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해탄보험에서 지펴 올린 사무직 노동운동의 불꽃
부장급 일부와 임원 대다수의 사표가 수리된 며칠 후였다. 순구로부터 저녁에 고려다방에서 좀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다방에는 형석이 순구와 같이 앉아 있었다. 형석이 동석인 것은 뜻밖이었다. 그들이 태수에게 한 이야기는 더욱 의외의 것이었다.
“이번에 사표가 수리된 사람이 부장 다섯 명에 임원 일곱 명이라는데 한 마디로 한심한 일 아니냐?”
형석의 눈에는 동의를 구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 기회에 노동조합을 만드는 게 어떤가 하고 둘이서 이야기하다가 너 하고 같이 의논해 보려고 만나자고 한 거거든...”
형석이 몸을 당기며 말을 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자는 말은 아직 없었어. 니가 동의한다면 셋이서 추진을 하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야.”
‘노동조합...’
그것은 직장에 대한 애정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관리부장의 사표수리 이후 태수는 이미 대학원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끝내기에는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항상 그 바닥에 깔려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노동조합이라는 생소한 말을 처음으로 그것도 너무나 은밀하게 들으면서도 정말 이상한 사실은 그것이 너무나 어색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당연하게 해야 한다는 일종의 정의감 같은 것이 우선이었다.
“뭔가 아는 게 있어야 하든 말든 하지”
그것이 태수의 대답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긍정의 표현이었다.
“야, 알고 하는 놈이 어딨냐? 일단 저질러 놓고 보는 거지.”
어깨를 툭 치며 웃는 얼굴로 내뱉은 형석의 목소리는 밝았다.
“그래도 뭔가 법적인 문제는 좀 알아야 될 것 아니냐?”
“그러면 각자 노동법에 대한 책을 서점에서 읽어보고 다음에 만날 때 몇 권 사 오는 걸로 하는 게 어때요?”
순구의 제안이었다.
“주위에 노동조합 활동하는 사람 중에 아는 사람도 좀 찾아보지?”
“그래, 그런 사람이 있으면 자문을 구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형석이 맞장구를 쳤고 각자 아는 사람들 통해서 노동조합 활동하는 사람을 알아보기로 하고 그날의 모임은 끝났었다.
이렇게 시작된 노동조합의 결성에 어두운 그림자가 낄 무렵 광철이가 나타났다. 그것은 서른 명이라는 결성총회 최소 참가 인원의 확보가 어렵다는 어두운 판단이 생긴 때였다. 술 좋아하고 사람들과 몰려다니면서 사건 일으키기 좋아하던 광철이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운수업을 하다가 망해먹고 직장에 들어온 광철이 특유의 붙임성과 배포는 신입사원 시절부터 유명했던 것이다.
“회사 좆같아서 못 다니겠다야. 나이도 새까맣게 어린 후배 놈이 그룹에서 차장으로 내려와서 야코를 죽이니 이거 뭐 이래 가지고 어디 우리 같이 줄 없는 놈은 회사 붙어 다니겠냐.”
태수가 광철이와 같이 몇 번 간 적이 있던 단골 술집에서 광철이는 내일 당장이라도 사표를 낼 것처럼 그렇게 말했었다. 태수는 그날 노동조합 이야기를 꺼냈다. 광철이는 무조건 찬성을 하였던 것이다. 그 이후, ‘공부는 딱 질색이니까’를 이유로 광철이는 모임에 참가하거나 노동법에 대한 공부를 하는 것은 면제하고 그 대신 고졸신입사원들을 노동조합결성에 참가시킬 방법을 찾도록 하였었다.
그런 광철이가 막상 노동조합 결성 당일에 행방이 묘연해진 것이다.(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