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공방

은화의 제국-150년의 경제전쟁

by 정섭

뉴욕상공회의소의 대리석 건물을 나서자 리버티 스트리트 주변 금융가 빌딩들의 위압적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 정면에는 업타운 포럼 회원들이 타고 온 리무진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케인즈 일행이 탄 차량은 곧 월가를 지나쳤다. 증권거래소의 거대한 기둥 옆 돌계단에는 노숙자 몇몇이 앉아 있어 대조를 이루었다. 브로드웨이를 벗어나 서쪽으로 방향을 틀자 풍경은 급격히 달라졌다. 허드슨 강 쪽으로 고층 빌딩 대신 붉은 벽돌 창고와 허름한 공장 건물들이 줄줄이 보이기 시작했다.


약 20분이 지나 자동차가 멈춰 선 곳은 좁은 골목 끝자락에 있는 2층짜리 건물 앞이었다. 바깥 벽은 검게 그을려 있었다. 간판조차 달려 있지 않아 외부인은 그저 낡은 창고쯤으로 착각할 만했다. 한센이 차를 골목 끝에 세우며 말했다.


“여기가 맞아요? 간판은 없고, 영업은 하지 않는군요.”

"맞습니다."

브로드웨이를 벗어나는 곳에서 탑승한 브룩스가 뒷좌석에서 속삭이듯 답했다. 조수석에 앉은 필립스 쪽으로 몸을 숙인 브룩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에 금고가 하나 있습니다. 내가 비밀번호를 압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필립스가 뒤를 돌아보고 모두에게 말했다.


"이 작전은 비밀리에 수행되는 작전입니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일이 생기면 FBI가 5분 내에 개입하게 될 겁니다."


뒷좌석에 앉아있던 케인즈가 일행에게 말했다.


"증거만 확보하면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모두의 안전입니다."


톰슨과 필립스, 그리고 브룩스 세 사람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필립스가 먼저 차에서 내려 주위를 살피며 공방의 문쪽으로 갔다. 낡은 셔터 문이었다. 쪼그려 앉아 쇠지렛대를 밀어 넣어 힘을 주자 금속이 눌리다 뚝 끊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필립스가 힘들게 셔터를 올리고 공방 안을 살핀 후 일행에게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케인즈와 브룩스, 그리고 톰슨이 차에서 내려 주위를 살피며 공방 안으로 들어갔다. 한센은 운전대를 잡은 채 그대로 있었다.


공방 내부는 생각보다 넓었다. 벽면을 따라 공압 프레스와 선반, 송전판 같은 것들이 늘어서 있고, 한가운데는 긴 작업대가 놓여 있었다. 공구 박스마다 Rivet, Brass 따위의 라벨이 붙어 있었다. 좀 더 깊은 안쪽에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계단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과도 이어져 있었다. 필립스가 계단 안쪽을 꼼꼼하게 점검했다. 계단 옆 구석 코너에 묵직한 금고 하나가 보였다. 금고의 회색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다. 브룩스가 금고로 뛰어가 다이얼을 돌렸다.


“셋… 열둘… 넷… 다시 셋.”


'딸칵'하는 소리와 함께 다이얼이 풀렸다. 다행히 번호는 바뀌지 않았던 것 같았다. '휴'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브룩스가 금고문을 잡아당겼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안쪽 선반에 송수신기 부품과 서류 뭉치, 크고 작은 나무 상자 몇 개가 나란히 들어 있었다. 브룩스가 서류뭉치를 꺼내 작업대 위에 얹었다.


톰슨은 장갑을 끼고 서류뭉치를 분류해서 놓았다. 활자와 수기가 혼합된 서류들, 전신 기록 카본지, 발송표, 계정 장부 등이 쏟아졌다. 장부에는 서로 접한 두 개의 원 모양의 인장이 찍힌 것들도 있었다.


케인즈가 비교적 큰 나무 상자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프로젝트 뉴리버럴'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는 서류 더미가 나왔다. 표지를 넘기자 그것은 회계장부였다. 장부는 누군가의 이름, 날짜, 금액, 그리고 몇 가지 기호들이 적혀 있었다.


브룩스가 금고에서 또 다른 서류뭉치를 꺼내 펼쳐 보며 말했다.


“이건 통신 기록입니다... 발신 번호는 대부분 동일합니다. 대부분 공방에서 송신된 것들입니다. 수신인은... 각각 다른데 제가 아는 월가의 헤지펀드와 백악관 관계자들도 눈에 띄는군요. 블랙우드 파운데이션. 스펜서 신탁...”


과연 케인즈의 눈길이 멈춘 곳에 워싱턴 D.C.의 관청 주소도 눈에 띄었다. 그때 공방의 바닥 어디선가 물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네온관이 한 번 길게 떨더니 빛의 강도가 낮아졌다. 브룩스가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입구 쪽을 봤다.


찰나의 정적. 그 직후였다. 공방 정문 쪽에서 금속 걸쇠 내리는 소리가 나는가 하더니 셔터가 드르륵 내려갔다. 톰슨이 자동으로 허리춤으로 손을 뻗었다. 필립스가 정문으로 뛰어가 셔터를 두드렸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톰슨이 당황하며 외쳤다.


"놈들이 왔습니다!"

"셔터가 문제군요!”

그때 공방 밖, 셔터 너머에서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원 그대로 나와. 아무것도 손대지 말고 그대로 두고 나오면 돼. 준비되면 셔터를 두들겨. 허튼짓할 생각은 말고. 생각할 시간 30초 주겠다.”


필립스는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아예 밖으로 나갈 수가 없으니 대기하고 있는 FBI에 달리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무전기도 없었다. 이제 FBI는 총소리가 나야 움직일 것이다.


필립스의 당황하는 모습을 살핀 브룩스가 재빨리 움직였다. 금고 쪽으로 뛰어간 브룩스가 금고 안쪽 맨 아래 칸을 손으로 더듬었다. 얇은 철판이 손끝에 걸렸다. 그는 그것을 위로 밀어 올렸다. 숨겨진 바닥판이 나타났고 그 안에서 편지 봉투가 하나 나왔다. 브룩스가 손을 밀어 넣어 봉투를 꺼냈다.


“이거 챙기십시오. 다른 건 둬도 됩니다.”


브룩스가 봉투를 케인즈에게 내밀었다. 케인즈가 봉투를 안 주머니에 넣었다. 밖에서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십 초 전!”


브룩스가 몸을 낮추며 금고 앞쪽으로 다시 몸을 숙여 금고밑으로 손을 넣어 무엇인가를 잡아끌었다. 거친 천 자루가 딸려 나왔다. 그는 그것을 계단 쪽으로 끌고 가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자루를 흔들었다. 작은 금속들이 와르르 바닥에 쏟아졌다. 가공된 은화들이었다. 순간, 셔터 밖에서 알 수 없는 고함 소리가 들렸고 계단 위 2층에서 '후닥닥'하는 발소리가 났다. 필립스가 다급하게 말했다.


"2층 계단은 안으로 잠겨 있어서 괜찮을 겁니다."


톰슨이 브룩스에게 말했다.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은 지하로 통하나요?”

"그쪽은 나도 가본 적이 없습니다."


계단을 점검했던 필립스가 말했다.


"아래쪽으로 통하는 통로가 있습니다!"


톰슨이 뛰어갔다. 계단 아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톰슨이 난간을 잡고 내려갔다. 난간 아래에는 1층보다 좁은 작은 방이 있었다. 방의 도로에 면한 좁은 창문 사이로 빛이 들어왔다. 완전한 지하는 아니었다. 그러나 만약 여기로 쫓긴다면 독 안의 쥐가 되기 좋은 곳이었다. 그때 셔터가 드르륵 하고 위로 올라갔다. 여러 개의 그림자가 안으로 뛰쳐 들어오면서 동시에 총소리가 터졌다.


'타타탕... 타당'


벽이며 금고, 공구들에 총탄이 튀었다. 톰슨이 대응 사격을 했다.


'탕, 탕, 타탕'


케인즈가 몸을 숙인 채 필립스를 봤다. 필립스가 소리쳤다.


"모두 이쪽으로 오세요. 일단 아래로 모두 내려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총소리가 났으니 FBI가 곧 도착할 겁니다. 그때까지만... "


톰슨과 케인즈가 몸을 숙이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뛰었다. 또다시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들렸다.


'타타타탕... 타타탕'


총탄이 여기저기서 튀었다. 네 사람 모두 계단을 통해 반 지하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필립스가 케인즈에게 말했다.


"교수님 죄송합니다. 제가 갇혀버리는 바람에 이런 상황이 됐습니다..."

"이런 게 불확실성 아니겠나? 자네 덕에 불확실성이란 게 이렇게 스릴이 넘치는 일이란 걸 알게 됐네."


이 소리를 듣던 톰슨이 헛웃음을 지었다. 브룩스가 앞으로 나섰다.


"아까 제가 드린 봉투는 잘 챙기셨습니까?"

"그렇네. 여기 앞주머니에 잘 넣어뒀네."

"그건 블랙리스트입니다."

"?"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제거 대상 명단입니다."


세 사람이 모두 놀라는 표정으로 서로를 봤다.


"그런데 한 가지 서류를 놓쳤습니다."

"어떤 서류"

"그것도 명단입니다. 이 사건과 결부된 자들, 월가와 백악관의..."

"어디에 있나?"

"금고의 또 다른 상자 안에 있을 겁니다. 저놈들이 들어오면 그것부터 챙기려고 할 거예요. 우리가 먼저 확보해야 합니다."

"톰슨 경위, 가능하겠나?"

"아니, 그건 제가 가야 합니다. 어떤 상자인지 경위님께서 바로 식별하기 어려울 겁니다."


케인즈가 만류하고 나섰다.


"브룩스 교수, 안 되네. 위험해."


필립스도 만류하고 나섰다.


"이제 곧 FBI가 들이닥칠 겁니다. 조금 기다리시죠?"

"안 됩니다. 그전에 놈들에게 명단이 넘어가면 그것부터 없앨 겁니다. 우리가 먼저 빼내야 합니다. 어서, 서둘러야 합니다."


브룩스가 케인즈의 손을 잡았다가 뒤로 돌아섰다. 케인즈가 브룩스의 손을 끌어당겼다. 그 바람에 케인즈 쪽으로 다시 돌아선 브룩스의 눈을 쳐다보며 케인즈가 말했다.


"조심하게."

"네"


톰슨이 계단 위로 머리를 내밀었다. 몇 개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다행히 놈들은 아직 금고까지 오지는 못 했다. 톰슨이 그림자를 향해 총탄을 날렸다.


'타탕'


그림자가 응수하며 몸을 숨겼다. 그 사이에 톰슨이 계단 위로 올라가 공구박스 뒤로 몸을 숨겼다. 브룩스가 톰슨을 따라 계단 위로 올라왔다. 톰슨의 총구가 다시 불을 뿜었다.


'탕'


이번에는 저쪽에서 응사했다. 톰슨과 필립스가 응사했다.


'탕, 탕'

'타타당'


잠시 소강상태에 빠지는 틈을 타 브룩스가 톰슨 옆 공구 박스 뒤로 뛰어 왔다. 계단으로 필립스도 올라왔다.


"제가 움직이는 동안 엄호 사격을 해 주세요. 그 사이에 제가 금고 쪽으로 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다행히 금고가 아직 열려 있네요."


그 말과 함께 톰슨이 필립스가 볼 수 있도록 '하나, 둘, 셋' 하고 손가락을 뽑았다. 톰슨과 필립스의 총구멍에서 총알이 튀었다.


'타타탕, 타타탕, 탕타탕'


그 사이에 브룩스가 금고 쪽으로 뛰었다. 톰슨과 필립스의 총구에서 또다시 격렬한 소리가 났다. 브룩스가 열린 금고 앞에서 나무 상자를 들고 돌아서 공구 박스 뒤로 허리를 숙이고 뛰었다. 숨어있던 총구가 브룩스를 향해 불을 뿜었다. 톰슨과 필립스도 응사했다.


'타탕, 타타탕'

'타타탕, 탕, 탕'


브룩스가 '윽' 소리를 내며 무릎을 꺾었다. 톰슨이 '브룩스!' 하고 소리를 치고 브룩스 쪽으로 뛰어가 브룩스의 어깨를 걸고 공구 상자 쪽으로 끌고 왔다. 필립스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톰슨이 총을 쏘며 브룩스를 계단으로 밀어 넣었다. 필립스가 브룩스를 끌다시피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톰슨은 쪼그려 앉아 총을 쏘면서 뒷걸음으로 계단으로 왔다.


아래에 있던 케인즈가 브룩스를 받아 안았다. 브룩스의 허리에서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케인즈가 브룩스의 상의를 벗기고 지혈을 했다.


"브룩스 교수, 정신 차리게."


브룩스가 케인즈의 손으로 자신의 손을 가져갔다. 작은 나무 상자가 브룩스의 손에 들려 있었다.


"죄송합니다..."


케인즈가 브룩스의 손을 잡았다. 톰슨과 필립스는 계단에서 연신 응사를 하고 있었다. 필립스가 외쳤다.


"톰슨 경위, 탄약이 얼마나 남았소? 난 탄창 하나밖에 안 남았어요."

"나도 그래요. 좀 아껴야겠습니다."


숨을 헐떡이던 브룩스의 손이 '툭' 떨어졌다. 케인즈가 브룩스의 이름을 연신 불렀다. 그때 요란한 차량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수십 개의 군홧발이 공방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FBI다! 모두 손 들어!"


총격이 멈췄다. 잠시 후 앰뷸랜스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골목으로 들어와 브룩스를 실었다. 현장에서 체포된 자들이 호송 차량에 타는 것을 확인한 후 필립스는 FBI에 보고를 하기 위해 FBI 기동대 차량에 탑승했다. 톰슨과 케인즈는 도로의 벤치에 앉아 의료진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톰슨은 손과 얼굴에 약간의 타박상이 있었으나 큰 부상은 아니었다.


케인즈가 브룩스가 가져온, 피 묻은 나무 상자를 열었다. 얇은 금속으로 만든 카드 수십 장이 십자 밴드에 묶여 있었다. 맨 위 카드에 '제국'이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 뒤에는 카드마다 이름 이 하나씩 새겨져 있었다. 이름 옆에 펜으로 덧칠한 별표가 더러 한 개, 더러 세 개까지 그려져 있었다. 브룩스의 표현에 의하면 검은 세력의 우두머리들이었다.


봉투에 든 블랙리스트에는 죽은 해리 도슨, 제이콥 모건 외에도 케인즈, 인도의 경제학자 칸 등 수십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해리 도슨과 제이콥 모건의 이름은 빨간 줄로 그어져 있었다. 케인즈는 카드를 원래대로 묶어 피 묻은 나무 상자에 다시 집어넣고 블랙리스트와 함께 톰슨에게 전달했다.


잠시 후 필립스가 케인즈 쪽으로 왔다. 톰슨이 카드가 든 파묻은 나무 상자와 블랙리스트가 든 봉투를 필립스에게 전달했다. 필립스가 피 묻은 나무 상자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FBI가 대부분의 증거를 확보했습니다. 지도부를 포함한 핵심들도 오늘 중으로 모두 체포될 것입니다."

"브룩스 교수의 소식은 못 들었나?"

"아직 수술 중이라는 보고만 들었습니다. 사망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케인즈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토요일에 제19회가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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