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해탄보험에서 지펴 올린 사무직 노동운동의 불꽃
광화문 중앙의 이순신 장군의 어깨와 머리, 발 밑동에 소복한 눈이 쌓였다. 눈은 하루 종일 온 도시를 뒤덮을 듯이 쏟아져 내렸다. 이상할 정도로 유난히 할 일도 많고 바쁜 날이었다. 연맹의 약도를 전해주며 참가자를 최종적으로 점검하는 일은 긴장가운데 별 탈 없이 이루어졌다.
“저녁에 봅시다.”
“준비는 잘 되고 있지?”
하는 간단한 인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눈치 보며 사람을 만나는 일-그것도 회사 내에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몰랐다.
퇴근시간이 임박하면서 눈은 뜸해지기 시작했다. 광철이 일이 걱정이었다. 고졸사원들은 누가 참가자인지 결국 하나도 알아내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부터가 사실 문제였다. 아직은 장담하기 어려운 ‘삼십 명’이었다. 이제는 마지막 그물을 있는 힘을 다해서 던져야 했다. 지금부터의 그물질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되느냐가 관건일 정도로 삼십 명이라는 인원은 크나 큰 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쩌면 해고될지도 모를 일을 결단하는 사람이 삼십 명 정도는 돼야 노동조합이 제대로 되지 싶기도 했다. 전화를 드는 손이 천 근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업무부죠? 거기 김지선 씨 있어요?”
지선은 자리에 있었다.
어둠이 짙어지면서 눈발은 다시 거세게 퍼붓고 있었다. 태수가 지선이, 천석이와 함께 연맹에 도착한 시간은 8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술 한 잔 같이 하자는 말로 약속을 해 놓고 연맹으로 데리고 오는 길에 노동조합결성에 관한 말을 꺼내자 그들은 별말 없이 같이 왔다. 지선이와 천석은 모두 태수와 입사 동기였다.
연맹에는 얼핏 보기에 스무댓 명의 사람들이 불안한 얼굴로 모여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을 보자 태수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상당수는 입사동기들이었다. 그 나머지 중에는 태수가 처음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마도 영업부 사람들인 것 같았다. 순구가 일어나서 회의실 밖으로 나왔고 연맹간부들을 소개하였다. 별로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광철이는 결국 연락 안 됐지요?”
순구의 걱정스러운 속삭임이었다.
“지금 정확하게 몇 명이야? “
”스물일곱 명이요. “
”앞으로 더 올 사람이 몇 명이나 되지?”
“지금 상태로는 광철이만 나타나면 될 것 같은데.”
“그리고, 회사에서는 아직 모르는 것 같지?”
“그런 것 같아요.”
“우선 사람들 불안해하니까 그동안 있었던 일이나 설명을 좀 해 주면서 시간을 보내자.”
“그건 내가 할게요. 혹시 회사에 있을 만한 사람들 더 연락해 보소.”
지금 이 시간에 전화를 한다는 것이 별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태수는 전화기를 찾았다. 신통한 것은 순구가 태수에게 대하는 태도였다. 태수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이해해 주려고 하고 모든 것을 태수와 상의하는 것이었다.(다음 회에 계속)