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해탄보험에서 지펴 올린 사무직 노동운동의 불꽃
이정애 씨가 출근을 하기 위해 다방을 나간 시간은 8시였다.
“여직원이 한 명도 참가 안 한다면 오늘 결성총회에 참가할 사람은 불과 서른 두 명뿐이네”
별 말없이 앉아 있던 형석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오늘의 마지막 거사를 앞두고 태수의 독신자숙소에서 함께 밤을 새운 형석이었다. 인사과에 근무하면서도 형석은 노동조합 설립의 필요성에 대해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다. 시커먼 얼굴에 구레나룻이 온통 뒤덮인 검고 둥근 얼굴 때문에 입사동기들 사이에서 형석은 ‘아웅산’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개인별로 체크한 참가 가능한 사람들 외에 가능성 있는 사람을 추려보는 게 좋겠다.”
탁자 위로 가슴을 내밀며 형석이 짐짓 아무것도 아닌 듯 말했다.
“지선이 하고 천석이는 오늘 저녁에 술 한 잔 하기로 약속을 해 놨으니까 그놈들까지 데리고 가면 숫자는 어느 정도 맞출 수 있을 것도 같은데..”
“그러면 네가 한 두 사람 정도만 더 확보해 봐라. 광철이는 올해 고졸 신입사원들 일부가 가능하다고 했거든.”
“그래. 그리고 어차피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근무 시간 중간에 복도 자판기 앞에서 몇몇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만나서 저녁 약속 잡자. 최대한 건져보지 뭐. 오늘 접촉하는 사람들한테 노동조합 이야기는 꺼내지 말고 시간 나는 사람들 중심으로 저녁 술 약속을 해 놓고 저녁에 규합하는 방법이 좋을 거 같다.”
“거 참, 사람 모으기가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일단 오전 중에 그런 방식으로 최대한 사람을 만나보고 점심시간에 책방에서 만나는 걸로 하자.”
출근 시간이 다가오면서 출근길에 다방에 들어오는 직원들이 몇몇 보이기 시작했다. 더 이상 오래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별로 좋은 일이 못되었다.
“순구한테는 점심시간 약속 내가 전할게”
“그래. 조심해라.”
“있다 보자.”
엘리베이터 앞에는 이른 시간인데도 벌써 출근하는 사람들로 줄이 늘어서 있었다.
아직 그룹 내에서 노동조합이 생긴 곳은 아무 곳도 없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노동조합은 안 된다.’
이것이 그룹회장의 지론이었고 이상하게도 직원들은 그룹회장의 다른 지론은 몰라도 이것만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과연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어느 정도 성사가 있는 일일까?’
태수는 해고될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매우 높은 확률이 있었다.
‘만약 해고된다면?’
또다시 거대한 벽에 부딪친 느낌이었다. 장남인 태수에 온 인생을 걸고 지금도 부두의 막노동판에서 일하고 있는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열네 살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해방이 된 조국에서 머슴을 사시면서 중학교를 다니던 아버지는 결국 전쟁 때문에 그 모든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5대 독자였던 아버지의 꿈은 태수에게 대물림되었다. 태수가 끼니도 어려운 상황에서 대학을 가고 무사히 졸업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아버지의 그런 꿈 때문이었다. 회사를 그만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난여름 관리부장이 해고당하던 그때 사건이 태수로 하여금 학창 시절의 꿈을 되살리게 한 계기가 된 것도 사실이었다. 만약 해고된다면, 내겐 학창 시절부터 인생의 간절한 소망이었던 학문에의 길이 남아있다는 일종의 도피처 같은 것이 마음 한편에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추진하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신입사원시절 태수는 직장생활에 적응하며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 모범사원이었다. 학문에의 꿈을 대신한 직장생활이 태수의 생활을 지배해 나가던 시절이었다. 정기적인 월급이 주는 안락함도 있었다. 그러나 관리부장의 해고로 모든 것이 무너졌다.
‘이 직장이 나에게 가져다 줄 나의 미래의 모습’
그것이 바로 관리부장의 허무한 해고였던 것이었다. 태수가 하루 서너 시간씩밖에 못 자는 대학원 입학 공부에 몰두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때부터였다.(다음 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