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은화의 제국

은화의 제국-150년의 경제전쟁

by 정섭

필립스가 진두지휘하는 소위 '은화 살인 사건' 수사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뉴욕 공방에서 확보된 증거와 브룩스 부인 사무실에서 발견된 통신기록을 토대로 검은 세력의 전모가 속속 드러났다. 특히 은화를 제작하고 유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살인 청부와 조직원의 행동 지침, 그들에 대한 사후 보상 등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들이 드러났다.


FBI가 공방에서 확보한 회계 장부에서는 런던과 뉴욕에서 발생한 의문의 살인 사건과 일치하는 숫자와 부호가 발견되어 수사관들에게 놀라움을 주었다. 장부 각 페이지마다 도장으로 찍은 '두 개의 접하는 원' 문양과 그 옆에 적힌 날짜는 살인 사건의 정황과 정확히 일치했다. FBI는 이 도장이 단순한 표식이 아니라 ‘표적 제거 완료’를 의미하는 내부 암호로 결론지었다.


공방에서 발견된 문양을 새기는 틀은 결정적 증거였다. 틀은 눈으로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밀한 일련번호를 새길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일련번호는 장부에 기록된 사건의 순번과 맞아떨어졌다. 현장에서 체포된 조직원의 증언을 통해 은화와 문양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살인 지시와 보수 지급을 잇는 계약 증표라는 사실이 최종 확인됐다. 체포된 조직원 중 한 명은 심문에서 이렇게 자백했다.


“우린 모두 현금으로 받았습니다. 다른 건 흔적을 남기니까요. 은화를 받는 것이 계약이었고, 일을 끝내면 일련번호를 돈으로 바꿨습니다.”


장부와 일련번호, 날짜와 이 증언이 일치함으로써 범죄행위는 최종 확인되었다. 이들의 범죄 행위가 악랄한 것은 은화가 피해자에게 미리 건네어졌고, 은화를 살해 현장에 놓고 가는 등 철저히 계획적이었을 뿐 아니라, 은화가 최종적으로 살인자에게 보수를 지급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이었다.


특히 현장에서 체포된 자들은 표적을 암살하는 것을 주 임무로 하는 행동조의 조직원들이었다. 이들은 조직의 특성상 어떤 명단에도 나타나지 않는 자들이었다. 이들이 현장에서 일망타진됨으로써 필립스의 생각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압수된 전신 기록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메시지에는 “뉴리버럴6 완료. 은화 회수” 같은 문장이 적혀 있었는데, 이는 ‘뉴리버럴 계획 여섯 번째 임무가 끝났고, 은화가 회수되어 대금이 지급됐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FBI 전문가들은 이를 암살 작전의 완료 보고로 판정했다.


모든 증거는 하나의 결론으로 모였다. 은화는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금융 엘리트와 정부 고위 관료가 결탁한 ‘보이지 않는 손'의 실체를 움직이는 장치였다. 돈의 최종 출처는 로렌스 블랙우드로 밝혀졌다. 월가의 꽤 규모 있는 투자금융회사 사장인 블랙우드는 업타운 클럽 주요 회원 명의의 차명 계좌로 만든 사모 펀드를 운영했다. 편드 투자자 역시 대부분 업타운 포럼에 참여하는 금융 엘리트들이었다. 그 돈은 살인자들 뿐만 아니라 백악관의 고위 간부들에게도 흘러갔다. 이들 고위 간부들은 살인 사건을 무마하는 역할을 했고 뉴딜에 반대하는 다양한 로비 활동을 벌인 것으로 밝혀졌다.


필립스는 수백 개의 증거물을 정리하고 수십 명의 관련자를 심문하며 쉴 틈 없이 움직였다. 그는 집요한 추적 끝에, 은화 살인 사건의 시발점이 된 '시어도어 루빈' 살인 사건의 진범이 백악관 재정경제보좌관 찰스 미첼의 사주를 받은 비밀 요원임을 밝혀냈다. 찰스 미첼은 공화, 민주 양당에 네트워크를 가진 변호사 출신 로비스트였다. 그는 업타운 포럼의 부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업타운 포럼을 로비 무대로 변질시킨 장본인이었다.


한편, 케인즈는 수사 당국에 참고인으로 불려 온 업타운 포럼의 회장 사무엘 로웰과 마주했다. 로웰은 사건과 직접 관련은 없는 것으로 밝혀졌으나 업타운 포럼의 회장으로서 참고 진술을 하기 위해 FBI 수사본부에 불려 왔다. 로렌스 블랙우드도 함께였다. 블랙우드는 이번 사건의 주모자 가운데 하나로 지목되어 경찰에 유치 중이었다. 케인즈의 요청으로 그도 합석을 했다. 둘 다 케인즈와는 업타운 포럼의 강연에서 마주친 적 있었다.


"케인즈교수님, 미국에서 이렇게 엄청난 파문을 일으킨 유명 외국인이 있었을까요? 큰일 하셨습니다."


비아냥이 깔린 로웰의 돌출 발언이었다. 케인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직도 반성하지 못한 태도가 케인즈에게 심한 모욕감을 안겼던 것이다. 케인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이윽고 케인즈가 말을 꺼냈다.


"사람을 죽이는 것까지 해야 할 정도로 증오가 깊은 겁니까?"

"증오라고 생각한다면 아직도 본질을 모르시는 건가요?"


블랙우드였다. 케인즈가 화를 억누른 채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본질?"

"네, 본질이요. 아담스미스라는 본질을 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

"사람들이 자기 이익을 추구하다 보니 농업에도 투자하고 제조업에도 투자하고... 아시잖아요? 그 결과 축적된 자본이 가장 잘 사용되고 경제성장이 가장 잘 이뤄진다는 것이 아담스미스의 가르침입니다."

"맞아요."

"의도적으로 농업에 투자하라고 한다거나 정부가 시키거나 강제할 일이 아니라는 가르침이 바로 '보이지 않는 손'입니다. 학부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내용이지요."

"맞아요."

"사익을 추구했지만 그 결과로 의도하지 않았던 공익의 달성이 이루어지는 것이 오늘날 경제이론의 기본이고, 시장의 질서 아닙니까?"

"..."

"이건 왜 수긍하지 않으십니까?"

"아담스미스의 주장에 대해서는 사실로 인정한 것이고, 그것이 오늘날 시장의 질서라는 부분은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시장의 질서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입니까?"

"시장의 질서도 고장 날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이미 증명되기도 했고요."

"불확실성과 무지 때문에요?"

"그것도 하나의 원인이지요."

"무지때문에라도 시장은 필요합니다.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구체적이고 특정한 사실 대부분을 사람들은 모릅니다. 그래서 시장 질서가 필요한 것입니다."

"아니요, 개별적으로 행동하는 개인의 무지때문에라도 국가가 개입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눈앞에 벌어지는 대공황의 원인과 대책이 그것입니다."

"..."

"더욱이 당신의 논리가 아무리 정당하다고 해도 그것이 사람을 죽이는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야말로 파시즘의 논리 아닙니까?"


케인즈가 파시즘이라는 단어를 쏟아내자 블랙우드가 얼굴을 붉혔다. 둘의 대화를 듣고만있던 사무엘 로웰이 입을 열었다.


"과연 대가들의 대화군요. 두 분의 말씀 모두 옳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 대중은 복잡한 경제 시스템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누군가 방향을 제시해 주기를 원합니다. 마치 규칙을 따르는 것이 자신의 운명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대중들입니다."


케인즈가 무표정하게 사무엘 로웰을 바라봤다. 로웰이 말을 이었다.


"그렇게 인류의 전 역사를 거치며 진화해 온 것이 시장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장의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창조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케인즈가 같지 않은 말을 들었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통제와 지배를 질서라고 표현하는군요. 대중의 무지와 불안을 이용한 통제와 지배 체제를 구축하려는 것이 당신들 금융 엘리트와 백악관의 검은 세력이 원하는 것이 아닌가요? 업타운 포럼도 이 사건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시장이 스스로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대중에게는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선전하는 도구였습니다. 물론 돈과 권력으로부터의 달콤한 이익이 한몫했을 겁니다. 당신은 당신의 이론적 신념을 범죄의 수단으로 전락시킨 묵시적 공범입니다."


로웰이 피식 웃었다.


"대중은 진실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교수님. 진실은 혼란만 가져올 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이 누군가에 의해 좌우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단지 그들의 무의식적인 욕망을 충족시켜 주었을 뿐입니다. 당신은 대중의 이성을 믿지만, 저는 그들의 본능을 믿습니다. 그리고 본능은 언제나 합리적인 판단보다 앞섭니다. 당신의 이론은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습니다."


케인즈는 분노를 느꼈다. 로웰은 자신의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대중의 무지를 핑계 삼았다. 그는 인간의 본성을 믿는다고 말했지만, 케인즈가 듣기에 그들은 대중을 경멸하고 있었다. 케인즈는 더 이상 대화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의 생명을 함부로 뺐는 무리와 다를 바 없는 주장이군요. 시장의 질서에 대해 지껄이기 전에 인간의 존엄에 대해 더 배우기 바랍니다, 로웰 회장."


케인즈가 면회실을 나설 때, 블랙우드가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던졌다.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교수님. 저는 단지 하나의 조각일 뿐입니다. 우리의 질서는 여전히 가장 강력한 힘으로 존재합니다. 그저 우리 몇 사람이 패배했다고 해서 질서가 무너지리라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케인즈가 나가다 말고 돌아섰다. 빙그레 웃는 표정의 케인즈가 짧은 한 마디를 남겼다. 공방에서 발견한 카드의 표지에 찍혀 있던 ‘제국’이라는 글귀가 생각났던 것이었다.


“주변을 둘러 보세요. 제국…, 그러니까 당신들이 세우려 한 그 은화의 제국은 무너졌습니다. 시장 질서의 역사에서 가장 부끄러운 이름으로 기억되겠지요.”


그날 저녁 케인즈는 아서 브룩스를 만나기 위해 병원으로 갔다. 그는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지만, 의식은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케인즈가 병실에 들어서자 브룩스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케인즈가 브룩스를 다시 자리에 눕히며 말했다.


"좀 괜찮아졌는가? 움직이는 것은 어떤가?"


다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브룩스가 대답했다.


"많이 좋아졌습니다."

"다행이네. 바깥일은 걱정하지 마시게. 필립스 요원이 잘 수습하고 있네."


케인즈의 말을 듣던 브룩스가 새삼스럽게 말했다.


"교수님께 너무 부끄럽습니다."

"무슨 말을. 브룩스 교수가 용기를 내주지 않았다면 결코 이렇게 마무리지을 수 없었을 걸세."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가 지은 죗값은 달게 받겠습니다. 그리고 수사에도 언제든 협조하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날 저녁 FBI는 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기자회견을 했다. 필립스가 발표와 질의응답을 맡았다. 다음날 아침 뉴욕 타임스, 월 스트리트 저널, 워싱턴 포스트 등 미국 전역의 주요 언론 1면은 온통 충격적인 헤드라인으로 뒤덮였다.


'대공황 배후의 검은 그림자, 금융 엘리트와 백악관 '

'인위적 시장 조작 발각'


업타운 포럼의 부회장인 블랙우드를 정점으로 한 조직도까지 나왔다. 리처드 밀러, 제임스 스튜어트, 알렉산더 밴더빌트, 그리고 찰스 미첼 등 월가와 워싱턴을 주무르던 거물들의 이름이 나열되었다. 사람들은 경악했다. 사회 전체가 거대한 충격과 분노, 그리고 배신감에 휩싸였다. 케인즈가 살인사건의 배후로 지목했던 아서 브룩스는 협박을 받아 어쩔 수 없이 범죄에 연루된 것으로 발표됐다. 브룩스는 오히려 이번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데 결정적 증언을 했고 그 과정에 중상을 입은 사실도 언론에 크게 보도됐다.


사건이 일단락되자 케인즈 일행은 영국으로 가기로 하고 출국 준비를 서둘렀다. 출국 전날, 케인즈와 톰슨, 엘레노어, 그리고 필립스가 미국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기 위해 모였다. 모두 감회에 젖은 눈빛이었다. 필립스가 케인즈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교수님이 아니었으면 해결되지 않을 사건이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아닐세, 모두 함께 한 덕분이었지 않나? 그런 소리 하지 말게."

"미국에서도 은화 살인 사건이 있었지만 그동안 전혀 보고되지 않았습니다. 자칫 미제 사건이 될 뻔 한 사건을 풀 수 있었던 것은 교수님 덕분입니다."


톰슨이 끼어들었다.


"사실 이 사건 처음부터 케인즈 교수님이 개입하지 않았으면 이렇게 쉽게 끝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맞아요. 언론에서도 그 점에 대해 놀라는 눈치였어요."


엘레노어까지 나서자 케인즈는 가만히 듣기만 했다. 사람들의 말이 더 이상 나오지 않자 케인즈가 입을 열었다.


"이제 돌아가면 이번 사건을 통해 정리된 생각을 책으로 쓸 생각입니다. 시장에 대한 맹신이 어떤 혼란을 초래하는지 밝힐 생각이에요."


케인즈가 자산에게 다짐하듯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겁니다. 새로운 대안이 필요할 테니 말입니다. 단기에도,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적용할 수 있는…, 말하자면 지금 경제학보다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이론을 밝히는 일을 해 볼 생각입니다.“


모두들 숙연한 표정이 되었다. 모두 케인즈의 시도가 성공하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얼굴들이었다.


(다음 주 화요일에 제20회가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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