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해탄보험에서 지펴 올린 딸들의 함성
1985년 1월,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황량한 바람만 부는 새벽이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바바리코트에 감추고 나선 독신자 숙소는 짙은 어둠과 침묵에 싸여 있었다. 동이 트지도 않은 어두운 출근길을 재촉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태수의 눈앞에 보도블록 사이로 먼지 묻어 더러운 눈발이 가로등에 비쳐 번들거리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살을 에는 듯한 메마른 바람으로 인해 더욱 어수선한 출근길이었다.
‘밤을 꼬박 새운 탓인가?’
눈알에 모래가 가득 들어 있는 것 같았다. 형석은 말이 없었다. 온 가슴에 뻥하고 구멍이 난 것 같은 주체할 수 없는 답답함이 엄습했다. 때 이른 전철에는 듬성듬성 앉아 졸고 있는 사람들로 스산한 풍경이었다. 형석도 전철에 오르자마자 태수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단잠에 빠져들었다. 전철에서 내렸을 때는 먼동이 터 오고 있었다. 광화문 네거리에 서있는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멀리 뿌연 인왕산을 배경으로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그 그림의 중앙에 서있는 동상이 자신을 덮칠 것 같은 착각과 두려움에 태수는 몸서리를 쳤다. 그 옆으로 시커먼 괴물과 같은 회사의 건물이 아까부터 태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태수의 몸이 또 한 번 부르르 떨었다. 형석이 힐끔 태수를 쳐다보았다.
두려움의 실체는 그것이었던가?
‘그러나 이제 와서 돌이킬 수는 없어!’
이정애 씨는 회사 지하다방에 먼저 나와 있었다.
“일찍 오셨네요”
반가웠다. 답답증은 어디로 간 것인지 모를 정도로 가슴 한 구석이 따뜻하게 데워졌다.
“저도 방금 왔어요. 춥지요?”
뒷머리를 질끈 동여맨 모습의 이정애 씨는 수다스럽지 않게 대답하면서도 어두운 모습이었다. 태수의 머리에 불길한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물고 형석이 물었다.
“그 문제는 … 생각 좀 해 보셨어요?”
잠깐 사이를 두고 이정애 씨는 길게 한숨을 쉬고 나서 마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직원회 회장하고 상의를 했는데, 지금 이 단계에서 여직원들은 참가하기 어렵다고 결론을 내렸어요. 여직원회 회장은 믿을만한 사람이니까 제가 사전에 상의한 것이 문제 되지는 않을 거예요.”
이정애 씨의 대답은 사실 예상된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 대답은 충격이었다.
태수의 눈앞에 지난여름 해고된 김 부장의 까칠한 얼굴이 떠올랐다. 회사가 그룹으로 넘어간 지 불과 며칠 만에 부장급이상은 일괄 사표를 제출했고, 그로부터 또 며칠 후 몇몇 임원과 부장의 사표가 수리되었다. 태수가 근무하던 관리부 김 부장의 사표도 그때 수리되었다. 말이 의원면직이지 해고였다.
노동조합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바로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여직원들이 노동조합 결성에 참가해 줄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 봐 달라는 부탁을 한 사람이 바로 이정애 씨였던 것이다.
“미안해요. 하지만 신고증이 나오면 틀림없이 여직원 모두 가입하겠다는 약속을 드릴게요”
마지못한 위로같이 들리는 뒷말을 들으면서 태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이정애 씨에게 꼭 해야 할 말을 차근차근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그럼 총대는 우리가 멜 테니 이정애 씨는 힘자라는 데까지 도와주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그리고 오늘이 결성일인 것이 절대 다른 곳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조심해 주십시오.”
“물론이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정애 씨의 얼굴은 그러나 정말 일이 잘 되기를 바라는 기원과 결의가 묻어 있었다.
“조심하시고…”
남은 찻잔을 비우면서 뒷말을 생각하던 정애는 정말로 이 젊고 유능한 사람들에게 아무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애틋한 마음으로 간절하였다.
“꼭 성공하기 바랍니다.”
같은 부에 근무하고 있는 이정애 씨와 태수는 그리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 언제나 단정하게 꼭 묶은 머리를 하고 부서 직원들과 실없는 농담도 잘하지 않는 이정애 씨였다. 그러나 업무에서는 ‘칼’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빈틈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점이 믿음직하여 철저한 보안과 극도의 주의 하에 진행되고 있던 노동조합결성에 그녀를 가담시키려고 마음먹었던 태수였다. 그러나 결국 그 계획은 원점으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이제는 그녀가 보안을 철저히 유지해 주기만을 바라는 입장이 되어 버렸다.
허탈했다. 고립무원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은 막막함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었다. (다음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