씨멘스 브라더스의 동업자라고 했으니까 거기서 시작하면 될 듯하네."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톰슨은 피터슨 경사에게 런던의 기업등록사무소와 상업신용조사문서인 캘리스 디렉터리를 뒤져서 매킨지라는 사람이 있는지를 파악해 보라고 지시했다. 그리 오래지 않아 피터슨 경사가 돌아와 보고했다.


"씨멘스는 기업등록 사무소에 등록된 회사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제1차 세계대전 중에 국유화가 됐고, 이후에 찰스 버치 매킨지가 이끄는 투자전문 컨소시엄에 매각이 됐습니다. 켈리스 디렉터리에도 찰스 매킨지가 주된 투자자로 등록이 되어 있습니다."

"찾았군요, 매킨지."


톰슨은 찰스 버치 매킨지가 이끄는 투자컨서시엄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연락처와 주소를 파악하라고 추가적으로 지시했다. 피터슨경사가 다시 사무실을 나섰다.


그날 저녁 케인즈는 투자컨소시엄 '찰스 버치 매킨지 엔드 컴퍼니'가 있는 코롤라 리가든빌딩으로 향했다. 매킨지는 투자 전문가답게 케인즈교수가 만나자는 요청에 흔쾌히 응했다. 매킨지의 사무실은 12층이었다. 안내되어 들어가는 복도의 창으로 템스강과 세인트폴 대성당이 보였다. 케인즈 생각에도 좋은 위치였다. 안쪽 복도에는 투자한 주주의 명부가 걸려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케인즈교수님"

"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매킨지 씨"


매킨지는 메리로부터 들은 것과 비슷한 이미지의 사람이었다. 몸집은 거대하고 키는 큰 편이었다. 매킨지가 물었다.


"그런데 저를 무슨 일로? 혹시 투자하실 일이 있으시면 제가 특별히 좋은 전문가 소개해 줄 수 있는데."


매킨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케인즈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서 브룩스와의 관계를 알고 싶어서 왔습니다."


매킨지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케인즈 쪽을 노려보듯이 보던 그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아서 브룩스... 내 자문역입니다. 하버드대학 경제학과 교수, 이 얼마나 멋있는 명함입니까? 대외적으로 팔아먹기는 최고 스펙이죠."

"그렇다면 특별히 하는 일은 없는 겁니까?"

"별로 없어요. 우리는 그 명함만 팔아먹으면 됩니다. 아, 가끔 강연은 합니다. 얼굴을 들이밀어야 하니 말입니다."


거침없는 답변이었다. 케인즈는 본론을 꺼냈다.


"최근 씨맨스 브라더스노동조합의 해리 도슨 씨 집을 방문하신 적 있습니까?"


매킨지가 짜증스러운 반응을 했다.


"아이 씨... 아, 죄송합니다... 그 괜히 아서 말을 듣고 찾아갔다가, 그 사람 다음 날 살해당했더라고요."

"아서 브룩스가 무슨 말을 했길래 그를 찾아갔던 겁니까?"

"아니, 회사가 어려운데 임금인상 죽어도 해야겠다는 놈, 가서 협박이라도 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것뿐입니까?"

"네, 그것뿐입니다."


케인즈가 호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내 매킨지에게 건넸다.


"어, 이거."


놀란 매킨지가 뒷말을 잇지 못하고 케인즈를 쳐다봤다. 매킨지가 틀임 없이 은화와 관련이 있다고 판단한 케인즈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물었다.


"브룩스가 무슨 말을 하면서 전달하라고 했습니까?"


놀란 매킨지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케인즈가 다그치듯이 물었다.


"당신 같은 런던 지역의 숨은 부자가 사람을 죽이는 일에 협조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게..."


이러다 살인 사건의 공범이 되겠다고 생각한 것인지 매킨지가 사연을 털어놓았다. 매킨지는 미국 금융시장 진출을 위해 다방면으로 줄을 대던 중에 브룩스를 만났다고 했다. 하버드대학 경제학과 교수라는 명함이 크게 작용했다. 브룩스는 자신도 혼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월가의 은행들, 고위 관료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다고 했고, 이들 보이지 않는 손들의 도움을 받아야 월가 진출이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만약 매킨지가 브룩스의 몇 가지 부탁을 들어주면 월가와 백악관 실세들의 도움을 받는 것은 일도 아니라고 했다. 여기까지 말을 한 매킨지는 그런 관계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표정이었다.


살해 현장에 은화가 떨어져 있었다는 보도를 본 이후 늘 마음 한편이 불안했던 터에 케인즈가 은화 사진을 들이밀자 매킨지는 완전히 심리적으로 압도당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처음과는 대조적으로 많이 움츠러들었다. 케인즈가 다시 물었다.


"브룩스가 전달하라는 말이 있었습니까?"

"... 별말은 없었고, 그저 전달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게 언제였습니까?"

"하루 전날이었어요. 해리 도슨 만나러 가기 하루 전날."

"어떻게 전달했는지 말해 줄래요?"

"도슨 씨가 잘 가는 선술집에서 전달했습니다."


도슨의 아내 메리의 진술과 일치했다. 케인즈는 다시 기습적으로 물었다.


"모건 시장에게도 은화를 전달하는 심부름을 했습니까?"


매킨지는 펄쩍 뛰었다. 두 손을 휘적이며 아니라는 표시를 했다.


"아... 아닙니다. 저는 도슨에게만 전달했습니다. 모건 시장의 일은...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의 태도로 보아 사실인 듯했다. 케인즈가 마지막 질문을 했다.


"도슨 씨 집에서 혼잣말로 아서가 했다는 말, 정확하게 어떤 말입니까?"


매킨지가 케인즈를 한번 보고 말을 했다.


"아서 브룩스가 늘 하는 소리가 있습니다. 제가 거의 외우다시피 하지요. '시장질서를 위배하는 자는 본때를 보여야 한다.'는 문장입니다."


한숨을 쉰 케인즈가 매킨지를 한 번 노려본 뒤 뒤돌아 나왔다.


(토요일에 제10화가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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