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해탄보험에서 지펴 올린 사무직 노동운동의 불꽃
그러나 한 가지 희망은 있었다. 바로 사전 노동조합 가입원서였다. 점 조직의 형태로 받았기 때문에 태수와 형석 그리고 순구는 알 수 없는 그 누군가, 광철이 받은 사람들은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직 오늘 결성총회의 대회장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그 장소로 직접 찾아오지는 못하더라도 우회적으로 알아볼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연맹 사무실 약도를 개인별로 전달할 때 몇몇 고졸사원들을 접촉하면서 광철이 하고 약속이 없었냐고 떠보면 어떨까?”
“자기들도 누가 누군지 모르는 상태에서 섣불리 내색하지는 못할 텐데...”
“그래도 광철이가 나타나기 전에는 달리 손을 쓸 다른 방법이 없잖아.”
“광철이 소재를 최대한 파악해 보면서 그렇게 라도 해보지 뭐.”
“그리고 총회장소인 연맹사무실 약도 복사한 것은 본인들에게 직접 전달하는 걸로 하고 최종인원 점검 다시 해 보자.”
점검 결과 광철이가 연락한 사람들이 모두 불참한다면 서른 명에서 다섯 명이 부족하였다.
“어차피 많은 사람이 참가하는 것이 좋으니까 오늘 오후부터는 최대한으로 사람들을 규합해 보는 걸로 하자.”
입사동기별로 연락의 대상을 서로 할당하고 중국음식점을 나섰다. 눈발은 조금도 죽어들지 않고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날씨조차 우리를 배신하는 것인가.’
태수의 머릿속으로 야속한 생각이 절로 났다. 눈을 보고 야속하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어처구니없기도 하였다.
수원지점의 백종관을 만나기 위해 수원으로 가던 날도 이렇게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태수는 백종관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백종관이 본사에 있을 때의 소문하나를 믿고 그를 찾아간 것이었다.
‘믿을만한 사람’
그를 찾아가게 된 이유는 노동조합 설립 신고를 노동부에 하기 위해서였다. 2개 시도 이상에 걸쳐 조합원이 있는 노동조합의 경우에는 노동부에 설립신고를 하지만 1개 시도에만 있을 경우에는 구청에 설립신고를 하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노동조합 설립신고를 했을 경우 회사의 공작이 비교적 덜 미칠 곳은 노동부일 거라는 판단이었다. 백종관이 설립총회에 참가하느냐 마느냐는 그렇게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일요일의 지점사무실에는 백종관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미리 약속을 해두었기 때문에 그는 지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커다란 창고처럼 지저분하고 횡뎅그레한 곳이었다. 스팀조차 없는 사무실 가운데에 낡은 석유난로가 벌겋게 익고 있었다.
“춥죠? 이 먼 수원까지 오시느라고 수고했습니다. 차 한 잔 드리까요?”
우직하고 친절한 환대와, 무엇보다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태수가 전날 전화로 만나자고 했을 때 이유도 묻지 않고 흔쾌히 응낙한 일요일인 오늘 지점에서의 약속을 지켜준 것에 태수는 고맙기만 하였다.
“지점생활 어렵죠?”
태수는 괜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힘들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괜찮아요.”
백종관의 성실한 답변이었다.
‘이런 사람이라면’
차의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시면서 태수는 아무런 정황 설명 없이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작정을 했다.
“사실은 지금 몇몇 사람들이 노동조합 결성에 대해 의견을 모으고 있는 중인데 백종관 씨 생각이 어떤지 알고 싶어서 왔습니다.”
백종관은 한참을 말없이 태수를 쳐다보았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과 좀 이상한 사람 아니냐는 어색한 표정이 엇갈리는 듯했다. 태수는 뭔가 설명이 부족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사에 있을 때 백종관 씨에 대해 많이 들었고 또 이런 일을 상의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우리끼리의 결론도 있었습니다. 물론 백종관 씨가 거절한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는 없습니다.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상의하러 왔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그래도 뭔가 부족하였다. 태수가 또 뭔가를 설명하려고 하는데
“5분만 시간을 주십시오.”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그가 한 말이었다.
‘5분…’
결정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태수는 그 자리에서 결정하지 않았던가…
백종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쪽에 섰다. 창밖에는 수원성이 폭설에 하얗게 덮여 있었다. 담배 한 개비가 다 탈 무렵 백종관은 자리에 돌아왔다.
“아실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이전무 백으로 들어온 사람입니다. 학교는 고등학교밖에 졸업을 못했고요.”
태수의 뒷골이 멍해졌다. 이전무라면 ‘쥐’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직원들 사이에서는 좋지 않게 인식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이번에 그룹으로 인수되는 과정에서도 전무급에서는 유일하게 해고되지 않은 사람이 바로 이전무였다. 백종관이 그런 이전무의 뒷줄로 입사했다는 것이다.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은 물론 신분도 보장을 못하는 지경에 빠질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제는 백종관이 함께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최소한 그의 입이라도 막는 것이 급선무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럼…”
“그렇지만 이전무는 이전무고 저는 접니다. 저는 노동조합을 결성하는데 찬성합니다. 제가 할 일을 알려 주십시오.”
그날 태수는 백종관과 수원에서 같이 잠을 잤다. 물론 술이 떡이 되도록 먹은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노동조합 결성에 대두되는 하나의 관문을 넘어선 것은 물론, 태수가 하는 일에 대한 보람과 기쁨이 최초로 확인된 환희로 취해버린 날이었다.(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