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화의 제국-150년의 경제전쟁
이틀 후 런던의 로열 소사이어티 회의실에서는 국제경제학 학회가 열렸다. 이날 초청 연사는 케인즈였다. 빅토리아 시대풍의 장식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고풍스러운 홀은 이른 아침부터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벽에는 아담스미스를 비롯한 경제학 대가들의 초상화들이 학문적 위엄을 더하고 있었다. 세계 각국에서 온 학자들, 신문 기자들, 그리고 젊은 대학원생들까지, 모두가 존 메이너드 케인즈 한 사람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톰슨과 엘레노어도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자리에 함께 했다.
마셜이 세운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아성이 대공황 이후 케인즈의 말과 글 앞에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는 예민한 시기였다. 케인즈가 마이크 앞에 서자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케인즈가 숨을 고르는 동안, 창밖에서 스며드는 런던 특유의 짙은 안개가 무대 뒤쪽의 유리창을 희미하게 덮었다. 케인즈가 첫마디를 뗐다.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좌중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케인즈는 이 말을 한번 더 반복한 다음 말을 이었다.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유방임, 즉 레세페(laissez-faire)의 토대가 되어 온 형이상학적, 일반적 원칙들을 걷어내는 것입니다. 개인이 경제 활동에서 자연적 자유라는 선험적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가진 자나 새로 획득한 자에게 영구적인 권리를 부여하는 계약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위로부터 그렇게 통치되어 사익과 공익이 항상 일치하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기까지 거의 한 문장을 말하듯 쏟아낸 케인즈는 좌중의 분위기를 살피는 듯 잠깐 말을 쉬었다. 이 새로운 생각에 좌중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또한 계몽된 자기 이익이 항상 공익에 부합한다는 결론은, 경제학의 원리로부터 당연하게 도출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이익이 계몽되어 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각자가 자신의 목적, 즉 자기 이익을 추구할 때, 그들은 너무 무지하거나 힘이 없어 그 목적조차 달성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청중 사이에 가벼운 웅성거림이 일었다. 케인즈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우리는 지금,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맹신했던 과거의 실패가 초래한 초라한 현실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시장은 스스로 완전고용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실업은 게으름이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시장 시스템의 본질적인 결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웅성거림이 커졌다.
"아마도 이 시점에서 경제학자들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정부가 해야 할 과제와 하지 않아야 할 과제를 새롭게 구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발맞추어 정치가 해야 할 일은, 민주주의 안에서 그 과제를 달성할 수 있는 정부의 형태를 고안하는 일입니다."
그 순간, 홀 뒤쪽에서 의자가 끌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흐트러짐 없는 쓰리피스 슈트, 금발을 반듯하게 빗어 넘긴 남자가 천천히 일어섰다. 아서 브룩스. 그의 푸른 눈빛은 얼음처럼 차갑고, 그 시선은 청중 사이를 관통해 케인즈에게 직선으로 꽂혔다. 브룩스가 입을 열었다.
“런던 한복판에서 이런 허튼소리를 들을 줄이야. 믿을 수가 없군요, 케인즈 교수님. 당신은 지금 시장의 완벽한 질서에 무지성적인 국가 폭력을 들이밀고 있습니다.”
청중의 일부에서 박수가 나오다 말았다. 그는 여세를 몰아 더 큰 목소리로 몰아붙였다.
“대서양 건너의 어리석은 지도자 루스벨트가 시작한 무모한 실험이, 이곳 런던에서 당신의 입을 통해 그 정당성을 얻고 있군요. 그 실험은 시장의 자정 능력을 완전히 파괴하고, 우리를 더 큰 혼란에 빠뜨릴 겁니다! 아담스미스 이래 수많은 천재 과학자들이 이뤄놓은 경제학의 원리를 부정하는 이런 미친 짓을 당장 걷어치우기 바랍니다.”
홀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일부 사람은 박수를 치고 일부는 브룩스에게 삿대질을 했다. 사람들의 속삭임과 낮은 탄식도 교차했다. 케인즈는 잠시 숨을 고르며 그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하버드대학 아서 브룩스 박사, 당시의 말을 나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대공황에서 당신은 임금을 낮추는 것으로 실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임금은 떨어질 대로 떨어졌지만 실업률은 상승 일로에 있습니다. 당신들은 시장을 신처럼 숭배해 그 제단에 임금 인하의 제물을 바치지만 정작 신은 대공황을 거둘 생각이 없어 보이는군요."
잠시 숨을 고른 케인즈가 더 크게 말했다.
"루즈벨트의 실험이 두려운 당신 같은 교조주의자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금 이 순간에도 고통받고 있는지를 자각하시기 바랍니다. 루즈벨트는 부족하지만 대공황의 어둠 속에 빛나는 정치인이라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하게 될 것입니다."
브룩스는 입꼬리를 비웃듯 올렸다.
“당신이 말하는 불순한 이론은 모두 루즈벨트 같이 무능한 자들이 내세우는 핑계에 불과합니다. 당신의 이론은 결국 국가의 저열한 욕망을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일 뿐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브룩스는 더는 말할 가치가 없다는 듯 몸을 돌려 홀을 빠져나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의 뒷모습을 따라가다 다시 케인즈에게로 갔다.
다음 날 신문에는 국제경제학회에서의 소동이 대서특필되었다. 헤드라인은 엉뚱하게 아서 브룩스 이야기였다. '아서 브룩스, 케인즈를 저격하다.' 혹은 '아서 브룩스, 루즈벨트를 비난하다.' 식이었다. 케인즈는 쓴웃음을 지었다.
리디아가 발레공연팀을 따라 러시아에 간 그날 오후, 케인즈는 자신의 서재에서 고전파 경제학에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에 대해 생각에 잠겨 있다가 그랜트를 집으로 초대했다. 그의 책상 위에는 세이의 저서 "부의 생산, 분배, 소비에 관한 논문"이 펼쳐져 있었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그 가운데 제15장 '생산물에 대한 수요 혹은 시장에 대하여'였다.
"한 가지 상품이 생산되는 즉시, 그 순간부터 그것은 자기 가치 전부에 해당하는 만큼 다른 상품들을 위한 시장을 제공하게 된다는 점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이 첫 문장에서 걸린 케인즈는 벌써 이 문장만 여러 번 읽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 문장은, 생산되는 상품은 반드시 소비된다는 세이의 법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문장에서 핵심어는 '다른 상품'이었다. 모자의 생산이 모자에 대한 수요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생산물, 예컨대 신발이나 의복에 대한 수요를 창출한다는 의미다. 모자를 생산하면 모자 생산자들은 그것을 팔아서 생기는 소득으로 신발도 사고, 의복을 산다. 한 생산물의 생산, 즉 공급은 다른 생산물에 대한 수요를 창출한다. 그러므로 총체적으로 공급은 수요를 창출한다. 해피엔딩이다.
세이는 이 기본 원리를 투자와 저축으로 확장했다. 생산자, 즉 판매자는 하루라도 빨리 팔려고 하고, 물건을 팔아서 돈을 받은 그는 돈을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에 수중에서 빨리 떨쳐내야 하는데, 방법은 두 가지이다. 자기가 쓰든지 이자 수입을 위해 빌려줘서라도 지출하려고 할 것이다. 돈을 빌린 사람도 소비하든 투자하든 쓰기 위해 빌린 것이므로 빨리 떨쳐내려고 한다. 결국 판매액은 모두 소비에 사용된다는 것이다. 이 역시 해피엔딩이다.
아담스미스도 거의 같은 이야기를 소비와 저축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설명한 바 있었다. 소득 중에서 일부는 소비하고 나머지는 저축이 된다. 저축은 투자자에게 빌려줌으로써 투자자가 쓰게 된다. 결국 자기가 직접 쓰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빌려줘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쓰게 하든지 결국 다 소비된다. 해피엔딩.
이 논리가 고전파 경제학이 서 있는 발판이었다. 물론 그에 반발한 학자도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이 맬서스였다. 맬서스는 저축이 제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이유는 매우 상식적이다. 저축이 많다는 것은 투자가 많다는 말인데, 투자가 무한히 이뤄질 수 있느냐에 대해 맬서스는 회의적이었다. 그가 이를 회의적으로 본 것도 상식적이다. 맬서스가 보기에 투자는 '적절하고 유효한 수요'가 반드시 있어야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축은 생산물에 대한 수요를 제공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 수준으로 제한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당대에 리카도와 함께 양대산맥이었던 맬서스가 주류로 편입되지 못 한 이유도 이런 상식적인 주장과 관련이 있었다. 케인즈가 보기에 맬서스는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
생산할 능력이 있으면, 그렇게 생산된 모든 상품은 소비된다는 고전파의 명제가 무너져 내린 세상에서, 진단은 맬서스가 오히려 더 옳지 않을까?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일까? 맬서스가 말한 '적절하고 유효한 수요'는 어떻게 정식화할 수 있을까? 케인즈의 머릿속이 이어질 듯 이어질 듯 이어지지 않는 원을 그리고 있었다. 그런 케인즈를 그랜트가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케인즈가 화들짝 놀랐다. 집중하고 있다 허를 찔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랜트가 얼른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케인즈 교수 댁입니다."
"안녕하세요. 여긴 미합중국 대통령 비서실입니다."
그랜트가 놀라 케인즈를 바라보았다. 케인즈도 누구냐고 입으로 말했다. 수화기를 손으로 막은 그랜트가 '미국 대통령'이라고 속삭이듯 말했다. 케인즈도 놀랐다. 루즈벨트가 전화를 하다니. 케인즈가 수화기를 건네받았다.
"네, 케인즈 교수입니다."
짧은 정적 후, 굵은 미국 억양의 목소리가 들렸다.
“케인즈 교수님, 미합중국 대통령 비서실입니다."
"네, 그런데 무슨 일로..."
"대통령께서 교수님을 워싱턴으로 초청하셨습니다. 뉴딜 정책의 성과와 실패 가능성에 대한 논란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대통령께서는 교수님의 자문을 청하셨습니다."
'하필 지금, 이때에...'
케인즈의 머리를 제일 먼저 스친 생각이었다. 살인사건의 윤곽이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국대통령의 호출이다.
"언제쯤 가면 될까요?"
"빠를수록 좋습니다. 필요한 절차는 런던의 미대사관에 조치를 취해놓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연락 주시면 저도 최대한 빨리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톰슨은 자신도 동행하겠다고 했다. 케인즈는 엘레노어와 톰슨의 동행을 조건으로 사흘 후 미국으로 향했다. 사우스햄프턴을 출발한 여객선은 4일 간 거친 대서양을 항해한 끝에 뉴욕항에 닿았다. 회색빛 하늘 아래, 자유의 여신상이 그늘진 표정으로 항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뉴욕항은 그야말로 두 얼굴을 가진 공간이었다. 부두 가까이에서는 하역 노동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대서양을 건너온 여객선과 화물선들이 닻을 내리면, 크레인과 지게차가 쉼 없이 짐을 옮겼다. 그 속에는 커피 자루, 기계 부품, 유럽에서 들여온 섬세한 유리제품 등이 섞여 있었다. 항구 특유의 짭조름한 바다내음과 석탄 연기의 매캐함이 공기에 뒤섞였고, 굵고 긴 뱃고동 소리가 늦가을 공기를 갈랐다. 마치 이곳만큼은 대공황의 그늘을 벗어난 듯 보였다.
그러나 부두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풍경은 급격히 변했다. 철제 난간 너머, 길가의 벤치와 창고 그림자 아래에는 일거리를 찾지 못한 남자들이 모여 있었다. 허름한 모직 코트에 군데군데 패인 모자를 쓴 채 바람을 피하려 담요를 목까지 끌어올렸지만, 손끝은 여전히 새파랗게 얼어 있었다. 그들은 항구를 오가는 노동자들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단시간 일거리가 떨어지면 우르르 몰려갔다. 그나마 일자리를 얻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부두 옆 노상 카페에는 값싼 커피와 도넛을 파는 가게가 있었고, 거기서 나온 김이 추운 공기 속에서 하얗게 피어올랐다. 안에는 여전히 선원들이 소란스럽게 웃고 떠들었지만, 창밖의 노숙자들은 유리창 너머 그 풍경을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케인즈는 부두의 소음을 뒤로하고, 톰슨 경위, 엘레노어와 함께 펜실베이니아역으로 향했다. 역 내부는 거대한 돔 천장 아래 희미한 황동빛 조명이 드리워져 있었고, 승객들은 무거운 외투 깃을 세운 채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분주히 움직였다. 엘레노어가 표를 파는 창구에서 물었다.
“워싱턴행 특급 편은 몇 시입니까?”
“콩그레셔널 리미티드, 오후 세시 출발입니다. 일곱 시 반 도착 예정.”
기차가 플랫폼을 떠나자, 뉴욕의 회색빛 건물들이 창밖에서 뒤로 밀려났다. 객차 안에서는 석탄 난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번졌다. 맞은편 좌석의 중년 남자가 펼친 신문 1면에 “10월 실업률 21%”라는 굵은 제목이 박혀 있었다. 케인즈는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볼티모어를 지나자, 객차 안은 저녁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워싱턴 유니언역이 가까워진다는 안내방송이 들리자, 케인즈는 코트를 여미며 숨을 깊게 들이켰다. 루즈벨트를 만나는 자리에서 자신이 말해야 할 것, 그리고 그 말이 지닌 무게를 다시 한번 마음속에서 되새겼다.
4시간 반의 여정이 끝나고, 유니언역의 웅장한 대리석 기둥 사이로 저녁의 차가운 공기가 스며들었다. 기차에서 내리자 젊은 남자가 모자를 벗어 들며 고개를 숙였다.
“케인즈 교수님 이시죠? 저는 백악관 비서실의 제임스 클리블랜드입니다. 호텔까지 안전히 모시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같이 가시죠.”
클리블랜드의 뒤를 따라 역의 대리석 홀을 빠져나오자, 플랫폼 끝에 검은 리무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차 옆에 서 있던 운전기사가 클리블랜드를 보자 일행에게 인사하고 문을 열어주었다.
케인즈, 엘레노어, 그리고 톰슨 경위와 클리블랜드는 차에 올라탔다. 차창 밖으로 워싱턴의 늦가을 저녁이 느릿하게 흐르고 있었다. 거리에는 가로등이 드문드문 빛을 뿜었고, 그 불빛 속을 외투 깃을 세운 행인들이 빠른 걸음으로 지나갔다. 대공황의 상처는 이 도시의 중심가에도 숨김없이 드러나 있었다. 몇몇 상점은 ‘For Rent’ 표지판을 걸고 있었고, 닫힌 커튼 뒤에는 오래전부터 불이 꺼진 창들이 이어졌다.
리무진은 곧 윌러드 호텔 앞에 멈췄다. 로비 안 황동 샹들리에는 금빛을 쏟아냈고, 붉은 카펫은 발자국 소리를 삼켰다. 리셉션 뒤에 걸린 대형 시계는 밤 8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클리블랜드는 호텔 리셉션에서 받은 열쇠 세 개를 세 사람에게 각각 건넨 후 말했다.
“내일 아침 8시 30분에 로비에서 뵙겠습니다. 그때부터는 대통령 경호팀이 동행하게 될 겁니다.”
열쇠를 건네받은 톰슨은 잠시 케인즈와 클리블랜드를 바라봤다.
“런던 경찰청에 현재까지 상황을 공유해야 할 것 같습니다. 클리블랜드 비서께서는 제가 현지 경찰 당국과 접촉할 수 있도록 부탁하겠습니다.”
복도 창문 너머로 백악관 방향의 불빛이 멀리 보였다. 방으로 들어서자 벽난로의 따뜻한 느낌이 케인즈를 맞이했다. 책상 위에는 몇 개의 일간지, 두꺼운 편지지와 만년필, 그리고 은색 찻주전자와 컵이 놓여 있었다. 케인즈는 외투를 의자에 걸치고 찻잔에 홍차를 따르며, 신문을 펼쳤다.
'뉴딜 예산안 의회 통과 눈앞'
'10월 실업률 21%, 그러나 증가율은 다소 감소'
'유럽, 파시즘의 그림자 짙어져'
'월가, 금본위제 폐지 이후 혼란 지속'
기분 좋게 볼 만한 기사는 없었다. '케인즈와 아서 브룩스의 공개 논쟁'이라는 타이틀마저 보였다. '정부 개입의 한계와 가능성'이라는 제목의 사설에는 케인즈의 지난 학회에서의 발언이 다시 소개되면서 고전파 경제학의 반박을 함께 다루고 있었다. 케인즈는 신문을 툭 던져놓고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 케인즈는 내일 루즈벨트를 만나서 해야 할 말들을 정리하기 위해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한참 동안 생각나는 대로 긁적인 글귀를 들여다보며 케인즈가 비로소 마음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종이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단기 처방, 소비할 여력, 이를 위한 공공사업, 적자재정의 불가피성, 통화정책만으로는 역부족'
막 일어서서 문 옆에 있는 화장실로 가는 순간 문 쪽에서 미묘한 금속성 마찰음이 들렸다. 케인즈가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철컥... 철컥...'
문의 손잡이를 아주 느리게 돌리는 소리였다. 다행히 문은 잠겨 있었다. 문틈 아래로 희미하게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잠긴 문고리 돌리는 소리는 몇 차례 반복되다가 멈췄다. 문틈 아래 그림자가 움직이나 싶더니 문틈 아래로 뭔가 쑥 들어왔다. 그림자는 발자국 소리조차 없이 사라졌다.
케인즈는 전화를 들어 톰슨을 불렀다. 톰슨이 후다닥 케인즈 방으로 뛰어왔다. 케인즈가 문을 열자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톰슨이 복도를 점검하고 로비까지 뛰어가 상황을 알렸다. 다시 문을 닫고 잠근 후 케인즈는 문틈 아래로 들어온 것을 집어 들었다. 작은 봉투였다. 밀봉되지 않은 봉투 안에는 1실링짜리 은화 한 닢이 들어 있었다. 은화의 표면에는 예의 그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두 개의 원이 접하는.
케인즈의 생각이 순식간에 살해당한 두 사람의 가족의 말로 이어졌다. 모두 죽기 전에 낯선 사람에게 은화를 받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이것은...?'
그것은 경고였다. 드디어 자신에게도 위협의 순간이 가까이 온 것이다. 런던에서 시작된 위협이 대서양을 건너 미국까지 따라온 것이다.
(화요일에 11화가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