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화의 제국-150년의 경제전쟁
잠시 후 톰슨이 돌아오자 케인즈는 엘레노어를 방으로 불렀다. 낯선 그림자가 문틈으로 넣은 봉투와 그 속에 든 은화를 보이자. 두 사람은 놀라는 표정이 됐다. 입술을 굳게 다물고 은화를 살펴보던 톰슨이 다소 의심스러운 투로 말했다.
“브룩스가 노리는 것이 교수님이 맞겠죠?"
엘레노어가 의아한 표정으로 톰슨을 보며 말했다.
"경위님께서는 교수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노린 것일 수도 있다고 보시는 겁니까?"
"교수님을 노렸다면 굳이 미국에 오기까지 기다릴 이유가 없지 않았을까 하는..., 합리적 의심입니다."
케인즈가 그 말에 뭔가 충격을 먹는 듯했다.
"내가 목표라면 굳이 미국에 올 때까지 기다릴 이유... 없었겠지. 그건 톰슨 경위 말이 맞아..."
"그렇다면 루즈벨트 대통령?!"
이렇게 소리를 지른 엘레노어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톰슨을 바라봤다. 케인즈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맞아. 브룩스는 루즈벨트야말로 시장의 질서를 파괴하는 불순물의 우두머리라고 하지 않았던가?'
톰슨이 케인즈의 혼잣말을 알아듣고 그 말을 받아 말했다.
"맞아요. 이미 두 사람을 살해한 자입니다. 그런 자라면 최고 꼭대기에 있는 루즈벨트를 죽이고 싶어 할 가능성이 높지요."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런저런 가능성을 가져다 붙이며 말했다.
"그동안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접근할 방법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교수님이 대통령을 만나는 것을 알고, 그 순간을 노렸을 수 있겠군요. 대통령에게 은화를 전달할 방법도 없을 테니 교수님께 전달한 것이고요."
"맞습니다. 교수님을 만나는 자리에서 루즈벨트를 살해하는 시나리오가 성공한다면 그 상징성은 어마어마할 것입니다."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진행이 되자 케인즈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일을 단순화해야 했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말했다.
“그럴듯한 추리이긴 하지만 현재까지 이는 추측에 불과하네. 다만, 신중하게 움직이되 만약의 경우에 대비할 필요는 있어. 일단 그 가능성을 미국 측에 알리고, 보다 철저한 대책을 세우도록 하게. 톰슨 경위의 역할이 중요해졌네."
톰슨은 클리블랜드로부터 소개받은 현지 경찰에게 그간 영국에서 있었던 은화 살인사건의 수사 내용과 아서 브룩스의 혐의에 대해 자세히 말하고 간밤에 누군가 케인즈의 방에 은화를 두고 간 것까지 설명했다. 그의 경고에 따라 워싱턴 경찰청은 그날 밤늦게 톰슨에게 FBI 요원 한 명을 배정하고 케인즈에 대한 경계를 강화했다. 요원의 이름은 에드워드 필립스였다. 필립스와 톰슨이 호텔 로비에서 만난 것은 밤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톰슨이 말했다.
"브룩스가 직접 손에 피를 묻히지는 않을 겁니다. 누군가를 고용하거나, 자신의 논리에 심취한 광신도를 이용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떤 경우든 그의 입국 기록은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필립스가 현지 경찰에게 아서 브룩스의 입국 기록을 조회할 것을 지시한 후, 두 사람은 백악관 인근의 지도를 살펴보았다. 필립스가 호텔에서 백악관까지의 동선, 그리고 백악관 내에서의 동선을 표시하며 말했다.
"우리 동선 상에서는 대통령 각하를 해할 만한 장소는 없습니다. 그리고 각하께서는 백악관 내에서 케인즈교수를 영접할 계획입니다."
필립스의 말을 듣던 톰슨은 지도에 표시된 거리의 골목길들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문제는 동선 외의 영역입니다."
"동선 외의 영역이라니요?"
"글쎄요. 이곳 지리에 밝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동선 외의 지역도 철저하게 점검해야 합니다."
톰슨의 경고에 필립스는 잠시 굳은 표정을 짓고는 이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동선이 아닌 곳 가운데 의심할 만한 곳을 좀 더 철저하게 점검하도록 조치하겠습니다."
다음 날 아침, 검은색 세단 두 대가 호텔을 출발했다. 앞차에는 케인즈가, 뒤차에는 엘레노어 리드와 톰슨이 타고 있었다. 백악관으로 향하는 대로를 따라 몇 분쯤 달렸을까, 톰슨은 아까부터 따라오는 검은색 세단 한 대를 백미러로 확인했다. 호텔에서부터 따라오는 것 같았다. 좋지 않은 조짐이었다. 톰슨이 백미러를 가리키며 엘레노어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리드 양, 검은 세단 한 대가 따라붙었습니다."
엘레노어가 뒤를 돌아봤다. 아니나 다를까, 세단 한 대가 바짝 붙어서 쫓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백악관으로 진입하는 사거리가 보이는 곳에서 검은색 세단이 톰슨 일행의 차를 급하게 추월해 케인즈가 탄 차 뒤에 붙었다. 케인즈가 탄 차는 이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정된 코스로 달리고 있었다. 톰슨은 앞 차에 경고하기 위해 무전기를 켰다.
"뒤에 수상한 세단이 붙었으니 각별히 조심하기 바란다. 이상"
"알았다. 이상"
잠시 후, 사거리에서 신호가 빨간 불로 바뀌었다. 케인즈의 차가 제일 앞에서 섰다. 그때였다. 그 뒤를 따르던 검은색 세단이 제동은커녕 ‘붕’ 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속 페달을 밟아 케인즈가 탄 차를 그대로 들이받았다.
'쾅'
케인즈가 탄 차가 앞으로 튕겨나가며 한 바퀴를 돌아 사거리 중앙에 섰다.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신호를 받아 앞으로 가려던 차들이 급정거를 했다. 그때 옆 차선에서 트럭 한 대가 쏜살같이 달려왔다. 튕기듯이 달려 나온 트럭은 전속력으로 달려 그대로 케인즈가 탄 차를 옆에서 들이받았다.
'쾅'
아까보다 더 큰 소리와 함께 옆구리를 받힌 세단이 하늘로 치솟았다가 도로에 처박힌 후 두 번을 굴러 신호등을 박고 전복된 채 멈췄다.
"젠장!"
톰슨이 욕설을 내뱉었다. 엘레노어는 두 손으로 입을 막고 비명을 질렀다. 두 사람이 뛰쳐나갔다. 케인즈의 차를 뒤에서 들이받은 세단은 두 사람이 내리자 앞부분이 너덜너덜한 채 샛길로 사라졌다. 트럭에서 운전사가 내렸다. 운전사의 머리에서는 시뻘건 피가 흐르고 있었다. 케인즈의 뒤집어진 차 쪽으로 몇 발자국 옮기던 운전사가 땅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쓰러진 운전사는 기절한 듯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톰슨은 뒤집어진 세단의 뒷 자석 창으로 안을 바라봤다. 뒷 자석에 거꾸로 처박힌 케인즈는 머리에 충격을 받은 것인지 피를 흘리며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안전벨트를 맨 운전사와 조수석의 요원은 다행히 의식이 있었다. 엘레노어가 깨진 창문 사이로 운전사를 꺼내는 사이 조수석의 요원은 피투성이가 된 채 반대 방향으로 기어 나왔다. 차에서 휘발유가 새고 있었다. 톰슨은 깨진 창문 사이로 케인즈를 끌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교수님! 케인즈 교수님! 정신 차리십시오!"
그러나 찌부러진 문틈이 워낙 좁아 사람을 꺼내는 일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차량에 불이 옮겨 붙기 시작했다.
엘레노어 역시 톰슨을 도와 케인즈를 끌어내기 위해 사력을 사했으나 쉽지 않았다. 차량 엔진 쪽에서 붙은 불이 차의 실내에 옮겨 붙어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도로를 정리하던 경찰관 하나가 뛰어와 두 사람에게 소리쳤다.
"차가 폭발합니다. 나오셔야 합니다!"
엘레노어는 그 소리를 듣자 비명을 지르며 오히려 차 안으로 더 들어가려 했다. 케인즈를 구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톰슨이 한숨을 쉬며 엘레노어의 어깨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할 만큼 했어요. 위험합니다."
"그래도..."
경찰관이 두 사람을 떠밀다시피 차에서 멀어져 뛰는 순간 차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콰쾅'
세 사람이 동시에 도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엘레노어가 몸을 틀어 누운 자세를 한 채 고개를 들어 차를 봤다. 화염에 둘러싸인 차량에서 검은 연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톰슨은 몸을 일으켜 주변을 살폈다. 트럭 운전사를 앰뷸런스에 싣는 모습, 사람들의 경악하는 모습, 교통을 정리하는 경찰들의 모습이 보였다.
문득 은화에 생각이 미친 톰슨이 앰뷸런스로 뛰어갔다. 트럭 운전사는 오른손을 꽉 쥐고 있었다. 그의 손을 비틀어 펴자 은화가 나왔다. 톰슨은 놀라 은화를 집어 들었다. 두 개의 접하는 원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임무를 완수한 트럭 운전수가 은화를 케인즈의 시신 옆에 두기 위해 내렸다가 중간에 쓰러진 것이 틀림없었다. 은화를 현장을 수습 중인 경찰에게 전달하고 톰슨은 품에서 무전기를 꺼내 필립스를 호출했다.
"독수리 이상 없나? 이상."
"독수리 이상 없다. 귀소는? 이상."
"좋지 않다. 이상."
톰슨은 무전기를 내려놓으며 안도와 동시에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아서 브룩스 일당이 미끼를 물면서 기만 작전은 성공했지만, 필립스의 예측대로, 그들은 케인즈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던 것이었다.
그 시간 무사히 백악관에 도착한 케인즈는 사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불타는 세단을 바라보며 엘레노어가 톰슨에게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무고한 사람이 죽었군요..."
톰슨이 고개를 떨구며 답했다.
"그러게요."
그렇게 말한 톰슨이 엘레노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필립스 요원 덕에 케인즈 교수는 살았습니다."
전날 밤, 톰슨이 동선 외의 지역에 대한 주의를 하자 필립스 요원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케인즈 교수를 미리 빼돌리자는 것이었다. 대신 다른 요원 한 명을 케인즈 교수처럼 꾸며서 마치 진짜 케인즈가 출발하는 것처럼 하자는 것이었다.
"물론 당신의 추론에 의하면 케인즈 교수가 아닌 대통령 각하가 타깃이지만, 이는 만에 하나를 대비하는 것입니다."
"좋습니다. 그럼 오늘 필립스 요원이 케인즈 교수와 함께 다른 숙소로 옮기시고, 저와 리드 기자는 아침에 정상적으로 호텔에서 출발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케인즈는 새벽에 필립스 요원과 함께 백악관 인근의 옥시덴탈 호텔로 옮겼다. 아침 해가 밝자 톰슨과 엘레노어가 어떤 소동을 겪는지 까맣게 모르는 케인즈는 필립스와 함께 백악관으로 향했다.
케인즈와 필립스가 탄 리무진이 백악관 북문 경비초소 차단기 앞에 천천히 멈춰 섰다. 대공황의 불안과 정치적 긴장이 감도는 시기라 백악관의 경계는 삼엄했다. 경비병 두 명이 차량 양옆으로 다가와, 먼저 운전기사와 동승자의 신분을 확인했다.
필립스 요원이 조수석 창문을 내려 자신의 FBI 요원 신분증과 뒤좌석에 앉은 케인즈의 여권, 그리고 초청장을 함께 제시했다. 경비병은 대통령 면담 예정자를 기록한 명단집을 펼쳐 이름과 국적, 초청 주체를 대조한 뒤, 검문소 초소로 들어가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귀빈 2명 확인. 케인즈 교수 일행 들어갑니다.”
그제야 차단기가 서서히 올라갔다. 리무진이 북문 안쪽 귀빈 주차구역에 도착하자 안내병이 차량 문을 열었다.
“여기서 하차하셔야 합니다. 따라오시죠.”
케인즈와 필립스는 귀빈 전용 출입구로 안내되었다. 책상 위에 고풍스러운 방명록이 놓여 있었고, 페이지마다 세계 각국 인사들의 서명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안내병이 만년필을 건네며 말했다.
“성명과 직책, 오늘 날짜를 기입해 주십시오.”
서명이 끝나자 경비병은 하얀색 ‘GUEST’ 배지를 내밀었다.
“백악관 안에서는 반드시 이 배지를 패용해 주십시오.”
일행은 비서실 직원의 인도로 대리석 복도를 따라 걸었다. 복도 끝에는 대통령 집무실로 이어지는 서쪽 날개 입구가 있었다. 갈림길 직전에서 직원은 오른쪽 문을 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이곳에서 대기하시죠. 대통령 각하께서 곧 호출하실 겁니다.”
그들이 들어선 곳은 외교 접견실이었다. 벽난로 위에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해군 차관보 시절'이라는 명찰이 적힌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가 소아마비에 걸리기 전에 찍은 멋진 항해 사진이었다. 창문 너머로 늦가을 햇살이 미약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바닥엔 두터운 페르시아 카펫이 깔려 있었고, 중앙에는 은색 티포트와 백악관 문장이 새겨진 찻잔이 놓인 작은 티테이블이 있었다.
안내했던 직원이 필립스를 불러냈다. 잠시 후 필립스가 뒤늦게 도착한 엘레노어와 함께 들어왔다. 케인즈와 인사를 한 엘레노어의 표정이 어두웠다. 최대한 수습하긴 했지만 엘레노어의 옷에 묻은 흔적은 그대로였다. 케인즈가 물었다.
"잘 잤어요? 별일 있는 건 아니죠?"
"네... 아뇨..."
"무슨 일 있었어요?"
"..."
"톰슨 경위는 어디 있는 거요?"
"일이..."
엘레노어가 뭔가 말을 하려는 순간 문이 열렸다. 노크 소리가 나더니 백악관 비서실장이 환한 얼굴로 들어왔다.
“케인즈 교수님, 그리고 리드 양. 백악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비서실장 루이스 하우입니다. 루이스라고 부르세요. 가시죠, 대통령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필립스는 그 자리에 남고 케인즈와 엘레노어만 대통령 집무실로 향했다.
(목요일에 제12화가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