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권투 클럽

은화의 제국-150년의 경제전쟁

by 정섭

워싱턴 D.C.에서 출발한 지 12시간 조금 지나 일행은 보스턴 유니언역에 도착했다. 보스턴의 저녁은 워싱턴보다 훨씬 더 차갑게 느껴졌다. 기차에서 내리는 인파로 역사는 사람으로 가득 찼다. 일행은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떠밀리다시피 플랫폼을 겨우 나오는 케인즈 앞에 한 중년 남성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둥근 안경 너머로 지적인 눈빛이 번뜩이는, 짧은 금발 머리의 남자였다. 그는 케인즈 앞에 서자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케인즈 교수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앨빈 하비 한센입니다."


케인즈가 반갑다는 인사를 하기도 전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이며 터졌다. 역 한쪽에서 잠복하고 있던 기자들이었다. 케인즈의 등 뒤에서 필립스가 낮게 소리쳤다.


"젠장!"


한센이 기자들의 기세에 놀라 뒤 돌아 케인즈 옆으로 섰다. 카메라 플래시는 연속으로 터지고 있었다. 톰슨은 급히 케인즈와 한센의 앞을 가로막았고, 엘레노어는 기자들에게 소리치며 그들의 접근을 막아섰다. 톰슨이 한센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정작 한센이야말로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습니다."

"괜찮습니다."


케인즈가 별 것 아니라는 식으로 대답하고 아무 일 없는 듯 출구를 향해 걸었다. 다소 안심이 된 한센이 뒤이어 변명을 했다.


"저는, 백악관 비서실에 교수님과 만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을 뿐이었습니다. 교수님의 기자회견 이후 보스턴에서도 관심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한센 교수. 오히려 이렇게 자연스럽게 알려지는 것도 괜찮습니다. 너무 미안해하지 마세요."


플래시가 터지자 일반인들의 관심도 몰리기 시작해 역사를 벗어나는 것이 더 어려워졌다. 덩달아 톰슨과 필립스는 케인즈를 보호하느라 땀을 빼야 했다. 일행은 인파를 헤치고 겨우 한센이 운전하는 세단에 올라탈 수 있었다. 차가 출발하자 끝까지 따라오던 기자들의 마지막 플래시 세례가 드디어 끝났다.


"케인즈 교수님, 수고하셨습니다."


한센이 미안한 마음을 담아 새삼스러운 인사를 건넸다. 케인즈는 웃으며 한센을 위로했다.


"아닙니다. 재미있네요."


숙소인 파커 하우스 호텔은 보스턴 유니언역에서 불과 1킬로미터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필립스는 안전가옥을 권했지만 케인즈는 이왕 자신의 보스턴행이 드러난 이상 안전가옥에 숨어 들어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고 했다. 불과 5분 남짓한 시간 후에 일행은 파커 하우스 호텔에 도착했다.


체크인 수속이 끝나자 필립스는 케인즈와 톰슨, 그리고 엘레노어에게 룸키를 각각 하나씩 전달했다. 12시간이 넘는 여정으로 피로에 지친 일행은 다시 모일 겨를 없이 각자의 방에서 쉬거나 잠에 들었다. 케인즈 역시 한센에게 아침에 호텔로 와달라고 말하고 일찍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케인즈의 방문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났다. 막 아침 커피를 내리려던 케인즈가 문을 열었다. 필립스였다.


"아침 일찍 죄송합니다."


케인즈가 필립스를 안으로 들이고 커피를 권했다.


"잠도 모자랄 텐데 이렇게 아침 일찍 무슨 일인가?"

"어젯밤에 FBI가 브룩스의 집과 연구실에 대한 수색을 했습니다."

"전광석화와 같군."

"백악관의 특별한 지시가 있었습니다. 브룩스는 현장에 없었다고 합니다."


필립스에게 톰슨과 엘레노어에게도 이 사실을 전해달라고 말하고 케인즈는 돌아서서 소파에 앉았다. 생각만큼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무거웠다. 하버드대학 경제학과 교수의 집과 연구실에 대한 압수 수색이라, 당연한 결과라는 생각보다 서글픈 생각이 먼저였다. 한센이 온 것은 호텔 라운지에서 일행이 아침 식사를 마친 직후였다.


한센이 라운지로 올라오자 톰슨이 물었다.


"한센 박사님, 아서 브룩스는 지금 어떤 상태입니까? 수색을 당했다던데 소식을 좀 아시는지요?"


한센의 표정이 굳어졌다.


"케인즈 교수님의 기자회견 이후 아서 브룩스 교수는 학교에서는 종적이 없습니다. 어젯밤에 브룩스 교수의 집과 연구실이 수색당했다는 소식을 아침에 들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케인즈를 제외한 톰슨, 필립스, 엘레노어는 그 소식을 듣고 안도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FBI가 공식적인 수사에 나섰다면 케인즈의 신변은 헌결 안전해진 것이었다. 한센은 호텔에 오면서 사 들고 들어온 신문을 펼쳐 보였다. 1면에 케인즈의 사진이 대문짝만 하게 실려 있었다.


'케인즈 교수, '보이지 않는 손'의 성지 하버드에 오다!'


기사는 케인즈가 한센의 초청으로 하버드 대학을 방문했으며, 뉴딜 정책에 대한 강연과 함께, 상황에 따라 아서 브룩스의 범죄행위와 관련된 조사에도 응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기사는 케인즈가 브룩스의 홈그라운드에 찾아왔다는 점을 부각하며 둘의 대결구조를 강조했다.


라운지에서 내려온 케인즈 일행은 한센의 차로 그의 연구실로 갔다. 차창 밖으로 찰스 강이 펼쳐졌다. 미세한 물결이 늦가을 햇빛을 잘게 부수며 반짝였다. 하버드의 붉은 벽돌 건물들이 줄지어 나타나고, 벤치에 앉아 책을 읽거나 잔디밭을 서성거리는 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한센은 연구동의 좁은 복도를 성큼성큼 걸었다. 연구실의 문을 열며 한센이 말했다.


“브룩스 교수는 하버드에서 십 년을 보냈습니다. 금융경제학을 강의했지만, 그의 저녁은 늘 바빴습니다. 학회도 세미나도 빠지는 법이 없는 성실한 교수였죠.”


연구실의 벽에는 마셜이 최초로 그린 수요·공급 곡선을 새겨 넣은 동판이 걸려 있었다. 책장 가장 높은 칸에 낡은 노트들이 서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한센이 사다리를 끌어다 그 가운데 한 권을 꺼내며 설명을 이어갔다.


“하버드 내부에 '업타운 포럼'이라는 이름의 클럽이 있습니다. 결성된 지는 3년쯤 됩니다. 대공황이 막 시작되어 기세를 떨치던 시점이었습니다. 주로 월가와 연결된 동문들이 워싱턴의 관료를 포함한 교수들과 친교 하는 모임입니다. 자선과 장학을 명분으로 삼고 있지만, 실제로는 시장질서에 관한 논리를 제련하는 일종의 자유주의자들의 클럽입니다. 저도... 멤버의 하나지만 불성실한 멤버입니다. 브룩스 교수는 포럼의 연단에 자주 섰습니다. 본인이 연단에 서는 걸 좋아했고, 언변도 좋은 편입니다.”


한센이 서가에서 꺼낸 노트의 표지에 '업타운 포럼'이라는 제목이 달려 있었다. 한센은 케인즈 쪽으로 노트의 방향을 돌려 케인즈에게 보였다. 결성 시점부터의 자료들이 정리된 스크랩 노트였다. 회의자료, 신문기사 등이 스크랩되어 있었다. 케인즈가 노트를 들고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는 그때 카드 하나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키드에 집중됐다.


"이것은..."


케인즈가 고개를 숙여 카드를 한 손으로 집어 들었다. 카드에는 두 개의 원이 서로 접하는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여기도 있군.”


케인즈가 의아한 표정으로 한센을 바라봤다. 그런 케인즈를 보며 한센이 말했다.


“2년 전쯤에 열린 포럼에서 참가자 전원에게 배포된 카드입니다."


한센의 말을 듣자 케인즈가 톰슨을 바라보고 말했다.


"2년 전이면 브룩스가 마셜의 육필 논문을 열람했던 시기와 일치하는군."

"그런 것 같습니다."


둘의 대화를 듣던 한센이 말했다.


"카드의 뒷면을 보십시오."


케인즈가 카드를 뒤집었다.


‘질서와 질서의 조우...’


그때였다. 연구실의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한센이 '전화올 곳이 있었나?' 하는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


"네, 한센 교수입니다."

"..."


대답이 없자, 한센이 케인즈를 바라봤다.


"여보세요. 한센입니다."

"저... 아서입니다."


한센이 살짝 놀라면서 급히 대답하느라 거의 헛소리가 나올 뻔했다.


"네, 브룩스 교수, 잘 지냅니까?"

"다름이 아니라..."

"네 말씀하세요."

"케인즈 교수 옆에 계시죠?"


한센이 케인즈를 쳐다봤다. 찾는다는 제스처를 하자 케인즈가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나 수화기를 들었다.


"케인즈... 입니다."

"케인즈 교수님... 만나고... 싶습니다."


케인즈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좋습니다. 언제 어디서 만날까요?"


그날 한센과 점심 식사를 마친 후 호텔에 돌아온 일행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 케인즈의 방으로 몰려갔다. 톰슨은 강경하게 반대했다.


"상대가 장소와 시간을 정한 만남에 무조건 응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더구나 상대는 아서 브룩스입니다. 교수님이 그의 살인 혐의를 공개적으로 고발한 사람입니다."


엘레노어도 비슷한 의견을 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교수님이 브룩스를 매장시킨 거잖아요? 그 원한이 어마어마할 텐데 왜 굳이 그렇게 은밀하게 만나려 하는 거예요?"

"맞아요. 강력히 재고하시기 바랍니다."


케인즈가 필립스를 봤다. 필립스는 곤란한 듯 말했다.


"교수님이 어떤 결정을 하시든 최선을 다해 경호하는 것이 저희들의 역할입니다."


케인즈가 고개를 끄덕이며 톰슨과 엘레노어를 바라봤다.


"내가 미덥지 않더라도 필립스 요원을 믿고 맡겨주기 바라네. 그리고... 내가 먼저 내민 도전장이네. 적어도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그의 변명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네,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이렇게 말하고 세 사람을 훑어본 후 미소를 띠고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들 말게... 그리고 한센 교수가 동행한다지 않나."


세 사람이 더 이상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필립스가 케인즈에게 시간과 장소를 다시 확인했다. 아서 브룩스가 케인즈에게 만나자고 제안한 장소는 하버드 스퀘어에서 세 블록 떨어진 케빈 스퀘어의 오래된 권투 클럽이었다.


그날 저녁 다섯 시, 케인즈와 한센이 케빈 스퀘어의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톰슨과 필립스는 한 시간 전에 권투클럽에 도착해 권투클럽 안과 밖을 샅샅이 살피고 골목 어귀에 대기하고 있었다.


권투 클럽에 들어가자 땀과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천장에 매달린 샌드백과 가운데에 있는 링의 밧줄은 마치 축 처진 해먹 같았다. 벽에는 먼지를 뒤집어쓴 누군가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고, 바닥에는 톱밥이 깔려 있었다.


두 사람의 등 뒤로 문 닫히는 소리가 난 것과 거의 동시에 맞은 편 뒷문 쪽에서 그림자 하나가 들어왔다. 아서 브룩스였다. 그는 걸어 들어와 링을 돌아 케인즈 앞으로 왔다. 브룩스는 손을 앞으로 뻗어 악수를 청했다. 그는 평소와 달리 넥타이도 메지 않은 채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눈 밑 다크 서클이 깊이 드리운 것으로 봐서 그가 몇 날 며칠 매우 힘들었을 것임을 짐작케 했다. 케인즈가 손을 내밀지 않자 그 상태 그대로 브룩스가 굳은 표정으로 인사했다.


“케인즈 교수님.”


케인즈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한센은 한 발짝 뒤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브룩스가 민망한 듯 손을 거두고 뒤로 돌아 서서 링 쪽으로 걸어갔다. 브룩스가 다시 뒤돌아서 케인즈를 바라 보았다. 케인즈가 잠깐 사이를 둔 뒤 다소 높은 톤으로 말했다.


“오늘 나는 한 사람의 진실한 고백을 듣기 위해 여기에 왔습니다. 시장 질서 따위에 대한 변명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몇 사람의 목숨을 부당하게 거둔 손의 실체에 대해 듣기 위해 왔습니다.”


브룩스는 고개를 약간 숙이고 낮게 말했다.


“저 역시… 내 신념을 포기하기 위해 여기 온 것은 아닙니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의 입술이 보일 듯 말 듯 들썩거리며 겨우 말이 새 나왔다.


"... 나는 살인자가 아닙니다.”


케인즈가 곧바로 응수했다.


"변명을 듣자고 온 자리가 아닙니다."


브룩스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이론이 다르다고 사람을 죽일 만큼 내가 어리석거나 광신적인 사람은 아닙니다."


그는 한센 쪽을 봤다. 내 말이 맞지 않냐는 동의를 구하는 표정이었다.


"기자회견에서... 영국의 저명한 케인즈교수가 하버드대학의 아서 브룩스를 살인 용의자로 지목했을 때... 아마도 좋아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었을 겁니다."


케인즈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비겁한 변명이라고 생각했다. 브룩스는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계속 말했다. 한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손뼉 쳤겠죠. ‘좋아, 피에 굶주린 이론가 두 사람의 싸움을 붙여라.’ 하면서 말이죠."


잠시 숨을 고른 브룩스가 이어 말했다.


"이게 그들이 원하는 구도입니다.”


케인즈는 링 옆의 긴 소파 의자에 앉았다. 의자에서 오래된 스프링이 삐걱 소리를 냈다. 케인즈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들? 누군가에게 떠넘기기에는 브룩스 당신의 혐의는 너무나 분명해. 문양이 새겨진 은화를 희생자들에게 전달한 사람, 매킨지! 그 사람은 당신의 지시를 받아 실행한, 당신의 사람이 아니었던가?”


브룩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의 사람이었죠.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완전한' 나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케인즈가 코웃음을 쳤다. 브룩스는 천장을 한 번 올려다본 후 깊은숨을 뱉었다. 한참 망설이던 그가 결심한 듯 말했다.


“나는 일종의 채널에 불과했습니다. 은화는 월가의 금융 엘리트에서 시작해서 워싱턴 고위 관료들의 손을 거쳐 내게 흘러들었습니다. 종착역을 한 정거장 앞두고 말입니다."

"..."

"여전히 변명으로 들리시겠지요?”

“이름을 말해주면 믿겠소.”


케인즈가 짧게 말했다. 브룩스는 고개를 저었다.


“믿지 않으시겠지만, 여기서 이름을 넘기면... 내 시신은 강에서 발견될 겁니다. 케인즈 교수님"


케인즈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거대한 음모론이라니. 그는 냉정하게 말했다.


“그래서, 그들이 모건 시장과 도슨을 살해하고 그 죄를 자네에게 뒤집어씌웠다는 말인가? 그들은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그들은 시장이 스스로 균형을 찾아간다는 저의 이론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했습니다. 경제적 불확실성과 무지에 대한 대중의 두려움을 조장하고, 위기를 자신의 부를 극대화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대공황의 고통을 즐기는 자들입니다. 고급 샴페인 잔을 들고 ‘이대로!‘를 외치는 자들입니다.“


여기까지 목청을 높여 말한 브룩스가 잠시 숨을 돌린 후 말했다.


“모건 시장과 도슨은 그들의 계획에 방해가 되는 인물들이었습니다.”


케인즈가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자 브룩스는 뭔가 생각난 것처럼 다급하게 말했다.


"제 아내 사무실 서랍에, 정리된 통신 기록이 있습니다. 사람을 보내서 확인해 보십시오. 코드네임은 ‘뉴리버럴’입니다.”


'뉴리버럴'이라는 말을 할 때 브룩스는 고개를 숙이고 체념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케인즈는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순간적으로 브룩스가 거대한 톱니바퀴 사이에 낀 채 조금씩 으스러져가며 비명을 삼키는 작은 부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케인즈가 물었다.


“... 협박을 받고 있습니까?”


브룩스가 빙그레, 그러나 아프게 웃었다. 참고 있다 터지는 것 같은 목소리로 브룩스가 말했다.


“빌어먹을, 그렇습니다. 가족의 이름, 아이의 학교, 그리고 가족의 병원 기록까지 모두..."

"..."

"그 모두가 협박의 소재입니다. 이곳 어디엔가에는 한번 기록에 올라가면 그 기록을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세상이 있습니다. 그 세상에서 기록은 안전과 성공의 보증수표이면서 동시에 위협의 증표입니다."

"..."

"케인즈 교수님, 이렇게 추상적으로밖에 말할 수 없는 저를 용서하십시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천장에서 물방울이 한 방울 '톡' 떨어졌다. 샌드백이 공기의 파장에 맞춰 미세하게 흔들렸다. 케인즈는 브룩스가 하는 말의 행간을 읽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말을 종합하면 그는 매우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다. 그 실체는 월가의 금융 엘리트와 행정부의 고급 관료들이다. 그 말의 진위를 확인하는 것이 필요했다.


"은화의 출처는 어딥니까?"


브룩스가 코트를 여미었다. 손끝이 떨렸다. 그는 코트 안쪽 포킷에서 천으로 만든 작은 주머니를 꺼내 케인즈에게 건넸다. 케인즈가 주머니를 받아 들자 안에서 작은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케인즈 교수님이 제가 살인자라는 증거로 제시한 은화입니다."


케인즈가 주머니 입구를 열어 손바닥 위에 쏟았다. 은화 서너 개가 후두둑 떨어졌다.


"은화 모두에 두 개의 원, 서로 접하는 두 개의 원이 새겨져 있습니다. 문양의 크기도 모양도 모두 똑같습니다. 살인 사건의 현장에 있던 것도, 피해자에게 사전에 전달한 것도, 그리고 지금 내가 교수님에게 주는 것도 모두 완전히 같은 문양입니다. 당연하지요... 모두 뉴욕의 한 공방에서 깎은 것이니까요.”

"..."


"부끄러운 선물입니다. 내가 이 게임에서 맡은 역할은 그저 내 신념에 따른 목소리를 내고 은화를 전달하는 일이었습니다."


케인즈가 조용히 있자 한센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그는 케인즈의 눈치를 보면서 브룩스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브룩스 교수께서 사람을 죽인 것은 아니겠군요."


한센의 말을 들은 브룩스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케인즈 쪽을 한 번 본 한센이 그에게 다가가 그의 등을 살짝 두드렸다. 잠시 그렇게 있던 브룩스가 마음을 추스른 후 케인즈에게 말했다.


"이 게임의 처음과 끝이 무엇인지 나도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월가의 거대한 은행들, 혹은 금융 엘리트들, 그리고 워싱턴의 고급관료가 뒤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대통령의 정책을 교란시키고, 언론을 조종하며, 사건의 실체를 뒤집는 세력들입니다. 두려운 것은 그들에게 그런 힘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케인즈 교수님께서도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이미 D.C.에서 보셨겠지만 말입니다.”


한센이 케인즈를 향했다.


"거짓말 같지는 않습니다, 케인즈 교수님. 장소를 이런 곳으로 정한 것도 그렇고, 은화도 그렇고..."


케인즈가 여전히 쌀쌀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센 교수. 브룩스는 아직 자신의 혐의를 완전히 벗은 것이 아닙니다. 그가 말한 '뉴리버럴'의 실체를 파악한 다음에 판단해도 늦지 않습니다."


한센이 브룩스를 다시 한번 바라본 후 자신 있게 말했다.


"그건 브룩스 교수 말처럼 그의 아내를 통해서 제가 확인해 보겠습니다."


케인즈가 브룩스를 향해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약간 누그러졌다.


"그렇다면, 한센 교수의 판단을 믿어보겠네. 그러나 두 가지 이유에서 우리는 아직 화해할 수 없네."


한센과 브룩스가 동시에 케인즈를 바라봤다.


"첫째는 아직 자네가 혐의를 벗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네. 적어도 자네 아내로부터 통신기록을 확보하기 전까지는 그렇네."


브룩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째는 우리가 화해하는 모습을 보이면 소위 당신이 말한 뉴리버럴 그룹이 당장 자네에게 위해를 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네."


한센이 미처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실 이 문제는 심각한 문제로 보입니다. 브룩스 교수가 정말 협박을 받는 것이라면, 브룩스 교수의 가족들이라도 먼저 안전한 곳으로 보내는 것이 어떨까 생각합니다."

"이 문제는 한센 교수가 필립스 요원과 잘 상의해서 마무리해 주기 바랍니다."


한센에게 이렇게 말한 케인즈가 브룩스에게 말했다.


"당신은 이후 일체 어디에서도 나서지 마시오. FBI로부터의 수배는 필립스요원과 상의해 해결 방안을 찾겠소. 만약 공개적으로 나설 일이 있다면 발언의 수위는 지금까지의 기조를 그대로 유지하시오. 만약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오면 별도로 연락을 하겠소."


브룩스와 한센의 표정이 그제야 풀렸다.


(토요일에 제16회가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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