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화의 제국-150년의 경제전쟁
워싱턴 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은 케인즈 교수의 마지막 발언이 끝난 후에도 한동안 열기와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수많은 카메라 플래시가 번개처럼 터지고, 기자들은 서로를 밀치며 소리쳤다.
"아서 브룩스는 만나 보셨습니까?"
"살인 사건에 대해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FBI는 이 사건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질문은 마치 난무하는 총탄처럼 쏟아졌지만, 케인즈는 마이크를 내려놓은 채 굳은 표정으로 연단을 내려왔다. 톰슨 경위와 필립스 요원이 케인즈의 양쪽에 서서 함께 나왔다. 엘레노어는 벅찬 감정을 억누르며 그의 뒤를 따랐다. 케인즈의 기자회견은 전 세계를 짓누르는 거대한 경제 위기 앞에서 '보이는 손'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세 사람은 혼란스러운 기자들의 물결을 헤치고 프레스센터를 빠져나왔다. 리무진의 푹신한 시트에 몸을 싣자, 비로소 긴장의 끈이 풀리는 듯했다. 케인즈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응시했다. 회견장을 빠져나오는 기자들은 삼삼오오 걸어가며 자기들끼리 뭔가 격렬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리무진이 안전 가옥으로 향하는 동안, 그는 방금 있었던 기자회견을 다시 한번 반추했다. 아서 브룩스를 살인자로 단정하며 던진 공개 도전장, 그 이유에 대한 설명, 그리고 뉴딜 정책에 대한 강력한 지지 등. 케인즈로서는 인생의 모든 것을 건 도박이었다. 가장 궁금한 것은 도전장을 받아 든 아서 브룩스가 어떻게 나올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 어떤 경우라도 케인즈로서는 당당하게 맞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안전 가옥에 도착하자 케인즈는 거실 소파에 몸을 던졌다. 긴장이 풀리면서 온몸의 피로가 마치 늪처럼 그를 짓눌렀다. FBI 요원 한 명이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얇고 거친 종이 몇 장이 들려 있었다. 신문이었다. 희미한 잉크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필립스가 건네받은 신문을 펼쳐 보더니 말했다.
"교수님, 벌써 호외가 나왔습니다."
필립스는 놀란 얼굴이었지만 표정은 밝았다. 케인즈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기자회견 마친 것이 불과 몇 십분 전인데 벌써 호외라니. 케인즈가 벌떡 일어나 필립스가 건넨 호외를 받아 들었다.
호외 1면에는 케인즈가 기자회견에서 은화를 내미는 사진과 함께 굵은 활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케인즈 교수, 런던 연쇄살인 용의자 공개 고발'이라는 제목 아래에 '하버드대학 아서 브룩스 교수 지목'이라고 부제가 달려 있었다.
기사는 케인즈의 기자회견 내용을 상세히 담고 있었다. 런던에서 벌어진 두 건의 연쇄 살인 사건에서 '두 개의 원' 문양이 새겨진 은화에 이르기까지 자세하게 쓰고 있었다. 호외의 뒷장에는 '희대의 오보'라는 제목으로 케인즈로 오인된 자동차 사망 사고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런데 이런 호외의 내용 가운데 케인즈의 눈에 띈 것은 한 귀퉁이에 있는 박스 기사였다. 기사의 제목은,
'FBI, 아서 브룩스 신속히 수사해야'
였다. 기사는 케인즈교수의 기자회견은 사실상 공개적이고 공식적인 고발로써, FBI는 런던 경찰청과 함께 아서 브룩스에 대해 즉각 수사에 돌입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케인즈는 기사를 필립스에게 보여주었다. 필립스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올 모양입니다."
케인즈가 고개를 끄덕이던 그때, 서재의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필립스가 얼른 뛰어가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를 듣자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필립스는 수화기를 막은 채 케인즈를 바라보았다.
"교수님, 루즈벨트 대통령각하입니다."
케인즈도 놀라 수화기를 넘겨받았다. 그의 손이 살짝 떨렸다.
"케인즈입니다."
"케인즈 교수, 루즈벨트입니다."
대통령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다정했다.
"괜찮으십니까? 기자회견 봤습니다. 교수의 용기에 깊은 존경을 표합니다. 정말 용기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그 기자회견은 제게도 큰 용기를 주었습니다."
케인즈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루즈벨트는 그의 이론을 '추상적'이라고 비판했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케인즈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고맙습니다, 대통령님. 저는 괜찮습니다."
"케인즈 교수, 기자회견을 통해 교수의 이론이 단순히 책상 위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교수께서 이야기한 '보이는 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제 좀 더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케인즈는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케인즈 교수, 나는 앞으로 뉴딜 정책을 좀 더 적극적으로 펼칠 생각입니다. 의회의 보수적인 의원들을 설득할 논리는 준비할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교수의 기자회견이 모든 것을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론이 현실을 설명하고 예측하는 것이라면, 그 이론을 현실로 만드는 것은 정치의 역할입니다. 나는 그 역할을 하겠습니다."
"..."
케인즈의 뭉클한 마음을 눈치챘는지 루즈벨트가 살짝 웃는 듯하더니 말했다.
"아서 브룩스는 FBI가 처리할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전화가 끊어진 후, 케인즈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루즈벨트는 그의 지적 고민에 답을 준 것이다. 자신의 이론이 옳았다는 증명이 아니라, 자신의 이론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싸우겠다는 약속을 받은 것이다. 이것은 기자회견이 예상하지 못한 강력한 동맹이었다. 케인즈가 그저 듣고만 있다가 끊는 것을 보고 일행은 어리둥절해 케인즈의 얼굴을 살폈다. 케인즈가 소파로 돌아와 일행을 보고 말했다.
"대통령의 약속을 받았네. 뉴딜도, 그리고 아서 브룩스도."
사람들이 감격하는 표정이 되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때,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이번에는 백악관의 스티븐 얼리 비서관이었다.
"케인즈 교수님, 백악관 대통령 비서실 스티븐 얼리입니다. 하버드 대학의 앨빈 한센 교수께서 케인즈 교수님을 만나고 싶다고 전해왔습니다."
'앨빈 한센이라면...'
하고 생각하던 케인즈는, 그가 뉴딜에 대해 우호적인 글을 쓴 것을 본 기억을 되살렸다.
"한센교수가 나를 말입니까?"
하고 말하자 스티븐 얼리가 다소 즐거운 음색으로 말을 이었다.
"교수님과 대통령 각하와의 면담, 사망 사고 오보, 그리고 오늘 아침 기자회견을 보고 백악관으로 연락을 했습니다. 교수님과 연락할 방법을 찾는다고 했습니다. 교수님의 열렬한 팬인 것 같은데, 만나보시겠습니까?"
케인즈는 당장 답하기보다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하버드라면 아서 브룩스의 홈그라운드가 아닌가? 게다가 당장 시급한 일도 아니었다.
"제가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한센교수는 가능하면 하버드 대학에서 만나고 싶어 합니다. 그것도 함께 고려해서 결정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전화를 놓고 잠시 고민에 빠진 케인즈가 소파에 앉아 한센 교수 이야기를 꺼냈다. 엘레노어는 반색했고 톰슨은 주저했다. 톰슨이 먼저 의견을 냈다.
"신중할 필요가 있는 초청입니다. 우선 위험합니다. 하버드는 브룩스가 있던 곳입니다."
"맞아, 나도 그게 마음에 걸리긴 하네."
케인즈의 말을 듣던 엘레노어가 나섰다.
"교수님, 하지만 앨빈 한센 박사님은 하버드대학의 다른 교수들과는 다른 분입니다. 루즈벨트대통령조차 교수님의 이론을 '추상적'이라 비판 조로 말했지만, 한센교수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버드는 위험할지 몰라도 한센이라는 우군이 하버드에 있다면 교수님께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그것도 맞아. 그가 혹시 브룩스에 대해 우리가 모르는 정보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지."
두 사람의 의견을 듣고 케인즈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톰슨은 안전에 대한 우려를, 엘레노어는 우군을 얻는다는 장점을 이야기했다. 그의 마음속에서도 두 개의 목소리가 충돌했다. 한편으로는 브룩스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에 대한 조심스러움이, 다른 한편으로는 정면 승부에 대한 의지가 맞섰다. 그러나 기자회견을 할 때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결심을 했던 케인즈가 아니었던가. 아서 브룩스가 뿌리내린 이론의 근원지인 하버드를 피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케인즈는 톰슨을 바라보며 말했다.
"톰슨 경위. 기자회견을 할 때 내가 가졌던 결심을 존중해 주면 좋겠네. 물론 자네 말처럼 위험하겠지만 차라리 하버드로 가는 것이 어쩌면 아서 브룩스를 압박하고, 자신감을 보여주는 좋은 기회일 수도 있네."
톰슨이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그는 분명 다음 계획을 세우고 있을 겁니다. 자동차 사고를 눈앞에서 목격한 사람으로서 한 마디 드리자면..."
톰슨은 말을 중단했다. 뭔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가만히 있던 톰슨이 겨우 진정하고 말을 이었다.
"아서 브룩스는 미치광이입니다. 그가 어떤 모습으로 케인즈 교수님 앞에 나타날지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수님의 생각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는 어떤 결정을 하시든 교수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케인즈도 뭔가 감정이 치미는 듯했다. 잠시 머뭇하던 케인즈가 톰슨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톰슨 경위의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네. 그러나 자네가 최선을 다해 나를 돕고 있으니 나는 걱정이 없네. 나 역시 안전과 관련해서는 톰슨 경위의 말을 무조건 따르겠네. 내 마음을 이해해 줘서 고맙네."
톰슨이 케인즈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하자 엘레노어가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봤다.
다음 날 새벽 케인즈를 비롯한 톰슨, 엘레노어, 그리고 필립스는 보스턴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톰슨의 의견에 따라 케인즈는 최대한의 보안 조치에 자신을 맡겼다. 우선 한센으로부터의 초청은 일체 비밀에 부쳤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케인즈가 워싱턴에서 계속 루즈벨트대통령의 자문역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일행은 일반인에 섞여 자연스럽게 이동하기로 했다. 경호 인력은 백악관의 협조를 얻어 정예 요원으로 구성했다. 필립스가 경호 책임을 맡았다. 케인즈는 톰슨 경위와 필립스 요원 사이에 서서 기차표를 쥐고 있었고, 그 뒤에 엘레노어 기자가 서 있었다.
“교수님, 뉴욕까지는 ‘브로드웨이 리미티드’ 편 1등석입니다. 그다음은 뉴헤이븐에서 보스턴으로 가는 급행을 타셔야 합니다.”
톰슨이 짧게 설명했다. 그는 주변 군중 속에서 낯선 시선을 경계하듯 두리번거렸다. 역사를 지나 플랫폼으로 들어가자 증기기관차가 새벽 햇빛 속에서 윤기를 뽐내면서 들어왔다. 허연 연기가 하늘로 솟아오르고, 객차 창문에서는 이미 자리를 잡은 승객들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1등석 칸 입구에는 풀먼 포터가 손님들의 짐을 받아 1등석 객차로 옮기고 있었다.
케인즈 일행이 탄 1등석 객차 안은 짙은 마호가니 목재와 붉은 가죽 시트로 꾸며져 있었다. 창가에는 은색 손잡이가 달린 작은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커피가 담긴 은주전자와 달걀 요리가 차려져 있었다. 드디어 기관차가 출발했다. 창밖으로 워싱턴 시내와 포토맥 강이 서서히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목요일에 제15회가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